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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질 결심

[문대청려] 몽사

MDCR 영화 합작 - <헤어질 결심> AU

by. 니트(@nitfxxksoffrvs)

 

 

 

 

 

몽사³ 夢思

1. (명사) 꿈속에서까지 생각함.

2. (명사) 꿈같은 생각.

 

 

 

신재현은 아이돌 외에는 간절한 욕망을 지녀본 적이 별로 없었다. 회귀를 거듭하면서 기억의 부가적인 효과는 탈취됐고, 그에 따른 필연으로 취향은 무던해졌다. 하지만 고요한 수면 위 같던 심장에 잉크처럼 퍼지듯이 서서히 물든 짝사랑은, 마음을 자각한 순간 파도처럼 짙고 무겁게 자신을 덮쳐왔다. 누군가를 자꾸 보고 싶고 만나고 싶은 마음이 이렇게 빠르게 심해 속까지 내려올 만큼 깊고 넓어지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무서웠다. 그래서 더 멀어지고 소홀해져야 마땅했는데, 그랬어야 했는데.

 

알게 된 순간 돌이킬 수 없더라. 몇 번이고 ‘청려’를 죽였던 감정이었음에도 도저히 죽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 이외의 사람에게만 철저히 다정하고 친절한 박문대의 심장을 가져다 달라고. 반짝이는 패물을 탐하는 습성을 버리지 못하는 까마귀처럼, 고양이에게 속절없이 목을 내주더라도 그것만큼은 좀 갖고 싶다고 내심 빌었다.

 

 

형, 사랑이랑 재채기는 숨길 수 없대. 웃기지? 스쳐 지나가듯 말하던 채율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고, 신재현은 결말이 뻔한 이 낭만 소설을 애써 덮으려 했다. 들키는 순간을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만남도 연락도 상대가 눈치채거나 수상히 여기지 않게끔 서서히 줄여나갔다. 그에 반비례해 커져만 가던 마음은 나날을 투신했으나 산산이 조각나긴커녕 매번 더 크기를 키워 돌아왔다. 이것도 ‘교정’이라는 특성 덕분일지 신재현은 궁금했다.

 

언젠가 누군가에게 들킬 수도 있으리란 생각은 했지만, 그 비밀의 열쇠를 쥐게 되는 것이 시스템이었을 경우는 막연하게만 상상하던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로 온 셈이었다. 시스템은 ‘청려’라는 제삿밥을 얻어먹은 보답으로, 죽은 까마귀 시체를 물어다 주는 길고양이처럼 날카롭게 신재현의 마음에 남은 미련의 틈새를 파고들었다. 그것이 보여준 가능성은 감히 짐작하지 못하던 것이었다.

 

 

처음에는, 꿈을 통해 이 세계의 박문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워하는 마음이 너무 커서 꿈속에서까지 이렇게 선명히 보이나 싶어 부끄러워졌다. 자각몽이라고 하던가, 이런 걸. 주단이 때때로 주절거리던 쓸데없는 정보들을 여상히 떠올리며 신재현은 천천히 꿈속을 산책하듯 유영했다.

 

이 꿈은 신재현을 유령 내지는 투명 인간 취급하는 듯했다. 콘서트 무대 뒤, 방송 세트장 위, 현실의 자신이라면 절대 마음 놓고 다니지 못할 곳들을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쓸 필요 없이 돌아다닐 수 있었다. 제법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그리고 동반되던 음습한 기쁨. 이곳에서는 아무런 제약과 걱정 없이 박문대를 바라볼 수 있었다. 동그란 뒤통수, 부드럽게 그것을 덮은 염색모. 마치 집을 지키는 강아지와 같이 확신에 찬 귀여운 표정. 너르고, 단단하고, 꼿꼿한 등.

 

시공간 따위에 구애받지 않는, 닿는 것이 당치도 않을 신재현의 구애는 아무도 모르게 계속됐다. 박문대가 지쳐 보일 때, 피곤해 보일 때, 지루해 보일 때. 잠을 이루지 못해 붉어진 눈가를 손으로 감출 때면 생각했다. ‘내 잠을 빼주고 싶네, 건전지처럼.’ 꿈이 너무 현실 같아서인지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깨어날 때면 자신도 모르게 휴대폰에 손이 갔다. 그러나 이내 시간을 확인하고 휴대폰을 꺼두는 것으로 그다음 행동을 의식적으로 제지했다.

 

꿈 속에선 아무도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체득한 신재현은 좀 더 과감히 행동하기 시작했는데, 박문대의 바로 옆에서 기웃거리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그가 자신의 기척을 알아챈 듯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두리번거리면 심장이 떨어질 것처럼 놀라면서도,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며 작게 한숨을 내쉬면 안타까워 가슴이 떨리곤 했다.

 

꿈은 매번 비슷한 곳에서 끝이 났다. 박문대가 한 바퀴 천천히 허공을 살피다 계속해서 찾던 무언가를 꼭 찾은 것만 같이 정확히 자신이 있는 곳을 바라볼 때. 두 사람의 눈이 맞기 직전에 신재현은 꿈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다음 번 잠이 들었을 때, 이전 꿈이 끝난 그 시점부터 다시 꿈을 이어 꾸기 시작했다. 한 편의 영화를 일시 정지했다가 다시 재생하는 것처럼.

 

 

이상을 감지한 것은 꿈속 상황이 구체화하고, 꿈에 체류하는 시간이 길어지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박문대가 자신이 있는 공간을 정확하게 알아채는 데 걸리는 시간도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그와 눈동자를 맞추게 된다면, 그때부터는 꿈이 더 이상 꿈이 아니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생겼다. 하지만 현실에서 박문대를 볼 일이 요원했기에 꿈꾸는 것을 멈출 수는 없었다.

 

수면시간이 길어지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럴수록 박문대의 시선은 더욱 집요하게 신재현을 찾아내려 했다. 박문대의 시선이 닿지 않을 때와 장소를 골라 그를 관찰하는 행위는 신재현이 익숙하게 오래 해왔고 또 잘하는 것이었으므로 그는 방심했다. 끈질기게 신재현을 찾아다니는 꿈속의 박문대와는 달리 현실의 박문대는 자신의 눈길 따위 신경 쓰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었기에. 눈맞춤을 피하는 기묘한 술래잡기가 이어지던 며칠, 드디어 처음으로 두 사람의 눈이 맞아버렸다.

 

 

“찾았다.”

 

 

꿀과 같은 갈색 눈이 진득하게 번뜩였고 신재현은 저항이 무색하게 무언의 힘에 휙 끌려들어 갔다.

 

 

 

*

 

 

 

  [Reality equals vivid dream :]]

 

 

네가 꿈꾸던 모든 것이, 현실이 될 수 있어. 온통 새하얀 ‘청려’가 말했다.

 

눈을 뜨니 꿈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뜨거운 품에 안겨 있었다. 그리고 같은 온도에서 같은 속도로 뛰는 두 심장이 맞닿았다. 신재현은 아득히 눈을 감았다.

 

 

 

*

 

 

 

꿈에서 만난 박문대의 집은 숙소가 아니었다. 남자 혼자 살 만한 적당한 크기의 깔끔한 아파트. 나이는 비슷해 보였지만 이쪽의 박문대는 저년차임에도 이전보다 빠르게 독립한 것 같았다. 신재현은 의아했으나 말을 아끼기로 하고 서로의 앞에 둔 따뜻한 차에 시선을 고정했다.

 

박문대는 그런 신재현에게서 끝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이런 날이 올 줄은 정말 몰랐다는 듯이. 너무 오랜 시간 같은 것을 꿈꾸다 보면, 그것이 눈앞에서 현실이 됐을 때조차 믿을 수가 없다던데. 꿈속의 감각은 현실의 그것과 전혀 다른데도, 마치 꿈을 꾸는 것 같다고 외치는 박문대의 눈동자가 그 경계를 모호하게 했다.

