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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섞인다면

“세계는 한 개가 아니에요. 후배님.”

 

신재현이 웃었다. 문대는 그럼 너는 다른 세계를 알기라도 하는 거냐고 티벳 여우 표정으로 보았다.

 

“여러 세상이 있고 여러 가지 가능성의 나도 있지요. 내가 재시작한 세계들 또한 그대로 끝나지 않고 존재해요. 내가 죽은 세계가 최소한 수백개는 된다는 소리지요.”

“그래서.”

 

문대는 신재현의 손목을 잡았다. 그러니 그런 세계가 하나 더 늘어나도 괜찮다고 뛰어내릴까봐 두려웠다.

 

“그 말을 지금 나한테 하는 저의가 뭐냐.”

“내가 후배님을 사랑하고 후배님이 나를 사랑하는 세계 또한 있을 거라는 소리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문대는 이마를 짚었다. 저놈 진짜 골 때리네.

 

한숨을 내쉬고 나서 말했다.

 

“너 방금 내가 너한테 고백했다는 거 까먹었냐? 하루 전 일도 아니고 일 분 전 일이다. 그래서 이 세계의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냐?”

“아니요? 나도 후배님을 사랑해요.”

“그러면 뭐가 문제냐...”

“그냥 생각나서 말해봤어요. 나도 당연히 후배님을 사랑하지. 그러면 우리 사귀는 건가요?”

“응. 사귀자. 결혼을 전제로. 결혼은 은퇴하고 나서 하자.”

“그래요.”

 

신재현이 웃었다. 저놈 진짜 웃으면 이쁘긴 하지. 이쁘니까 내가 참는다.

 

문대는 신재현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순순히 끌려오는 사랑스러운 사람에게 입을 맞추었다. 신재현이 다시 웃었다.

 

+++

 

“너 내가 강아지여서 좋은 건 아니지?”

 

문대는 강아지 모습으로 신재현에게 이쁨을 받다가 사람 모습으로 변해서 물었다.

 

신재현은 무릎 위에 올려놓았던 강아지가 사람으로 변해도 당황하지 않고 머리를 계속해서 쓰다듬었다.

 

신재현의 품에 꼬옥 안겨 문대는 쓰다듬을 받았다. 신재현은 옆에서 자기도 쓰다듬어달라 꼬리를 흔드는 콩이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강아지여서 좋은 건 아니지요. 플러스 요인은 됐지만.”

“그런거면 됐어.”

 

문대는 신재현의 살냄새를 맡았다. 달콤했다.

 

곧 휴식기가 끝나서 섹스를 못하는 게 아쉬웠다. 몸에 자국을 남기면 안되니 그냥 끌어안고 있는 것으로 만족했다.

 

“이번 활동기가 끝나면 같이 여행이라도 갈까.”

“그래요. 우리를 알아보는 사람이 적은 곳으로 가요.”

“응.”

 

문대는 신재현의 품에 파고들며 어리광을 부리듯이 머리를 문질렀다.

 

엉덩이를 톡톡 두드려주는 손길이 좋았다. 꼬리를 살랑이며 문대는 연인과의 한때를 즐겼다.

 

+++

 

“그래서, 너희 결혼한다고?”

 

배세진과 이세진이 물었다. 문대와 신재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고등학교 때 처음 만나 사귀기 시작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해 같은 반이 되었는데 둘이 말하길 한눈에 반했다고.

 

입학한 첫날. 점심시간에 서로의 손을 잡고 사귀자고 외친 건 학교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첫날 고백해 사귀면서 알콩달콩 시간을 보내더니 같은 대학 다른 과를 갔다.

 

대학교에 가서는 유명한 CC가 되어 잘 사귀더니 드디어 결혼까지.

 

“너희가 헤어졌다면 더 이상할 거 같긴 했는데 말이지.”

“드디어 결혼하는구나. 문대문대.”

“응. 처음 만났을 때부터 신재현의 옆자리는 내 것이었으니까.”

“솔직히 말하면 문대를 놓아줄까도 생각은 했는데.”

“너 또 그러기냐.”

 

문대가 성질을 냈다. 저러는 것을 보면 하루 이틀 일이 아닌 거 같았다.

 

“아무래도 대학교에 가서 세계가 넓어지면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도 있을 거고 그런 사람이 대시를 하기도 했으니까.”

“나도 그 생각은 했는데 너랑 반대의 결론을 내렸다.”

 

문대는 신재현의 손을 잡고 꾹꾹 눌렀다.

 

“아무리 좋은 사람이 너한테 대시해도 절대 너를 놓지 않겠다고. 나는 내가 한번 가진 건 절대 안 놓아. 다른 사람한테 줄까 보다.”

“그래서 헤어지자고 한번 말하기도 했는데...”

 

신재현이 난감하게 웃었다. 문대는 새삼 빡치고 서럽다는 얼굴로 그때를 회상했다.

 

+++

 

“우리 헤어지자.”

“...너 다른 사람 생겼냐?”

 

문대는 레포트를 쓰다가 고개를 들어 신재현을 보았다. 신재현은 완성한 레포트를 저장하고 나서 노트북을 닫았다.

