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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리의 법칙

20xx년 x월 x일

 

“참, 나.”

박문대가 차창에 기대 있는 힘껏 코웃음을 쳤다. 방금 또 신재현이 ‘실실 쪼개는’ 모습을 목격한 참이다. 신재현의 웃음은 박문대가 유구하게 솔직하지 못한 분야 중 하나였는데 그건 그와 연애를 시작하고서도 변함이 없었다. 지금 속이 뒤틀리는 이 감정은 저 X끼의 웃는 모습이 정말 재수 없기 때문이다. 절대로 다른 이유는 없다. 그는 곧 다시 팔짱을 끼곤 웃는 모습이 예쁜 자신의 애인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 재수 없는 미소를 외간 남자를 향해 보내고 있는 애인을.

그 망할 외간 남자는 신재현보다 키가 컸고 흔히들 말하는 남성적인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모로 보나 완벽한 외양을 가진 사람이며 요즘 한창 뜨고 있는 젊은 연기파 배우. 게다가 평소 무뚝뚝하기로 소문난 사람. 그런 사람이 신재현을 보며 사람 좋게 웃고 있었으며 그건 신재현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빵!

결국 순간의 혈압을 이기지 못하고 박문대가 경적을 울렸다. 신재현, 그리고 그와 다정히 이야기를 나누던 멋진 남자가 화들짝 놀라 차 쪽을 돌아봤다. 박문대는 끓어오르는 화를 얼른 가라앉히고 애교 많은 후배의 웃음을 지어 보였다.

“놀라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그런데 지금 출발하지 않으면 늦어서요.”

“아, 그렇네요.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신재현이 남자에게 살랑살랑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차에 올라탔다. 창문을 통해 인사하는 남자를 못 본 척, 박문대가 경찰에 쫓기는 용의자 차량처럼 액셀을 콱 밟는다.

박문대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상습적으로 행해져 굳어진 루틴에 따르면 어딘가 심통 난 박문대의 눈치를 살피던 신재현이 애교 섞인 말투로 미안해요, 화났어요? 라고 물어오며 신호에 걸린 틈을 타 박문대의 볼을 콕콕 찌르는 것이다. 그러면 박문대는 5분 전 이미 기분이 풀렸다는 사실을 감추고는 알겠다니까. 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메리지 블루라는 말 알아요?”

X발, 박문대는 손에서 미끄러질 뻔한 핸들을 가까스로 꽉 붙잡았다. 이 질문은 단 두 가지 이유만으로 그러지 않아도 어수선한 박문대의 마음을 더욱 어수선하게 만들었다. 첫 번째는 신재현이 이 질문을 한 바로 이 시점은 누가 봐도 멋있는 남자와 사이좋게 웃음을 터뜨리며 대화를 나눈 직후라는 것. 두 번째는 박문대가 신재현 몰래 준비한 청혼 반지가 바로 이 차 안에 있다는 것.

“갑자기 뭔 소리냐.”

“말 그대로예요. 아는지 해서.”

“그게 왜 궁금한데?”

“그냥…….”

잠시 말끝을 흐리던 신재현이 차창에 턱을 괴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썬팅이 진하게 되어있는 창문이 보여주는 세상은 다소 칙칙하다.

“우리 소속사 직원 한 명이 이번에 결혼하거든요. 아까 그 사람도 직원 지인이에요. 대화하다 보니 결혼식 얘기가 나왔는데.”

“근데.”

“직원이 메리지 블루 때문에 조금 힘들어했다, 이런 말을 하더라고. 나는 그런 단어를 처음 들어봤어요. 그런 단어도 있구나…….”

뭐지? 뭐냐고 X발. 박문대의 머리가 온갖 가정을 늘어놓으며 팽팽 돌아가기 시작한다. 얘 지금 뭔가 마음에 불안한 게 있나? 요즘 우울한가? 최근에 기분 안 좋은 일이 있었나? 아니, 그런데 우리 아직 결혼의 ㄱ자도 안 꺼냈잖아.