 

 

“나는 어디에 있는 건가요.”

 

 

긴 침묵을 깬 신재현의 물음에 박문대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꿈이 아니야. 여긴 또 다른 현실이야.”

 

 

믿기 힘들겠지만 믿어줬으면 해. 현실인 것을 믿을 수 없을 만큼 다정한 박문대가 그렇게 말했다. 새빨간 거짓말이라도 두 눈을 감고 넘어가 주고 싶을 만큼.

 

 

“널 찾아다녔어.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이걸 들으면 다 알 수 있어, 이내 물기가 서리기 시작한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신재현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똑바로 그를 보려고 노력했다. 꿈속 박문대의 손에 들린 것은 신재현에게도 매우 익숙한 것이었다. 녹음 기능이 출중한 박문대의 휴대전화였다.

 

  [보이저 금제 음반 (A)]

  - 어떤 경계든 넘을 수 있는 메시지.

 

 

“그러니까 이건….”

 

“내가 회귀를 반복하면서 겪었던 모든 일을 기록한 도구야.”

 

“…….”

 

 

회귀라니 무슨 말이지? 신재현의 얼굴이 일그러지자 박문대가 피식 웃으며 폰을 신재현의 손에 쥐여주었다. 현실의 박문대에게라면 절대 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여기엔….

 

 

“미안한데 나, 납치 사건 때 그 녹음본 못 지웠다.”

 

 

박문대가 신재현을 식탁에서 일으켰다. 속절없이 그의 손에 이끌려 검은 천으로 뒤덮인 벽 앞에 섰다. 천을 들추자 사건에 미친 탐정의 수사일지처럼 벽에 더덕더덕 붙은 수십 장의 사진들이 보였다. 아마도 류건우였을 때 찍었을, 청려가 아이돌로 활동했던 시절부터, 누가 찍었는지 알 수 없는 신재현 자신의 사소한 일상을 담은 것들까지…. 그러나 그 커다란 벽의 중앙에 장식된 사진을 발견하고 신재현은 황망해졌다.

 

 

영정사진이었다. 자신과… 콩이의.

 

 

“콩이가… 왜. 어떻게?”

 

 

그럼 여기의, 나와 콩이는. 박문대는 참담한 듯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 이윽고 그의 입이 열린다. 다 말할게, 전부.

 

 

꿈은 현실이 되었다. 현실에서 신재현이 아이돌이라는 꿈을 이뤘던 것처럼. 하지만 언제나 시스템은 그가 바라거나 원하는 그대로의 모습을 내주진 않았다. 꿈속의, 아니 이제는 현실보다 더 생생하게 신재현의 눈앞에 선 박문대는 자신이 ‘재시작’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그 과정이 순탄치 않았고, 그 증거로 지금 이 세계에 신재현이 없다는 것도.

 

콩이는 노견이 되기도 한참 전에 불미스러운 사고나 갑작스레 악화한 질병으로 사망한다. 시기는 랜덤. 그러나 청려는 콩이의 죽음을 경험하고 정확히 402일 이후 자살한다. 자살한 후에 그의 특성인 ‘감정’과 ‘교정’은 박문대의 것이 된다. 이것이 회귀한 박문대가 알아낸, ‘청려’의 죽음에 관한 단일한 패턴이다.

 

 

“어떻게 해도 널 살릴 수가 없었다. 네가 살아 있는 동안은 모든 일이 순리대로 돌아갔지만 네가 죽은 순간부터… 완전히 붕괴됐어.”

 

“…그렇다면 나는.”

 

“미션을 했어. 시스템에 내기를 걸었지. 평행 우주, 혹은 다른 차원, 아니면 이전 회차, 어떤 세계든 살아 있는 너를 온전히 데려오는 것을 보상 조건으로 삼아서.”

 

 

몇 번이고 부딪쳐 가면서, 너를 찾았어. 사실 몇 번 실패했었고, ‘재시작’ 당한 적도 있어. 네가 알던 ‘나’는 무너지고 깨어졌을지도…. 박문대는 말을 마치지 못한 채 길게 숨을 쉬었다. 납치 사건 때 일을 지울 수 없던 이유는… 내가 처음으로 구할 수 없었던 너의 목소리가 담겨 있으니까. 목멘 목소리. 박문대는 신재현의 흐려지는 낯을 보고 걱정 말라는 듯 애써 웃었다. 하지만 신재현은 일렁이며 밀려오는 감정들을 참을 수 없었다.

 

 

“…연락이 안 오면 걱정했어요, 마침내 죽을까 봐.”

 

“…….”

 

“근데, 어떻게….”

 

 

나는 처음부터 네가 나와 같은 부류라는 것을 알았다. 이미 손 쓰기에 너무 늦은 나와는 다르게, 너는 올바르게 승리할 사람이라고 믿었다. 내 뒤에 온 네가 자신을 온전히 지키며 행복을 얻는다면, 나는 숨 쉬듯 우울한 나의 모습이 아닌… 행복한 나의 모습도 네게서 비춰볼 수 있지 않을까, 바랐었던 것이다.

 

그렇게 이기적인 사랑이었다. 앞에서는 심장도 꺼내 쥐여줄 수 있을 듯이 굴었으면서 뒤로는 또 그토록 가볍게 목숨을 버리는 인간의 사랑이란. 그리고 너마저도 나와 같은 선택을 하게 만들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몸에서 두 번째 인생을 살고 있는 현실의 박문대와 재시작 후 몇 번째인지 모를 삶을 살아가고 있는 꿈속의 박문대는 이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을 것이다. 자살을 선택하기 전의 신재현과 지금의 신재현이 완벽히 동떨어진 존재인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에, 박문대가 먼저 신재현의 손에 자신의 심장을 쥐여 주었다.

 

 

“신재현. 그때 사건이 녹음된 이 폰, 가져가서 어디 바다에 버려.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심연 같다고 생각했던 검은 눈동자에 투명한 물이 비치며 빙그르르 돌았다. 수영할 줄 모르는 어린애가 물에 가라앉으며 내는 간헐적인 신음이 들려왔다. 신재현은 헐떡이며, 아주 오래 전 잊었던 눈물을 기억했다. 기억의 부가적 효과는 증폭되어, 스민 줄도 모르게 잉크처럼 퍼지던 슬픔이 파도처럼 그를 덮쳤다. 가늘고 길게 떨리는 신재현의 등에 박문대가 머뭇거리며 손을 올렸다.

 

 

우는구나. 마침내.

 

누군가의 속삭임이 들리는 듯했다.

 

 

 

*

 

 

 

눈앞이 눈물로 흐려져 가물가물하더니 눈을 한 번 깜빡이자 단숨에 시야가 맑아졌다. 물에 빠졌다 구조된 사람처럼 가빴던 숨이 안정될 때까지 신재현은 일어나지 못했다. 베개가 젖을 정도로 울었던 것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 전의 이야기여서 좀처럼 그 사실을 상기하기 힘들었다. 호흡을 가다듬고 일어나 습관처럼 연락을 확인한 신재현의 휴대폰 액정에 보인 것은 음성 사서함에 확인하지 않은 한 건의 메시지가 있다는 안내였다. 신재현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버튼을 눌렀다.

 

 

[네가 그걸 버리지 않겠다면… 또 보자, 우리. 이번엔 함께, 다시 시작하자.]

 

- 음성 사서함이 동기화되었습니다.

 

 

꿈이 아니더라도 그와 닿을 수 있는 수단이 생겼다는 사실이 ‘또’, 꿈만 같았다. 휴대폰을 손에 쥐고 기도하듯 이마에 갖다 대었다.

 

 

 

 

 

몽사² 夢事

(명사) 꿈에 나타난 일.