 

그제야 신재현이 진지하다는 것을 알고 문대도 레포트를 저장하고 노트북을 닫았다.

 

신재현은 문대와 시선을 맞추었다.

 

“우리가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사귄지 오 년이 다 되어 가지.”

“그렇지.”

“대학교도 같은 곳으로 왔고.”

“응.”

“세상에는 좋은 사람들이 많지. 그렇지 않아?”

“그건 그렇긴 한데.”

“최근 복학한 선배가 너한테 대시 했잖아.”

“어.”

“그 선배님. 객관적으로 봐도 참 좋은 사람이야. 능력도 좋고.”

“그래서?”

“너를 놓아주는 게 좋지 않을까 하고.”

 

아. 뒷골 땡겨. 문대는 뒷목을 잡았다. 저놈은 그래서 나를 놓아주겠다는 건가? 내 의사는?

 

“너 이제 나 안 좋아하냐.”

“아직도 사랑해.”

“그러니까, 사랑하니까 놓아준다고?”

“응.”

“하...”

 

문대는 창문 밖을 보았다. 천장을 보고 바닥을 보다가 신재현과 시선을 맞추었다.

 

신재현 집에서 레포트 쓰기 잘했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상황은 아니었다.

 

문대는 일단 한 가지를 물었다.

 

“나 말고 다른 사람 생긴 거 아니지?”

 

아까 했던 말을 반복하자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 뭐가 문제지 이 새끼는? 문대는 빡침에 서운함까지 올라와서 열이 올랐다.

 

문대는 진정하려고 심호흡을 했다.

 

후우. 문대는 숨을 몇 번 깊게 내쉬고 나서 일어나 신재현의 어깨를 잡았다.

 

“잘 들어. 신재현. 몇 번이고 말한다. 나는 내가 아닌 사람을 네 옆에 둘 생각도 없고 내 옆자리에 너 아닌 사람을 둘 마음도 없어. 내 옆자리에는 네가, 네 옆자리에는 내가 있는다. 알겠냐? 죽었다 깨어나도 너를 놓아줄 마음 없어.”

“하지만 더 좋은 사람이...”

“그러니까!”

 

문대가 소리 질렀다. 신재현과 시선을 맞추고 씹어 뱉듯이 말했다.

 

“내가 사랑하는 건 너라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잖아!”

 

신재현은 눈을 깜박였다. 좋은 사람이 나타나면 물러날 생각이었다.

 

진심으로. 죽는 것 보다는 낫지 않는가.

 

+++

 

신재현의 이번 재시작은 조금 달랐다.

 

고등학교 입학식 때로 돌아왔고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사람이 있었다.

 

박문대. 수많은 재시작 중에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이레귤러였다.

 

이번 회차에서는 아이돌을 하지 않기로 입학식 날 문대의 고백을 받고 결정했다.

 

재시작하게 되는 때는 변하지 않겠지만 그때까지는 문대와 단꿈에 젖어보자고.

 

그렇게 분홍색 학창 시절을 보냈다. 신재현은 이 시간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달콤하고 보드라웠다.

 

대학교도 가서 유명한 CC가 되고 알찬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재시작할 때가 온다.

 

그전에 문대를 놓아주려고 했지만 문대는 격렬하게 거부했다. 죽었다 깨어나도 너를 놓아줄 마음이 없다고.

 

하지만 이 세계도 곧 끝이 나는데. 그전에 너를 놓아주어야 하는데. 아니. 이미 재시작할 시각은 지나지 않았던가?

 

신재현은 끌어안고 키스하는 문대를 막지 못했다. 이윽고 시작된 밤에서 문대를 끌어안고 머리가 터지게 고민했다.

 

죽음에 문대를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그러니 혼자 있어야 한다.

 

신재현은 그래도 시간을 갖자고 다음날 아침. 문대를 밀어냈다.

 

물론 밀어낸다고 밀어내질 거면 문대가 아니었다. 문대는 아득바득 신재현의 곁에 붙어 있었다.

 

신재현을 혼자 두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신재현이 무언가를 예감하고 정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루 종일 붙어 있고 잘 때도 손을 잡고 잤다. 깍지를 단단히 껴서 잡아 손수건으로 묶기까지 했다.

 

문대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일어나려 하면 깨서 어디 가냐고 물었다. 신재현은 난감했다.

 

이러다가 진짜 재시작에 문대가 휘말리겠다. 신재현은 정말이지 그러기 싫었다.

 

자신이 없어도 문대가 살아가기를 원했다.

 

내가 없는 세계에서 네가 행복하기를.

 

신재현은 하루 하루 손가락을 꼽았다. 오늘 세계가 끝이 나려나 내일 끝이 나려나. 피가 마르는 심정이었다.

 

문대는 그걸 눈치채고 신재현을 다독였다. 내가 알면 안되는 거냐. 뭐가 그렇게 불안한데. 등을 쓸어주었다.

 

신재현은 머뭇거렸다. 말해도 될까? 헛소리라고 하지 않을까. 모든 건 네 망상이라고 하지 않을까.