1초 동안 신중히 고민해본 박문대는 우선 침착하게 답했다.

“그 단어가 왜. 뭐 걸려?”

“아뇨. 별 뜻 없어요. 새로운 걸 알아서.”

이래놓고 별 뜻이 없다 하면 참 신빙성 있다. 그치? 박문대가 입술 안쪽을 깨물며 핸들을 더욱 꽉 움켜쥐었다. 박문대를 힐끔 쳐다본 신재현이 말했다.

“그나저나 운전 꽤 잘하네요. 오랜만에 하는 걸 텐데.”

말 돌리니까 더 수상하다 X꺄.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 솔직한 심정을 섣불리 드러낼 수는 없었다. 우선은 후퇴다.

“…뭐 어려운 일도 아닌데.”

“맞다. 이번에 콩이가…….”

 

2시간 후. 자동차가 천천히 멈춰 선다.

“내려줘서 고마워요. 남은 운전 조심히 하고. 연락할게요.”

신재현이 싱긋 웃어 보이고는 조수석 문을 닫았다. 박문대는 신재현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핸들이 머리를 쿵 박았다.

원래 계획은 이러하다. 이 근처에 프라이빗 룸에서 일행과 조용히 식사를 할 수 있는 식당이 하나 있다. 도착 예상 시간대로 지금은 저녁 7시. 도착 3분 전 말을 꺼낸다. 야, 배고프지 않냐? 예상 답변, 조금? 후배님은? 그러면 자연스럽게, 먹고 가자. 배고파. 그리고 검색하는 척 1분 후, 이 근처에 식당 있대. 그리고 미리 검색해둔 식당으로 향한다. 밥 먹고, 스몰토크 좀 하다가, 야 사실 할 말 있어, 로 시작하고 나랑 결혼하자, 신재현. 으로 마무리되는 구구절절 청혼 멘트 읊기.

신재현은 거창한 이벤트보다는 조용하고 진심이 담긴 프러포즈를 선호한다. 때마침 신재현의 오늘 일정은 그리 타이트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최적의 기회를 그놈의 메리지 블루인지 뭔지가 망쳐버렸다. 입으로는 시시콜콜한 대화를 이어 나가면서도 속으론 지금 신재현의 상태와 기분을 가늠하느라 무슨 정신으로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알다가도 모르겠는 놈. X발 그게 네 매력이긴 하다만. 박문대는 다시 핸들에 머리를 쿵쿵 박았다.

 

 

5개월 뒤, 20xx년 x+5월 x일

 

인생은 무상하다. 몇 년 동안 아주 친했던 친구랑도 한순간 허무하게 멀어지는 게 바로 인생이다. 그런데 멀쩡한 친구 하나 없는 애인놈이 어떻게 이 단순한 인생의 법칙을 거스르는지 모를 일이라고, 박문대는 생각했다. 말이 어려운데 간단히 설명하자면 다섯 달 전에 봤던 그 잘생긴 배우랑 아직까지 연락하고 있어서 심사가 뒤틀렸다는 소리다.

“네, 그럼 그때 뵐게요. 다시 한번 축하드려요.”

긴긴 통화를 마친 신재현이 드디어 전화를 끊었다. 오랜만에 애인과 단둘이 보내는 시간에 외간 남자와 통화라니. 이게 말이나 되나?

“미안해요. 통화가 너무 길어졌네.”

신재현이 박문대 옆에 앉으며 말했다. 그때까지 입을 꾹 다문 채 뚱한 표정으로 콩이를 쓰다듬고 있던 박문대가 입을 열었다.

“그새 더 친해졌나 봐.”

“음?”

“그 사람이랑. 친해 보여서.”

신재현이 다소 장난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박문대 볼을 콕 찔렀다.

“친해 보여요?”

“친해 보이니까 하는 소리 아니야.”

“안 친한데. 나 봐봐요. 화났어?”

“화 안 났어.”

신재현이 뒤돌아있는 박문대의 목덜미에 이마를 콩 박고는 어깨에 턱을 올린다.

“화 풀어요. 진짜 안 친해요.”