 

 

 

박문대가 알려준 ‘보이저 금제 음반’이라는 특성은 각자의 음성 사서함에 남겨진 메시지를 공유하고 확인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신재현이 그에게 궁금한 것들을 메시지로 잔뜩 물어보면, 화답하듯 박문대의 목소리가 뒤이어 녹음돼 있었다. 때로는 박문대가 이런저런 잔소리를 더 말해 두기도 했고, 신재현도 질세라 그에게 당부할 것들을 잔뜩 이야기해 두곤 했다. 소통은 꿈에서도 가능했지만 잠을 자지 않을 때 그가 보고 싶으면 녹음된 목소리를 듣고 또 들었다.

 

 

신재현은 꿈과 현실 사이의 그 모호한 경계를 줄타기하며 많은 정보를 알아냈다. 재시작한 박문대의 과거는 미래에 대한 유용한 정보통이었지만 단지 그뿐인 것만은 아니었다. 신재현이 알고 싶었던, 그가 애틋하게 생각하는 박문대에 대한 모든 것을 박문대는 의심하고 꺼리는 것 없이 알려주었다.

 

 

- 좋아하는 향이 있어요?

 

[섬유유연제 향을 좋아해….]

 

[그러니까 네 향도, …아니.]

 

- 왜 말하려다가 말아요? 싱겁긴.

 

 

내 향? 신재현은 손목 안쪽에 코를 가져다 댔다. 콩이가 함께 킁킁거리기 시작하자 웃음이 터져서 그만뒀지만. 다음에 꿈에서 만나면 부끄러워하는 그에게 캐물어야겠다고 심술궂게 다짐했다.

 

 

- 어떤 계절이 제일 좋아요?

 

[가을. 등산 가기에 날씨가 좋잖아.]

 

[아무래도 바다보다는 산이…. 무인도에 갑자기 떨어졌을 때도 그렇고.]

 

- 응, 나도. 높은 곳이 좋아요.

 

 

공자가 말하길,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인자한 자는 산을 좋아한다고 했단다. 그건 너무 어려운 말이었다. 신재현은 어질지도 못하고 자비롭지도 않으나, 낮게 가라앉는 것보다 한 순간이라도 높게 떠오르는 곳이 좋았기에. 정확히 말하면 익사보다는 추락사를 선호했던 것이지만. 잘 보이고 싶은 사람에게 구태여 이런 이야기를 하면 기겁할 것 같아서 말을 아끼기로 했다.

 

 

박문대가 먼저 녹음해 두는 일도 왕왕 있었다. 주로 식사에 대한 걱정이었다.

 

[내가 요리 잘 하는 건 너도 알잖아.]

[근데 네가 좋아하는 요리들은 잘 하기 힘들었어.]

[넌 내가 뭘 해 주든 좋다고 하니까.]

[저염식 같은 건 내 특기도 아니고 잘 하는 게 필요가 없어서….]

[오늘 저녁도 또 샐러드겠지?]

[너는 그게 잘 챙겨먹는 거냐?]

[취향 없는 사람 취향 맞추는 게 제일 힘들더라.]

[아니, 타박하려는 건 아냐. 잘 좀 챙겨 먹으라고.]

 

 

신재현도 깊이 잠들지 못하던 그를 생각하며 가끔 뭔가를 주절댔다.

 

- 당신이 잘 잤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알아 왔어요.

- 미국 해군들이 쓰는 거래요. 증명된 거니까 믿어봐요.

- 자. 침대에 편하게 누워 봐요. 의자에 걸쳐진 해파리처럼.

- 내 숨소리를 들어요. 내 숨에 당신 숨을 맞춰요.

- 이제 바다로 가요. 물로 들어가요.

- 당신은 해파리예요. 눈도 코도 없어요. 생각도 없어요.

-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아요. 아무 감정도 없어요.

- 물을 밀어내면서 오늘 있었던 일을 밀어내요. 나한테.

 

 

그리고 꿈에서 만나요, 나의 그대.

 

 

 

*

 

 

 

연구에 따르면 하루 권장 수면 시간은 평균 7시간에서 8시간 정도다. 물론 박문대에게 해당하는 사항은 아니었다. 아이돌이라는 직업의 특성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박문대는 원래 류건우일 때부터 잠이 많은 유형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의 불운한 인생사와도 무관하지 않은 사실이었다. 습관성 불면은 밤늦게까지 아이돌 팬들만이 아는 각종 소셜 미디어와 커뮤니티를 강박적으로 확인하면서 얻게 된 통제력의 훈장과도 같은 것이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문대문대, 요새 일찍 자네?”

 

“어어. 늙었다고 꼽주냐?”

 

 

 

아니 뭐, 맨날 배 형님한테 늦게까지 폰 한다고 한 소리 듣는 일이 줄면 너야 좋겠지. 이세진이 떨떠름하게 대답하는 것을 대충 넘기며 박문대는 오늘로 백 번쯤 킨 상태창을 다시 켜 노려보는 중이었다. 정확히는 원치 않은 뽑기로 냅다 자신에게 붙은 새로운 특성을.

 

 

 

  [뽑기 성공!]

  ‘모르페우스의 안경(B-)’ 획득!

  몽중산책을 위한 필수품

  - 누군가의 꿈속을 들여다볼 수 있다.

 

 

 

저, 등급 애매한 것 봐라. 재수강도 안 되는 알파벳 성적이다. 이걸 얻기 전까지의 일련의 과정도 탐탁지 않았으며 기억에 뚜렷하게 남지도 않았다. 영 달갑지 않은 인물과 연결이 되어 있으니 꺼림칙한 느낌도 지울 수가 없었다. 아이돌로서 박문대의 신변에 위협이 느껴지는 경우 제일 먼저 용의선상에 오르는 그 ‘청려’가 관련돼 있었으니까.

 

다만 모든 것이 끝난 시점에 이딴 걸 던진 시스템도, 여기 관련된 이 녀석도 도통 무슨 꿍꿍이속인지 알 수가 없다 이 말이다. 박문대는 찌푸린 미간 사이에 지문 두 개를 꾹꾹 누르며 며칠 전 상태창을 통해 확인했던 신재현의 또 다른 상태이상을 떠올렸다.

 

 

 

  !상태이상: R=VD :)

  - 꿈☆은 이루어진다! 곧 현실이 된다.

 

 

 

이게 뭔 개소리야, 이모티콘 귀여운 거 붙였다고 저게 개소리가 아니게 되냐? 박문대는 이제 지긋지긋했다. 팔리지도 않는 명언집에 수록되어 있을 법한 상태이상의 이름 역시. 꿈☆은 이루어진다? 언제적 월드컵이야. 선택을 해도 한국에서 유행했던 자기계발형 격언 중에 제일 구린 걸로 하냐.

 

각설하고 박문대가 파악한 사실은 다음과 같았다. 저 상태이상을 통해 신재현은 아마 회귀 전 과거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아마 소중한, 아니 혹은 두고 오기 아까워한 지난 멤버들이 있던 회차였을지도 모른다. 박문대가 이것을 어떻게 아느냐면, 그도 자는 동안 ‘모르페우스의 안경(B-)’으로 열심히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재현이 꿈속에서 하는 모든 것들을. 장장 석 달 동안.

 

 

“…….”

 

 

알고 있다. 온갖 뒤 구린 짓을 해도 어느 정도 용인되어 온 사이라고는 하지만 이건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짓이 맞다. 그러니 박문대도 신재현에게 터놓고 말하지 못했던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신재현은?

 

신재현은 분명히 이것이 시스템의 농간임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박문대가 내내 신재현을 신경 쓰는 동안 신재현은 한 번도…. 정말이지 단 한 번도…. 이 문제를 박문대에게 상의해오지 않았다.

 

 

“죽을 것 같으면 연락하라”며 밤이건 새벽이건 연락을 하면 무조건 받을 만큼 저자세로 나오던 인간 치고 신재현은 자신이 만난 철면피 중 가장 낯짝이 두꺼운 인간이었다. 그래서 박문대는 처음 이 특성을 사용해 신재현을 꿈속에서 관찰할 수 있게 된 다음 날 바로 신재현의 연락을 기다렸다. 결과는….