 

평소라면 재시작하고도 남을 때가 지나고.

 

계속 불안해하는 신재현을 보는 문대도 불안해했다. 계절이 바뀌고 또 바뀌었다. 평소대로라면 재시작할 때가 지나갔다.

 

입안이 바짝바짝 마르는 심경으로 있는 것도 못할 일이었다.

 

결국 신재현은 문대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이번 회차는 처음부터 무언가가 달랐다는 말과 함께.

 

문대는 모든 것을 듣고 나서 관자놀이를 짚었다. 애매모호한 표정이었다.

 

“네가 브이틱이라는 아이돌 리더였고 미션을 완료하지 않으면 죽어 재시작 한다고?”

“응. 이번에는 왜 고등학교 입학식 때로 돌아왔고 네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네 재시작에 등장한 게 처음이라...네가 아이돌을 안한 것도 처음이고...”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문대가 말했다.

 

너도 만화나 소설, 영화 같은 건 다 뒤져봤다고 했으니까. 창작물 설정에는 흔하디 흔한 건데.

 

“세계가 한 개가 아니라고 가정하고. 내가 있는 세계와 네가 재시작하는 세계가 섞인 거 아닌가?”

“세계가 섞였다고?”

“재시작 수십 번은 족히 넘게 했다며. 그정도면 세계가 만나거나 섞일 수도 있을 거 같은데.”

 

그런 관점은 처음이었다. 신재현은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죽은 세계가 수십 개라면 문대가 있는 세계도 수십 개 일수도 있고, 두 세계가 만나 하나가 되었다는 가설도 그럴듯해 보였다.

 

“그래서 재시작은 언제 하는데?”

“보통 스무 두 살 겨울에 하는데...”

“지금 너는 스무 세 살 여름을 살고 있는데.”

“...그러게?”

 

이레귤러가 섞인 것처럼 미션 내용에도 무언가 변화가 생긴 건가?

 

정말 세계가 섞이며 미션도 달라졌다면. 그리고 그 미션을 이미 클리어 했다면?

 

반년을 더 살고 있는 신재현의 그 증거였다. 이제까지 신재현은 스무 두 살 겨울을 넘긴 적이 없었다.

 

미션 내용이 달라져 기간도 달라졌을 수도 있지만 이미 클리어 되었다는 쪽에 희망을 걸고 싶었다.

 

그렇다면 신재현은 아이돌이 되지는 못해도 문대와 살아갈 수 있다는 거니까.

 

문대는 고민하는 신재현의 볼에 쪽 뽀뽀했다.

 

“미션이 클리어 되었을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랬으면 좋겠다.”

“그러면 두 번 다시 다른 사람 만나라는 개소리는 안하는 거지?”

“응.”

“진작에 말하고 편해지지...”

 

신재현을 끌어안고 쪽쪽 뽀뽀하며 문대는 반년간 신재현을 괴롭히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에 만족했다.

 

그제서야 신재현도 마음을 놓고 웃을 수 있었다.

 

+++

 

그리고 이제 신재현은 스무 아홉 살 봄을 살고 있었다.

 

미션은 끝났다. 달라진 미션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문대와 살아갈 수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결혼은 처음 해본다. 아이돌이 아니게 되었어도 문대의 사랑이 그만큼 크기에 신재현은 만족하기로 했다.

 

+++

 

“결혼한다니 잘 살아.”

“잘 살아. 문대문대.”

 

배세진과 이세진은 어쨌든 결혼을 축하해주기로 했다. 커플 간의 다툼이야 없는 게 더 이상하기도 하고.

 

문대와 신재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청첩장에는 신랑 박문대. 신랑 신재현. 이라는 이름이 반듯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

 

“꿈이네.”

“꿈이었네요.”

 

문대와 신재현은 잠에서 깨어 눈을 깜박였다.

 

서로 같은 꿈을 꾸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일어나자 그 말을 할 정도의 꿈이었다.

 

신재현을 끌어안고 있던 문대는 아까 꾼 꿈을 말했다. 신재현도 같은 꿈을 꾸었다고 했다.

 

“우리가 아이돌이 아니게 되었지만 미션이 완료되어 결혼하고 잘 사는 세계도 있었네요.”

“그러게. 세계가 그렇게 섞일 수도 있구나. 그럼 그 세계의 류건우와 큰달은 어떻게 된거지...”

“고민해도 답은 없잖아요.”

“그렇긴 한데.”

“나는 지금도 좋으니까. 어쨌든 후배님이 내 옆에 있고.”

“나도 네가 내 옆에 있어서 좋아.”

 

문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신재현이 나지막하게 웃었다.

 

은퇴까지는 많이 남아 있었지만 꿈 속에서 보았던 세계처럼 문대는 영원히 자신의 곁에 있을 것이다.

 

“우리. 앞으로도 잘살아봐요. 다른 세계의 우리에게 질 수는 없지.”

“너는 그런 곳에서도 승부욕을 불태우냐. 싫다는 건 아니다. 좋아. 아주 좋아.”

 

신재현의 품에 포옥 안기며 문대는 영원을 약속했다. 신재현은 웃었다. 행복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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