“화 안 났다니까.”

“그 사람 결혼한대요.”

“뭐?”

박문대가 심통 난 뒤통수를 거두고 드디어 신재현을 마주 봤다.

“진짜?”

“네.”

아, 거슬리는 놈 드디어 치웠다. 내가 치운 게 아니고 지가 알아서 치워진 거긴 하지만. 박문대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으나 겉으로는 무덤덤한 척 표정을 가다듬으려 노력했다. 참고로 신재현은 그런 박문대가 매우 귀엽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다른 사람들한텐 말하지 마요. 아직 기사 안 났으니까.”

“당연하지.”

“그렇게 안 봤는데 생각보다 신중하지 못하더라고요. 1년밖에 안 된 사람이랑 결혼이라니.”

멈칫, 콩이를 현란하게 쓰다듬던 손이 경직된다. 참고로 박문대와 신재현이 만난 기간은 10개월 남짓이다. 박문대가 청혼을 하려던 그때는 5개월 남짓.

“그게 왜? 진짜 사랑하면 할 수도 있지, 뭐.”

“그게 바로 성급하다는 거예요. 감정에 휩쓸려서 이성적인 선택을 내리지 못한 거죠.”

“이성적인 선택일 수도 있지.”

“고작 1년 사랑해봤으면서 뭘 믿고?”

그럼 넌 지금 나랑 결혼하자고 하면 못할 것 같아?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으나 박문대는 차마 그 말만은 뱉지 못했다. 사실상 청혼이랑 다를 바 없는 건데 이렇게 초라한 청혼 멘트를,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다행이었다. 와, 그때 청혼 안 하길 진짜 잘했다. 핸들에 머리 박는 선에서 끝나서 정말, 정말로 다행이다. 청혼했었다가는 핸들에 머리 박는 건 고사하고 정신줄 놓고 운전하다가 차를 가드레일에 박았을 수도. 신재현은 뭐라고 하면서 거절했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해서 별로 상상하고 싶지는 않다.

아무튼, 그래. 넌 나랑 결혼 못 한다는 거지. 어쩐지 가슴이 쿡쿡 쑤셔온다. 진짜 사랑하면 할 수도 있는 거잖아. 우리처럼 진짜 사랑하면…….

“생각해보니까 나 일정이 있었어. 숙소에 가봐야 할 것 같아.”

“오늘 뭐 없다고 하지 않았어요?”

“방금 생각났어.”

“밥 먹고 가요.”

“아니야. 지금 가야 할 것 같다. 잘 있어.”

잔뜩 풀이 죽은 채 현관을 나서는 박문대를 신재현이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쳐다봤다.

 

 

5개월 뒤, 20xx년 x+10월 x일

 

“신재현이 나랑 결혼 안 하려나 봐.”

“문대문대. 그런 심각한 얘기할 때는 깜빡이 좀 켜고 서론부터 천천히 들어오면 안될까?”

“오늘 날씨가 참 좋다. 밥은 먹었어? 할 얘기가 있는데, 그게 뭐냐면 신재현이 나랑 결혼 안 하려나 봐.”

“말을 말자 그냥. 그나저나 왜? 무슨 일 있었어?”

“전에 메리지 블루니 뭐니 할 때부터 찜찜하긴 했는데.”

자, 이제 몸을 앞으로 숙여주세요. 숙소 거실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필라테스 영상 속 강사가 박문대의 말허리를 자른다. 요가 매트 위에 다리를 펴고 앉아있던 박문대와 이세진이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박문대가 무릎에 얼굴을 박은 채 말을 이었다.

“신재현 집에서 텔레비전을 틀었는데 최근에 결혼한 그 남자 배우 뉴스가 나오더라. 그 사람 알지.”

“어. 요즘 난리잖아.”

“그 뉴스를 한참 동안 자세히 보더니 신재현이 뭐라고 했는지 아냐?”

“뭐라고 했는데.”