 

‘정말 이상하리만치 전화는커녕 문자조차 없단 말이지.’

 

정기적인 콩이의 안부 외에는 살갑게 자주 연락할 만한 건덕지도 없는 사이긴 하지만, 이건 뭔가 잘못됐다. 빙의 후 쓸데없이 더 좋아진 박문대의 감이 경고했다. 그만 훔쳐보고 이제라도 뭔가 물어야 할 테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뒤로 한 채 박문대는 불편한 뒤통수를 베개 위에 편히 뉘었다. 하지만….

 

수마가 그의 머리통을 잡아챘다.

 

 

박문대의 꿈속 신재현은 언제나 뒷모습을 보이며 나타났다. 그 형상은 오래 전, 전시회에서 본 명화 속 주인공과 비슷했다. 제목이 <안개 속 방랑자>*(카스파르 프리드리히, 1818)였던가. 지금 생각해보니 퍽 어울리는 이름이 아닌가 싶었다.

 

특성의 등급이 마뜩잖아 그런지, 꿈의 내용은 무대에 깔린 드라이아이스 같이 짙고 축축한 안개 속에서 애매모호하게 펼쳐지곤 했다. 신재현은 그 속에서 혼자 일인극의 무성 영화를 열연하는 주연 배우였다. 박문대는 그 모노드라마의 유일한 관객으로, 약 3개월 간 심심찮게 발전한 신재현의 연기력을 목격한 단 하나의 증인이기도 했다.

 

‘저거 웃는 거 봐라.’

 

어이없다는 듯 박문대의 입이 자신도 모르게 멍청히 벌어졌다. 그도 그럴 게 신재현의 얼굴이…. 신재현이 과거 회차의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확신한 이유가 바로 저 표정 때문이었다. 회귀를 적어도 백 번은 넘게 했던 지금의 놈에게서 한 번도 보지 못한 그런, 웃음. 콩이에게 조차 지어 준 적 없을 것이 확실한. 소중한 누군가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듯한.

 

신재현이 보이지 않는 그 누군가의 어깨에 기댔다. 그보다 키가 좀 작은지 고개를 한쪽으로 깊게 꺾어야만 가능한 불편한 자세였지만, 그곳만이 제 안식이라는 듯 아주 편한 표정이었다.

 

‘…여자인가? 이 새끼, 꿈에서 연애하냐? 아니, 연애하다 과거 회차 망했냐? 아이돌의 화신이란 새끼가 빠져 가지고….’

 

알게 모르게 쌓인 것이 많았는지, 박문대는 치밀어오르는 화를 목구멍 뒤로 꿀꺽 삼켰다. 나는 너 때문에 신경쇠약 걸리기 직전인데, 속 편해 보인다. 좋아 보여, 잘 지내나 봐. 이젠 앨범 한 장 나오질 않는 래퍼의 구질구질한 유행가 한 구절이 왠지 모르게 어금니 사이에 덜 씹은 고기 조각처럼 끼었다. 그렇게 행복해 봤자 어차피 꿈인데. 다 지나간 일에 왜 그렇게 연연하는데.

 

 

누군가의 어깨에 사락사락 가지런히 떨어지는 신재현의 머리카락에서 박문대는 눈을 떼지 못했다. 드물게도 느슨히 풀어진 신재현의 입매가 쉴 새 없이 뻐끔뻐끔 벌어진다. 그런데도 그 입에서 나오는 단 한 마디도 들을 수가 없었다. 꿈속에서든 아니면 밖에서든. 그렇다고 매일 밤 잠복 수사하는 형사처럼 너의 꿈에 찾아가 감시라는 명목 아래 하염없이 너를 바라보다 간다는, 스토킹에 비견할 만한 이 비밀을 소리 내 말할 수도 없었다. 신재현 역시도 자백하지 않으리라는 비참한 확신만이 박문대와 함께 남았다.

 

뒤숭숭한 기상 후 박문대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확 쓸어 넘겼다.

 

 

‘뭐해?’

 

‘요새 뭔일 없냐’

 

‘한번 보지’

 

 

한참의 공백을 두고 보내진 세 통의 문자. 자기 전 신재현에게 보낸 메시지엔 여전히 답장이 없었다. 전화를 걸어도 여전히 신재현의 부재중을 알리는 자동응답기의 상냥한 목소리는 음성사서함에 메시지를 남길 것을 재촉했다.

 

 

 

*

 

 

 

음성 사서함으로도, 꿈속에서도 신재현은 박문대와 끝없이 말을 주고받았다. 박문대가 되기 전의 류건우는 부모님을 화재 사고로 여의고 난 불우한 어린 시절에도 불구하고, 바람직하고 건전한 인생을 굴곡지게 살아온 남자였다. 하지만 7급 공무원이라는 보장된 안정보다 호수 밑에서 치열하게 물장구치며 사는 백조와 같은 아이돌의 삶을 살아보며 실은 그것이 본인이 간절히 원해왔던 것임을 깨달았다.

 

성공과 실패의 여부가 생존의 위협과 직결되는 상황에 부닥쳤대도 모두 극복하며 그는 그것을 진심으로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 그래야만 행복하다는 것을 알았다. 안정된 결혼 생활과 사랑하는 남편만 있으면 행복한 아내와 다르게 살인과 폭력도 함께 있어야만 행복한 어떤 형사 남편처럼.

 

 

“우리 설문조사에 대한 답이 다 똑같았잖아. 기억 나? 너하고 내가 같은 종족이란 거, 진작 알았었는데….”

 

“단어 선택이 재밌네요.”

 

“그러게. 말해놓고 보니 좀 웃긴가.”

 

“그럼 우린 무슨 종족인데요?”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것이 낫다’는.”

 

“하하!”

 

 

정말이다. 가장 처음 그런 마음을 먹었던 어느 겨울의 옥상을 떠올렸다. 그리고 기구한 운명에 자신을 매어 둘, 그 한 치 앞을 몰랐었던 오만한 선택도. 매번 미지의 어둠 앞을 한 발짝 나아갈 때면 통행료를 목숨으로 지불했다. 각오할 만한 것도 없었다. 그야, 언제나 다시 돌아올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치기 어린 열 여덟의 여물지 못한 몸으로. 어디 잘못되는 구석 하나 없이 온전하게 돌려받는 초심이었다.

 

그렇게 출발선을 다시 마주하면 눈가리개를 찬 경주마처럼 실패의 원인을 극복하고 성취해야 하는 목표만을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영원히 성장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완벽한 아이돌이 되기 전까지 계속 죽어야만 할 것이고, 완벽한 아이돌로밖엔 살지 못하리라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가 오기 전까지. 박문대라는 변수의 등장으로 모든 게 틀어졌지만, 동시에 모든 게 비로소 제자리로 돌아왔을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문대 씨가 내 후배라 좋았어요.”

 

“그래서 날 납치했어? 내리사랑 한 번 지독한 선배님이네.”

 

“…그건 미안해요.”

 

“아니, 탓하려던 게 아냐. 왜 좋았는데?”

 

“내 뒤를 책임질 후배가 품위 있어서.”

 

“데이터 팔이 치고는 자존심 세울 줄 안다는 건가?”

 

“아니, 자살한 사람 치고는.”

 

 

벙 찐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박문대에게 신재현은 살갑게 웃어 보였다. 농담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진심이었다. 나는 나조차도 지킬 줄을 몰랐는데, 오히려 나를 제일 먼저 버렸는데. 하지만 당신은 지키고 싶은 것들을 잊지 않고 소중히 했어. 난 당신의 그런 점이 좋았어요. 꿈속에서 신재현은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용감했다. 현실에서 하지 못하는 만큼 적극적이고 과감하게 마음을 표현했다. 박문대는 자신의 심장을 있는 대로 꺼내 놓는 신재현을 보고 살짝 웃다가 또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꿈에서 깬 다음 날 습관처럼 음성 사서함을 확인한 신재현은 박문대와 똑같은 얼굴이 되었다. 그곳에는 짧지만 애틋한 고백이 긴 여운처럼 남아 있었다.

 

[내가 왜 널 좋아하게 됐는지 정말 오랫동안 고민했는데.]

[네 몸이 꼿꼿해서….]

[긴장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자세가 바른 사람은 드물어.]

[그게 너에 대해 많은 걸 말해준다고 생각했어.]

[너는 굽힐 줄을 몰라서 너무 오랜 시간을 부서졌잖아, 그렇게 외롭게.]

[굽힐 줄 모르는 너 때문에 고생 많이 했지, 나도.]

[하지만 사실 네가 아니었다면 그 모든 생이 다 공허했을 거라고….]

 

박문대의 목소리가 젖어 드는 부분에서 신재현의 눈시울 역시도 뜨거워졌다. 아무리 꿈이라지만 이리도 다정한 사람을 두고 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이제는 꿈속의 박문대를 사랑하는지, 아니면 현실의 박문대를 사랑하는지 구분이 안 됐다. 한쪽과 완전히 헤어질 결심이 서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만 분명해졌다.

 

 

 

*

 

 

 

요새 또 무슨 걱정거리가 있는지 틈만 나면 허공을 바라보는 박문대를 흘끔대는 선아현이 안절부절못했다. 시스템과 관련된 일인가 짐작했지만 박문대가 입 밖으로 꺼내기 전까지는 그것에 관해 묻지 않는 것이 테스타 내의 암묵적 룰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였다. 시야를 공유하지 않는 이상 박문대가 보는 상태창이란 것을 그들도 똑같이 볼 수는 없었으니까. 목도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이 천금이었다. 심지어 회귀한 그 대선배조차도 볼 수 없는 것이라면….

 

저러다 보이지 않는 과녁판에 구멍이라도 뚫리겠구나 싶을 무렵, 박문대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 휴대폰을 쥐고 숙소 밖을 나섰다. 시간이 꽤 늦었는데. 선아현은 숙소 거실에서 빨래를 개던 류청우와 걱정스레 눈을 맞췄지만 류청우는 고개를 저었다. 말해주기 전까진 기다려 보자는 뜻이었다. 육중한 소리를 내며 닫힌 현관문을 바라보던 선아현도 방에 들어가 자신의 휴대폰에서 익숙한 번호를 찾았다.

 

‘브이틱 신재현 선배님’

 

망설이며 액정 위를 왔다 갔다 하던 손가락이 미끄러져 사달을 냈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익숙한 통화연결음은 들리지 않았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소리샘으로 연결된다는 친절한 자동응답기의 여성이 같은 내용을 반복하기 전에 박문대가 급작스레 숙소로 돌아왔다.

 

 

“저 오늘 선배님네 집에 잠깐 들르려고요. 귀가가 늦을 수도 있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전개가 빨라도 너무 빨랐다. 선아현은 어안이 벙벙한 채 자신의 예상이 맞은 게 다행인지 고민했다. 그래도 두 사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면 괜찮은 거겠지? 박문대는 눈에 띄게 불안해 보이는 선아현을 향해 안심하라는 듯 고개를 까딱 했지만 심장의 두근거림은 멈추지 않았다.

 

 

꿈에서 깰 시간이 되자 신재현의 낯이 애달파졌다. 박문대의 손이 등허리를 토닥이며 쓰다듬자 바로 조금 풀어지는 게 스스로도 징그러울 정도였다. 수면 습관이 이미 비정상적일 정도인데 꿈꾸는 것을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비활동기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잠깐 머릿속을 스치자마자 속이 약간 더부룩해졌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더니. 온갖 구설수에 오른 메인 보컬들이나 하던 짓거리를 꿈에서 하고 있는 어리석음을 모를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벌꿀 같은 눈동자가 자신을 따뜻하게 바라봐주는 것이 이토록 달콤할 줄 몰라서, 그것은 차가운 현실의 눈매와는 아주 다른 모양의 것이어서….

 

 

아쉬움이 가득한 눈을 떴다. 협탁 위 핸드폰 액정이 까맣다. 갈증이 심했다. 물…. 콩이는? 자고 있나. 지금이 몇 시…. 산발적인 생각들 사이로 날카롭고 둔탁한 소리가 끼어들었다. 누군가 초인종을 여러 번 누르다 기다리지 못했는지 거칠게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 소리에 맞춰 콩이가 왕왕 짖었다.

 

 

“선배님! 안에 있는 거 압니다.”

 

 

익숙한 목소리다. 꿈속의 것과 비슷하지만 감정의 온도는 아주 다른. 신재현은 약간의 어지러움을 느끼며 침대를 벗어났다. 씻지도 않고 나가는 것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여긴 꿈속이 아니니 잘 보일 이도 없어서 빠르게 체념했다.

 

문을 열고 보게 된 인물은 너무 낯설지만 동시에 익숙해서, 꿈속에서 다시 꿈을 꾸고 있는가 하는 멍청한 생각이 잠깐 들었다. 여기가 현실이지. 자꾸 선을 긋게 되는 자신이 신재현은 퍽 우습게 느껴졌지만 헷갈리는 순간 더 수상한 모양새가 될 것이다. 뭐가 그리 급했는지 헉헉대며 숨을 몰아쉬던 문밖의 상대가 이내 따지듯이 언성을 높였다.

 

 

“대체 몇 시간을 자는 거… 아니, 뭐 해? 그동안?”

 

“갑자기 찾아와서 그게 무슨 말이죠?”

 

“온종일 연락도 안 보고, 핸드폰도 꺼져 있잖아.”

 

 

잠들기 전에 절반 남짓 남아있던 휴대폰의 배터리가 문득 생각났다. 형편없이 갈라진 목소리를 다듬을 새도 없이 침음하며 신재현이 머리를 쥐었다. 이건 예상에 없던 일이다. 당황한 걸음으로 집 안에 있는 자동급수대와 사료 배식기를 확인했다. 다 떨어지진 않았어. 오늘이 며칠이지.

 

불안감이 목덜미를 잡았지만 티를 내면 안 된다는 생각에 그곳을 느릿하게 쓰다듬다가, 뒤통수에 따갑게 쏟아지는 박문대의 의심 가득한 눈초리에 문득 상처받는 자신을 발견하고야 만다. 이건 우습지도 않네…. 다만 갑자기 울컥 올라오는 서러움을 입술에 꼭 내리눌러 물었다. 그와 후배님은 다른 사람이다.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몇 번이고 되뇌다 이내 씁쓸해졌다.

 

휙 뒤를 돌아보는 신재현의 입매가 일자로 무표정한 것을 보고 박문대는 조금 숨이 막혔다. 그것만이 이곳이 그의 꿈이 아니라는 방증이었다. 박문대의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내가 그렇게 만만하냐? 너 대체 이번엔 또 무슨 꿍꿍이야?”

 

 

어떤 말은 입 밖으로 튀어 나가는 순간부터 마음에 새겨진 실수가 된다. 박문대는 자신이 그런 말을 할 줄 몰랐다는 듯 움찔했지만 뒤이어 온 신재현의 날카로운 반응에 얼어붙었다.

 

 

“내가 그렇게 나빠요? 당신한테는?”

 

 

 

 

몽사⁶ 蒙死

(명사) 죽음을 무릅씀.

 

 

 

청려의 상태 이상이 변했다.

 

 

  !상태이상: 교정

  - 다시 해보자. 실패 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수백 번을 다시 확인해도 같았다. 괄호 안에 단단히 붙어 있던 ‘비활성화’ 꼬리표가 사라졌다. 말인 즉 슨 이제 청려는 다시 ‘재시작’할 수 있다. 대체 뭐가, 어떻게, 왜 이렇게 됐는지, 박문대는 석 달 넘게 꿈에서 청려를 엿보고도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한 스스로가 완전히 등신이었다는 가감 없는 평을 내렸다. 그가 전전긍긍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 사실을 녀석도 아는지.’