“결국 멍청한 짓 했네. 이랬다니까. 그래서 내가 물어봤어. 뭐가? 그랬더니 걔가 그러더라. 저번에도 말했잖아요. 1년밖에 안 만난 사람이랑 결혼하는 건 멍청한 짓이라고. 맞아 걔가 5개월 전에 그런 말을 했어. 그래서 내가 5개월 전에 그 말을 듣고 했던 생각을 그대로 말했지. 진짜로 사랑하면 결혼할 수도 있지. 너랑 나처럼. 그랬더니 걔가 그랬어. 결혼은 다른 문제죠, 후배님.”

“헐.”

잠시 고민하던 이세진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결혼하기 싫은 게 아니라 지금 결혼하기 싫은 거일 수도 있잖아? 그 사람 성격상 결혼 발표로 그룹에 타격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거면.”

천천히 몸을 일으켜주세요. 텔레비전 속 강사가 말했다. 그러나 박문대는 상체를 벌떡 일으키더니 멍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니야. 그런 건 서로 상의해서 얼마든지 조율할 수 있지. 약혼만 하고 결혼식은 나중에 은퇴하고 한다든가. 문제는 그게 아니야.”

“그럼 뭔데.”

“지금까지 한 이야기들은 양반이다.”

“더 한 게 있다고?”

“이게 다 구라였다는 거야. 사실 결혼 상대와 몇 년 만났는지는 별로 안 중요하대. 결혼이 싫은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어.”

“뭐? 진짜 이유가 뭔데?”

“개인사라 자세히는 설명 못 해. 대충만 말하자면 신재현의 예전 회차에서 브이틱이 안정기에 접어들고 있을 때 한 놈이 상의 없이 결혼 발표를 해버리는 바람에 그룹이 망했어.”

“이 이상 설명 더 필요 없을 것 같은데?”

“그렇네.”

“그건 어떻게 알았는데?”

“술 마셨을 때 물어봤다.”

“환장하겠네.”

“내 말이.”

“어떻게 할 거야?”

“내 말이…….”

 

 

 

 

신재현의 폭탄 발언은 진채율이 콩이의 공을 있는 힘껏 던짐과 동시에 예고 없이 날아들었다.

“어, 어어? 뭐라고?”

콩이는 이미 공을 물어오기 위해 저편으로 달려간 뒤였다. 채율은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작고 귀여운 우리 콩이가 이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을 수도 있으니까.

“후배님이 나랑 헤어지려고 하는 것 같다고.”

“싸웠어?”

“아니.”

“그럼 왜?”

“메리지 블루라는 거 아니?”

“메리지 블루? 들어본 것 같기도 한데.”

“결혼을 앞두고 겪는 심리적인 불안을 말해.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미래에 대한 걱정이나 결혼 전의 일상과 완전히 달라지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지.”

“그렇구나……. 근데 그게 왜?”

“나도 아마 결혼을 하게 되면 비슷한 감정을 느낄 거라고 생각했어. 적절한 단어라고 생각했다는 말이야. 그래서 그 단어에 대해 후배님한테 이야기 했는데. 반응을 보니까 나랑 결혼을 계획했던 것 같더라.”

“뭐, 뭐라고?”

진채율이 펄쩍 뛰었다. 하지만 신재현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덤덤히 말을 잇는다.

“내가 메리지 블루 이야기를 꺼낸 게 찜찜했는지 그 뒤로 결혼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어. 그런데 얼마 전에 결혼한 배우 알지.”

“당연하지.”

“그게 원래 아무나 만나고 다니는 가벼운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안 지 1년밖에 안 된 사람이랑 결혼할 줄은 몰랐네. 그 얘기를 후배님한테 했더니 충격받은 것 같더라. 따지고 보면 나랑 후배님도 사귄 지 오래되지 않았으니까, 내가 후배님과 결혼하기 싫어하는 줄 알았나 봐.”

“헉, 그럼 빨리 정정해야지! 그 뜻이 아니라고.”

“사실인데.”

“어, 어?”

“결혼은 안 돼. 아이돌한테 그게 말이 되니.”