‘아니면 모르더라도, 돌아가길 원하는지.’

 

청려가 과거에 두고 온 잊지 못한 무엇, 혹은 누군가. 그는 ‘리셋 증후군’에서 천천히 벗어나는 중이었다. 시스템이 그 점을 역이용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마 회복한 삶의 감각 중에도 ‘그리움’이 있으리라는 것. 청려의 회귀를 부르는 트리거가 될 수 있는 감정이었다.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청려에게 붙은 다른 상태 이상엔 또 께름칙한 표시가 생겨 있었다.

 

 

  !상태이상: R=VD :) (D+131)

  - 꿈☆은 이루어졌다! 선택의 시간이 온다.

 

 

잘못 봤을 리는 없었다. 디 마이너스가 아니라 디 플러스. 천천히 생각을 해보니 해당 상태 이상이 청려에게 붙은 날부터 카운트 된 것이 맞았다. 문제는 뒤에 붙은 문구도 바뀌어 있었단 것이다.

 

‘선택의 시간.’

 

무엇이 온다는 것인지, 전혀 짐작 가는 바가 없어 불안했다. 아니, 손 쓸 방도 없이 가능한 한 최악의 시나리오가 틀림없이 펼쳐질 것 같았다. 박문대는 며칠 전 청려에게 찾아갔을 때를 떠올렸다.

 

 

죽을 것 같으면 연락하라던 우스갯소리를 천금 같은 약속처럼 지키던 놈이었다. 한밤중이건 새벽이건 자신의 연락은 통화 연결음이 두세 번 가기도 전에 받던 사람이 부재중 전화에 응답도 하지 않고 보낸 카톡도 씹은 게 만 하루였다. 그 와중에 박문대는 신재현이 나오는 꿈을 두 번이나 꿨다. 그러니까 녀석은 내내 잠만 잤다는 얘기다. 하루, 어쩌면 이틀을 넘게.

 

견주인 녀석이라 절대 일과를 그렇게 넘길 리가 없었다. 강아지를 키우는 것은 규칙적인 루틴이 필요한 일이고, 콩이에게 돌아온 이후부터는 깨진 적이 없었을 것이다.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긴 게 아니라면. 사고회로가 여기까지 돌자 정말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머릿속이 백지로 물들어서 숙소에 남은 선아현과 류청우에게 사정을 설명할 생각도 못 하고 그냥 뛰쳐나왔다. 아차 싶어 다시 들어가 어영부영 한두 마디 툭 남기고 곧장 그놈 집으로 갔다.

 

 

이웃집에서 민원이 들어와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초인종을 눌러대도 신재현은 나오지를 않았다. 나중엔 포기하고 손이 부르트도록 문을 두드렸다. 체감상 3시간은 지났던 것 같은데 한참 지나 열린 현관문 옆에 걸린 시계를 보니 30분도 채 안 지났더라, X발…. 그 와중에도 다행히 죽지 않고 살아있는 녀석의 얼굴을 보니 맥이 빠지고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미친 듯이 화가 났다. 왜인지는 자신도 몰랐다. 어쩌면 그게 문제였을까.

 

그러니까 생각보다 신재현을 많이 걱정했기에, 그렇게 광인처럼 굴었던 거였나. 뒤늦게 이런 생각이 드니 진심으로 쪽팔렸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그날 마주했던 그 새하얗고 고요한 얼굴이. 그리고 희끗한 입술에서 나오리라고 상상도 못했던 차가운 일갈이 마음에 걸렸다.

 

‘내가 그렇게 나빠요? 당신한테는?’

 

만만하냐 물었더니 나쁘냐고 되물었다. 박문대의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은 그 뒤에 붙은 말이었다. 당신한테는? 마치 박문대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좋은 사람이라는 것처럼 들렸다. 판만 깔리면 연기력이 형편없어지는 척, 하는 그 가증스러운 면모마저도 출중한 연기인 놈이 무슨. 나한테 그렇게 밑바닥까지 보여 놓고는, 누가 그런 걸 보고도 널….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서 박문대는 속으로 나불대던 입을 꾹 닫았다.

 

 

솔직히 청려가 지은 죄가 있었으니 박문대의 평가가 박했던 것도 사실이다. 놈이 속죄라는 짓거리를 해본답시고 이것저것 찔러댈 때, 맞교환이나 거래라는 명분으로 받아 먹은 게 쏠쏠했지만 사람 첫인상이 3초 만에 결정된다는 이론에 편승해 박문대는 불쾌한 경험을 안겨준 청려를 내내 나쁘게 여기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손해 보는 장사를 할 녀석은 아니었고, 거래는 거래일 뿐이고, 사과를 받고 안 받고는 내 마음 아니냐. 일방적으로 받아 처먹은 것도 아니고 자기 밥그릇은 귀신같이 챙기는 놈하고 거래를 한 거라니까. 나름 깔끔한 기브 앤 테이크로. 그리고 말은 험했어도 나름 녀석을 동료로 인정하고 있었고 은연중에 청려도 그것을 당연히 알 것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는 다 차치하고서라도,

 

서운해 보였다.

 

일견에 느낀 것이니 착각일 수도 있었다. 순간이지만 물기 어린 두 눈이 자신을 쏘아봤을 때 박문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던 것도 같다. 청려는 자신도 아차 싶었던지 곧바로 눈을 내리깔았다. 눈꺼풀이 반쯤 감기니 피로가 극에 달한 것 같은 모습이 됐다. 금방이라도 녹아 없어질 것 같은 소금 인형처럼 우두커니 서서, 그 와중에도 속눈썹이 젖어 들던 게… 이런 게 생각이 왜 나, 박문대 미친놈아.

 

 

현관문에 서 넘어가던 숨을 겨우 가다듬은 박문대가 문지방에 발도 디디지 못했던 그 예상치도 못한 타이밍에 축객령이 떨어졌다. 설명할 의지도 없어 보이던 성의 없는 태도는 불붙은 분노에 부채질을 했다. 오랜만에 찾아온 친구의 냄새를 맡은 콩이가 꼬리를 흔들다 박문대가 신재현을 거칠게 밀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컹컹 짖기 시작했다. 이웃집에 더 민폐를 끼치기 싫었던데다 눈에 뵈는 것이 없어진 박문대의 손에 거칠게 대문이 닫혔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제대로 설명하기 전까지 여기서 못 나가.”

 

 

신재현은 여전히 입을 조개처럼 꼭 다문 채였다. 박문대의 다그침이 계속됐지만 그의 눈에서 튀었던 차가운 불꽃은 서서히 침잠했다. 참을 수 없는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메꿨다. 신발을 벗지도 못하고 불청객이 된 박문대와 무언가를 숨긴 전적이 있던 수상한 집주인 신재현의 기묘한 대치는 오래 가지 못했다. 박문대가 제 화에 지쳤기 때문이었다.

 

 

“독한 새끼.”

 

“그래요. 늘 하던 대로 나를 피의자로 대하면 돼요.”

 

“뭐?”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으니까.”

 

 

신재현의 입꼬리가 비뚜름히 올라갔다. 아무리 노력해봤자, 당신이 피해자고 내가 피의자란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에요. 피의자, 알죠? 끝없이 의심받는 사람. 납치와 폭행이 없었다면 성립될 수 없던 사이잖아요, 우리는. 얼굴 보고 말이라도 하려면 생존에 위협이 되는 사건 정도는 일어나야 하죠. 가령, 비행기 추락 사고라던가 건물 붕괴 같은. 박문대는 평온하게 이어지는 그 말들에 무력하게 뺨을 얻어맞고도 멍청하게 쫓겨나야 했다.

 

그리고 영혼이 털린 상태로 숙소로 돌아와서 상태창을 켜보니 저 모양 저 꼴이었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청려는 이미 시스템과의 거래를 끝냈다는 것.

 

 

 

*

 

 

 

디데이가 언제인지 도저히 알 방도가 없고, 고물 컴퓨터를 재부팅 하듯 상태창을 껐다 켜도 카운팅은 멈추지 않았다. 상황에 대한 타개책은 보이지 않고 시간만 흐르던 중에 대뜸 가지고 있던 특성이 강화되는 일이 생겼다. 디데이가 다가온다는 신호 같아 불길했다.

 

  [보물 특성 뽑기 ☞ Click!]

 

누르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X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고 끈 달린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시스템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고 있자니 신재현이 상태창 없이 시스템에 처맞고 발리고 구를 때 어땠는지 간접적으로나마 알 것 같아서 기분이 더러웠다. 뽑힌 특성의 이름은 ‘보이저 금제 음반(A)’이었고 가지고 있던 ‘모르페우스의 안경(B-)’과 합성하자 또 다른 상태창이 떴다.

 

 

  [합성 성공!]

  ‘헤르메스의 영사기(A-)’ 획득! 

  경계를 넘어가는 능력

  - 차원 이동 (지정 상대에게만 사용 가능. 사용 횟수: 1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정 상대는 청려일 수밖에 없었다. 녀석이라면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겠지. 뭐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전혀 모르겠지만 저 원하는 대로 움직여줄 성싶으냐. 그렇게 단단히 마음을 먹고 있는 찰나에 놈에게서 정체불명의 소포가 도착했다. 시한폭탄이라도 들었나 싶었는데 평범해 보이는 대포폰 한 대가 들어 있었다. 평범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은 멀겠지만. 박문대의 폰과 똑같은 기종이었다. 박문대는 흘러 나오는 목소리에 바짝 몸을 굳혔다.

 

 

- 안녕, 후배님. 청려에요. 내가 모은 미래의 정보들을 알려 주려고 해요.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

 

 

 

폰에 남은 수많은 음성 녹음들은 다 듣고 기록하는 데만 일주일이 걸렸다. 며칠 동안 몇 번이고 다시 들어도 혼란스러운 내용들이었다. 현실의, 아니 지금의 박문대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 모든 이야기의 출처는 여러 번 ‘재시작’했던 당신의 증언이에요. 말한 것들 중에서 그나마 발생 빈도가 높고 유사한 것들만 잘 추려냈으니 앞으로 시스템이 뭔가를 하더라도 큰 어려움 없이 헤쳐 나갈 수 있을 거예요. 그러길 바라요.

 

- 나는 곧 죽어요. 어떻게 해도 이건 변하지 않을 거예요. 내 손으로, 당신을 구하기 위해서. 그것만이 당신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전부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아마도 미래의 당신에게. 모든 것이 붕괴한 그 세계의 당신은 지금과는 서로 완전히 다른 사람일지도 모르겠지만.

 

- 그 사람에게 붙어버린 내 특성, ‘교정’이라고 하던데, 그걸 없애려면 내가 그쪽으로 가는 게 맞는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내가 그곳으로 가면, “붕괴 이전으로 돌아간다”고 했어요. 하나만 부탁할게요. 콩이를 잘 돌봤으면 좋겠는데…. 거래를 공평히 하는 것을 좋아했으니 그 정도는 해줄 수 있겠죠?

 

- 내가 들었던 미래 중에는 이 내용이 어디선가 새어 나가서, 당신이 미친 사람 취급 받거나 나를 죽인 범인이었다는 음모론에 희생되는 것도 있었어요. 그러니 내가 죽은 뒤에 이 폰은 반드시 버려요.

 

 

후련하게 들리던 그 목소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우습게도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박문대가 유일하게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은 신재현을 향한 자신의 감정 뿐이었다. 다급하게 휴대폰을 찾아 익숙한 번호를 마구 눌렀다. 통화 연결음이 한 번 울릴 때마다 억겁의 시간이 한 번에 빠르게 흐르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그리고 전화가 연결된 순간.

 

 

[“후배님.”]

 

“신재현, 너 어디야.”

 

[“아, 벌써 뉴스가 났나? …생각보다 빠르네, 하하.”]

 

“뭐?”

 

 

벌컥, 하고 방 문고리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쾅 소리와 함께 문을 연 사람은 김래빈이었다. 혀, 형님…. 답지 않게 덜덜 떨며 박문대에게 다가와 자신의 폰을 건넸다. 뉴스 속보 영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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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게 지나가는 뉴스의 자료화면은 분명 얼마 전에도 찾아갔던 곳을 보여주고 있었다. 저주 같기도 하고, 수수께끼 같기도 한 말들이 폰에서 계속 흘러나왔다.

 

 

[“집으로 오지 마요. 불이 크지도 않은데 탄내가 지독하게 나더라고…. 당신, 화재 사고 무서워하잖아.”]

 

“네가 그걸 어떻게, 아니, 이게 무슨…. 너 지금 어디냐고!”

 

[“왜 자꾸 물어요? 내가 어디 있는지, 그게 중요해요, 당신한테? 그게 왜 중요한데요? 그 사람을 만날 방법은 오로지 이것밖에 없다는데 어떡해요.”]

 

“누구를 만나는데! 대포폰, 그거 누구한테 받았어?”

 

[“그 사람. 내가 떠난 다음 그 사람, 내내 편하게 잠을 한 숨도 못 잤다고 했어요. 억지로 눈을 감아도 자꾸만 내가 보였대요. 당신은 그러지는 않을 테지…. 그 사람은 나를 다시 만났을 때 문득 다시 사는 것 같았대요. 마침내.”]

 

“개소리 집어 치고 알아듣게 얘기하란 말이야!”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한 순간 내 사랑은 끝났고, 내 사랑이 끝난 순간 당신의 사랑이 시작됐죠.”]

 

“누가 널… 사랑한다고 했는데? 내가 언제?”

 

[“…난 지금부터 당신의 미결 사건이 되고 싶어서 그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는 거에요. 벽에 내 사진 붙여 놓고, 잠도 못 자고, 오로지 내 생각만 해요.”]

 

“왜 자꾸 딴소리야, 답답하게! 제발…”

 

 

[“대포폰, 그거… 문대 씨, 당신 핸드폰이에요.

기종도 같은 것 보면 모르겠나요.

그거 버려요. 깊은 바다에 버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

 

 

 

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통화는 끊겼다. 다시 걸어도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공허한 알림만이 메아리쳤다. 발바닥에 불이 붙은 것처럼 신재현의 집 쪽을 향해 간절히 뛰었다. 만조 때 바다에 깔리는 안개처럼 저 멀리서 검은 연기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늦지 않았길, 되돌릴 수 있길. 그러나 후배는 언제나 선배보다 딱 한 발씩을 늦는 존재다.

 

박문대는 목이 터져라 외쳤다. ‘청려’가 아닌 신재현의 이름을. 재시작 못한다지만, 재시작할 수 있게 된대도, 너는 재시작하지 않기로 했잖아. 이곳이 너의 마지막 회차라고 했던 걸 잊었냐. 건물 옥상에 검은 인영이 보였다. 곧은 등과 달빛을 받아 아름다운 선의 그림자가. 박문대는 눈을 떼지 않고 똑똑히 보았다. 신재현은 떠밀리지도 잘못 딛지도 않고 골백번을 떨어져 본 사람처럼 미련 없이 훌쩍 발을 뗐다.

 

그때 섬광처럼 박문대의 머릿속을 지나간 것은 단 하나 뿐이었다.

 

 

  ‘헤르메스의 영사기(A-)’를 사용하시겠습니까?

   지정 상대: 청려(신재현)

   예 / 아니오

 

 

손가락을 댈 곳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옥상 밑의 땅바닥을 목표로 비상하여 건물 중간을 날며 추락하던 날개 없는 실루엣의 경로가 썩은 동아줄처럼 싹둑 잘렸다. 신재현이 박문대의 눈에서 감쪽같이 사라지고, 누군가 페이지를 넘긴 것처럼 서걱,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비현실적인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

 

 

 

그동안 봐왔던 신재현의 무성 일인극. 그 상대 배우의 정체가 공개된 순간 박문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안녕. 아니, 별로 안녕하지는 못한가?”