“지금 결혼 발표로 타격이 있을 것 같으면 꼭 지금 할 필요는 없잖아. 약혼만 하고, 나중에 시간이 충분히 지난 뒤에 하면 되지. 그리고 1년 만난 사람이랑 결혼하는 게 그렇게 별로야? 진짜 사랑하면 할 수도 있지!”

“…….”

신재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채율은 그것에 잠시 의아함을 느꼈으나 아직 나오지 않는 가장 중요한 이야기가 남아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왜 헤어지려고 하는 것 같은데?”

“후배님은 결혼을 하고 싶어 하는데 나는 하기 싫어하고. 요즘 고민이 많아 보여. 표정도 어둡고. 나랑 있을 때 전처럼 즐거워하는 것 같지도 않고. 저번엔 술을 마셨는데, 내가 그렇게까지 취한 건 오랜만이라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이거랑 관련된 얘기를 했을지도 모르겠어.”

“이, 이별이랑 관련된 거 말이야?”

“그래. 그래서 어쩌면 나한테 이별 통보를 할지도 몰라.”

“어어…….”

“알아두라고. 혹시 헤어지고도 마주칠 일이 많을지도 모르니까. 별일은 없겠지만.”

신재현이 발라당 드러눕는 콩이를 쓰다듬었다. 담담한 표정과 말투였지만 수년간 신재현을 지켜봐 온 진채율이 그의 상태를 모를 리 없었다. 사실 오늘 콩이와 놀아주자며 신재현을 끌고 이곳에 온 것도 이 이유에서였다. 진채율은 신재현 몰래 휴대폰을 켜 리더가 없는 단체 채팅방에 들어갔다. 오윤신이 보낸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그래서 상황 심각성 어느 정도? 1부터 10까지 중]

[100...ㅠ]

바로 답장이 달린다.

[오마이갓]

[이런...큰일이군요.]

 

 

3일 전, 20xx년 x+10월 x-3일

 

온 집 안의 불이 전부 꺼져있다. 노란색 간접 조명들과 식탁 등만 분위기 있게 약한 빛을 발하고 있을 뿐이다. 식탁 위에는 값비싼 와인과 치즈가 놓여있다. 이미 빈 병도 여러 개 보인다. 박문대는 슬슬 정신이 흐려지는 것을 느끼며 엎드려 있는 신재현을 흔들었다.

“야, 이제 들어가자.”

그가 고개만 돌려 박문대를 쳐다본다. 볼 장 다 봤다고 생각한 박문대조차 신재현이 이렇게 취한 모습은 오늘 처음 봤다.

“니가 웬일이냐.”

“뭐가.”

“눈이 아주 다 풀렸네.”

신재현이 피식 웃었다. 느릿하게 상체를 세웠으나 그것마저 힘겨운 듯 머리를 팔에 기댄다.

“후배님.”

“왜.”

“화났어?”

“내가? 갑자기 화날 이유가 뭐가 있어. 얘 진짜 취했네.”

“화날 이유 있지.”

“뭔데.”

“내가 후배님이랑 결혼하기 싫다고 한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후배님 나와 결혼을 계획하지 않았었나요?”

“뭐?”

“전에 메리지 블루 얘기 꺼냈을 때 후배님 반응 보고 알았어요.”

술이 깨는 기분이다. 박문대는 주먹을 꽉 쥐었다.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대가리가 터지겠는데 하필 지금 이 얘기를 꺼내는 이유가 대체 뭐냐. 하여튼 신재현 한 번을 안 도와준다.

“화 안 났어.”

“진짜?”

“네 마음인데 내가 화내고 자시고 할 게 있냐. 그리고 지금 당장 하기 싫다는 거 아니야. 나중에 시간 충분히 지나고, 너도 나에 대해 좀 확신이 생기면 그때 다시 생각해봐도 안 늦어. 신경 쓰지 마.”

“…….”