 

“…….”

 

 

빠득하고 어금니 갈리는 소리가 나자 인사를 한 쪽이 피식, 비소를 흘렸다. 신재현의 양태를 하고 있던 시스템을 보고도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런 같잖은 수법에, 너무 당연하게 자신 역시도 써 먹힐 수 있다는 것을. 흔들리는 정신 상태까지 간파당하니 불쾌함은 배가 됐다.

 

저기 잠든 것처럼 보이는 신재현에게 무릎을 내어 주고 있는 것은 자신과 똑같이 생긴….

 

 

“너랑 똑같이 생긴 시스템, 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그럼 아니냐? 개짓거리 그만하고 걔 좀 내버려 둬, 이제.”

 

“여기가 끝인 거 같아?”

 

“X발 이놈이고 저놈이고 간에 알아 듣게 얘기를 처하라고…!”

 

“아무리 말해도 ‘지금의’ 너는 이해 못 해, 박문대.”

 

 

잘도 간단하게 얘기했었지. 이제 재시작 같은 건 못하니까 니 인생 살라고. 이제까지 쌓아온 게 아깝지도 않냐고. 어딘가 짓무른 목소리가 일갈하자 박문대는 달려들던 걸음을 멈췄다.

 

 

“그래…. 그 겨울 옥상에서 몸을 던졌던 신재현만큼이나 오만했지, 과거의 나도. 어쩌면 믿었던 거야. 나만큼은, 어떤 ‘단일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다. 한 때 도움은 받았지만 이제 반면교사에 불과한 그 녀석처럼은 하지 않을 거라고. 더 잘할 거고 그래서 보여줄 거다, 이렇게 살 수도 있다는 걸.”

 

“무…슨.”

 

“근데 그건 너라서 가능한 일이지, 안 그래? 가이드라인도, 오답 노트도 있지. 그린 듯한 주인공의 인생. 이미 결말이 나서 아무도 관심 없는, 실패한 베타 테스터의 말로 따위는 고려 사항도 아니었겠고. 자기감정 하나 제대로 정의하지 못하는 주제에 거슬리니 눈앞에 두고 손을 뻗어주진 않았지.”

 

“이제 와서 이러는 이유가 뭔데. 사라지기 직전에 발악이라도 하는 건가?”

 

“시스템 엿먹인 거, 잘했다. 그런데 조금만 더 빨리하지 그랬냐.”

 

 

그 놈 곪아 터져서 죽기 전에. 이대로 가다간 또 그럴 것 같아서 내가 데리러 왔어. 나는 필요하거든.

 

 

“죽지 않고 살아있는 신재현이.”

 

“뭐?”

 

“우리는 서로가 필요해. 너에겐 없어도 되지만 난 안 돼.”

 

 

결연한 눈. 자신과 섬뜩하리만치 닮은 얼굴, 목소리, 말투. 시스템은 이렇게까지 인간적이지 못하다. 그러면, 그렇다면 저건 뭐지? 눈앞의 개X끼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불댔다.

 

 

“내가 의심이 많아서 정말 긴 시간을 고민했어. 그런 말 알아? ‘마침내 내 인생 최고의 적을 만났는데, 그가 바로 나라면?’*(<이야기를 이야기하다>. 정유정, p94)”

 

 

여기까지 오는데 너무 오래 걸렸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네가 ‘헤르메스의 영사기(A-)’를 신재현에게 쓰리라는 확신이 서질 않아서…. 걔가 또 거기서 떨어지는 걸 봐야 했다는 게 X 같았는데 방법이 없었다. 처음 겪었던 신재현과의 이별이 기억이 안 나더라고, 끝까지. 근데 이제야 알겠네. 영사기, 그 아이템에 붙은 불이익이 이거였어. 꿈에서 본 일들을 다 잊어버리는 것…, ‘진실 확인’이랑 비슷하게. 그래서 기억이 안 나는 거였어….

 

 

“영사기에 들어가는 활동사진은 처음과 끝을 같은 장면으로 이어야 해. 그래야 영사기가 계속 돌아가더라도 어색하지 않게 이어지니까.”

 

 

폭발하기 직전의 시한폭탄 초침처럼 빠르게 중얼대는 또 다른 ‘박문대’의 말에 대꾸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듣고 싶지 않은데 들어야만 할 것만 같은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

 

 

“그래서 시스템은 내가 제일 처음 시작했던 과거 회차까지 오게 만든 거야. 이 회차의 기억이 거의 백지에 가깝게 표백된 상태가 내 핸디캡이었고.”

 

“이 꿈속 세계는 차원 사이의 이동 통로라고 생각하는 게 편할 거다. 시스템이 쓰던 수법을 그대로 가져오는 게 마땅치는 않았는데 별다른 방법이 없었어. 네가 네 차원의 신재현에게 영사기를 쓰게 해서 이 꿈으로 신재현을 넘기고, 나는 이 꿈에서 신재현에게 영사기를 써서 신재현이 내 세계선에 온전히 도착하게끔 만들 거야. 처음부터 이 방법 뿐이었어.”

 

“신재현에게 받은 대포폰은 원래 내 폰이야. 이 꿈에서 깨면 걔가 녹음해 둔 모든 내용에 의존하게 될 텐데, 그렇게 되는 게 시스템이 원하는 거겠지.”

 

 

‘박문대’의 눈이 번뜩인다.

 

 

“내가 이렇게 아무리 설명해봤자 넌 이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 아무것도 기억 못 해. 꿈에서 깨면 네 기억은 없어지고, 자기 집에서 투신하는 모습을 목격당한 것을 마지막으로 신재현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실종 상태고, 넌 계속 걔를 찾겠지.”

 

“내 세계로 온 신재현에게서 ‘교정’은 없어질 거고, 너는 곧 상태창으로 ‘교정’을 얻을 거다.”

 

“그렇지만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라. 신재현이 되어볼 기회. 걔를 조금이나마 이해해볼 기회.”

 

 

이제 신재현은 내가 데려갈게. 이렇게 타임 루프를 매듭짓고, 마침내.

 

 

“우리는 함께 나아갈 거야.”

 

 

 

*

 

 

 

박문대는 여전히 달리고 있었다. 꿈을 꾸는 듯한 묘한 기분이었다. 뉴스를 본 사람들이 분명히 신재현이 떨어지는 것을 봤는데, 추락 지점에서는 아무도 발견되지 않았다. 낙하한 신재현의 실종을 최초로 목격한 사람이 되어 경찰 조사에 불려 나갔을 때도 박문대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신재현의 개, 콩이를 거둔 것은 박문대였다. 친한 선후배라는 선을 넘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분분했으나 박문대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침묵 뿐이었다.

 

책임감이 지나치게 강한 박문대를 아는 사람들 모두가 박문대를 걱정했다. 신재현이 사라진 이후로 박문대는 꿈 없는 불면에 끝없이 시달렸다. 이제 박문대의 꿈에도 나오지 않는 신재현에 관한 사실은 희뿌연 안개 속에서 잊혀갔다. 내내 찾아다니는 박문대를 제외하고는…. 신재현에게 납치 당했던 그 장소에까지 찾아갔던 날 박문대는 폰에 엄청난 용량의 녹음 파일이 저장된 것을 발견했다.

 

 

- 내가 모은 미래의 정보들을 알려 주려고 해요.

 

 

신재현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리고 박문대의 상태창에 새로운 글자가 반짝인다.

 

 

 

  [특성: ‘교정’(A)]

  - 실종자의 궤적을 쫓는 당신을 위한 단서

 

 

 

  [미션 발생!]

  목표: 청려(신재현)의 귀환

  보상: 귀환자의 상태이상 제거

  패널티: 청려(신재현)에 대한 기억 삭제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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