“네 말처럼, 아직 사귄 지 얼마 안 됐으니까. 네가 확신이 없는 것도 당연하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이 말을 뱉으면서도 누가 가슴을 푹푹 쑤시는 것 같다. 야 우리가 사귄 지는 얼마 안 됐다지만 알고 지낸 지가 얼마나 됐는데. 같이 큰 문제들을 해결한 게 몇 갠데. 나만 진심이었냐? 박문대가 도로 식탁에 앉아 술잔에 술을 채웠다. 이 주제로 대화를 하려면 아무래도 더 마셔야 할 것 같다. 내친김에, ‘N의 상상 시간’에 했던 상상 하나를 털어놓기로 했다.

“진짜 그 이유 하나 맞냐? 다른 이유는.”

“다른 이유? 예를 들면?”

“육체적 관계의 불만족 같은 거.”

잠시 황당한 표정으로 박문대를 바라보던 신재현이 말했다.

“후배님. 난 후배님과 하는 관계가 아주 만족스러워요.”

“그래. 알겠다.”

“못 믿네. 내가 뭐 침대 위에서 기분 좋은 흉내라도 낸다는 거예요?”

“낼 수 있잖아, 너.”

“그런가.”

“어.”

잠시 박문대를 노려보던 신재현이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허리를 펴고 바로 앉는다.

“…후배님.”

“왜.”

“후배님, 잠깐, 읏, 문대씨.”

“…신재현?”

신재현이 식탁 모서리를 있는 힘껏 꽈악 잡는다.

“아, 박문대, 잠시만. 으응, 후배님, 하아…….”

“야.”

그 뒤로 약 30초 동안 박문대만을 위한 신재현의 공연이 펼쳐지는 동안 박문대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어버버 거리며 얼 타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잠시 뒤 신재현이 어깨를 으쓱해 보일 때까지.

“그러게. 뭐, 할 수 있긴 하네요. 그래도 침대 위에서보다는 확실히 부족한 것 같지 않나요?”

이걸 좋아해야 되는 거냐 싫어해야 되는 거냐. 박문대가 탁 소리 나게 이마를 짚었다.

“넌 웬만해서는 술 마시지 마라…….”

신재현이 웃음을 팡 터뜨린다. 평소보다 텐션이 세 배 정도 올라가 있다.

“하여간 웃겨.”

“미안한데 웃긴 건 너라는 생각 안 드냐?”

신재현이 다시 웃었다. 다음 순간, 예고 없이 박문대 쪽으로 의자를 끌고 가더니 그를 와락 껴안는다.

“뭐, 뭔데. 야 진짜로 무겁거든? 좀 나와봐.”

“이러면 거짓말도 못 하겠네요.”

“뭐?”

꿈쩍도 하지 않는 신재현의 어깨를 밀어내던 손이 멈칫한다.

“미안해. 사실 거짓말이야.”

“그니까 뭐가.”

“후배님에 대한 확신 같은 건 사귄 지 3일 됐을 때도 있었어요. 지금 당장 결혼하기가 꺼려지는 게 아니라, 난 결혼이 싫어요. 아주 나중에도.”

“…왜.”

“옛날에…….”

신재현은 과거 얘기를 많이 하는 편이 아니었다. 이전 회차들 중에 하나를 콕 집어서 그렇게 자세하게 말한 건 처음이었다. 그러는 동안 내내 박문대를 껴안고 있었고, 어느 순간 박문대도 신재현을 안고 있었다.

“웃긴 건, 그거 고정 멤버였다는 거예요. 그러다 한순간에 그렇게. 웃기죠.”

신재현이 또다시 웃음을 터뜨린다. 들썩이는 어깨가 온몸으로 느껴졌다. 그 모습을 보며 박문대는 한숨을 삼켰다. 그놈의 메리지 블루, 그래서 꺼낸 얘기였냐. 신재현을 껴안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10일 후, 20xx년 x+10월 x+10일

 

“여보세요.”

“뭐해요.”

“뮤직밤 보고 있다.”

신재현이 휴대전화를 귀에 댄 채 리모컨을 꾹꾹 눌러 음악방송을 틀었다. 두 사람의 텔레비전과 태블릿 속에서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신인 아이돌이 몸이 부서져라 열정을 불태우는 중이다.

“열심히 하네.”

“열심히 하죠. 저 때는 대부분.”

“뜰 거 같냐.”

“글쎄. 가능성은 낮아 보이네요.”

“의외네.”

“뭐가요?”

“단호하게 못 뜬다고 할 줄 알았는데.”

“후배님도 알다시피 그렇게 단언할 수 없는 게 아이돌이라는 직업이잖아요. 여러 가지 요소가 작용하니까. 운이나 시기나 뭐 그런 것들이요.”

“하긴. 쟤네도 잘 될 가능성이 있지.”

“그렇죠. 잘 될 수도 있어요.”

“그치…….”

“후배님.”

“어.”

“내가 며칠 전에 술 마시고 실수한 거 있어요?”

“아니. 왜?”

“그냥. 요즘 기분이 안 좋아 보여서요. 나 때문인가 하고.”

“너 때문 아니야. 그렇게 느꼈다면 미안하다.”

“그럼 왜 기분이 안 좋았어요?”

“그냥 여러 가지……. 나중에 말해줄게.”

“잠은 잘 자죠?”

“그럼. 컨디션 관리는 아이돌의 기본 아니냐.”

“멘트가 답지 않게 작위적인 거 보니 잘 못 자나 보네요.”

“아니야. 연습하다 보면 잠 잘 와. 잠 올 때까지 노래 연습이나 하지 뭐.”

“해봐요.”

“Take your star. 안녕하세요. 테스타 박문대입니다. 오늘 제가 부를 노래는…….”

“문, 문대야? 뭐해?”

“룸메이트가 방해를 받는 것 같은데요.”

“방금 씻고 들어온 거거든? 그럼 나 곧 불 꺼야 해서 이만 끊는다.”

“잘 자요. 잠 안 오면 전화하고.”

전화를 끊은 후 신재현은 곧바로 불을 끄고 침실에 들어가 평소와 같이 누웠으나 꽤 늦은 시간에 잠이 들었다. 수면을 위해 머리를 비우는 일이 조금 오래 걸렸기 때문이다. 박문대는 잠이 올 때까지 노래를 들었다. 이어폰으로 익숙한 멜로디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Cause it’s a beautiful night, We’re looking for something dumb to do. Hey baby, I think I wanna merry you…….

 

 

1개월 뒤, 20xx년 x+11월 x일

 

“크리스마스 영화를 벌써 하냐.”

“조금 이르긴 하네요.”

날씨가 조금 쌀쌀한 어느 날 신재현의 집. 두 사람은 영화 채널에서 흘러나오는 B급 크리스마스 영화를 틀어놓고 소파에 앉아있다. 연말 행사와 무대로 몰아치는 스케줄 직전에 받은 마지막 휴가였다.

“저기 강아지 콩이 닮았다.”

“그러게요.”

“콩아, 저기 봐봐.”

B급 영화는 크게 두 종류다. 황당하거나, 뻔하거나. 지금 신재현 집 거실에 있는 영화관 뺨치는 사이즈의 풀HD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영화는 안타깝게도 후자였다. 본디 크리스마스라 함은 사랑의 결실을 맺는 날, 연인들이 로맨틱한 무드 속에서 사랑을 나누는 날. 이 뻔하디 뻔한 영화는 그 진부한 이미지를 충실히 지켜버리고 만 것이었다. 남자 주인공이 반지를 꺼내 들며 냅다 무릎을 꿇는다.

-앨리스, 나와 결혼해줄래?

-당연하지 제이미. 지금 내가 얼마나 기쁜지 모를 거야.

감정이 북받쳐 눈물을 글썽이던 여자 주인공이 반지를 받아들었다. 그와 동시에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입을 맞췄고, 또 그와 동시에 박문대는 이곳의 분위기가 한겨울의 칼바람처럼 차가워지고 있음을 느꼈다. 방금까지 콩이를 쓰다듬고 있던 신재현의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는다. 박문대는 5분 전 저 영화를 튼 자신을 원망하며 분위기가 완전히 얼어붙기 전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그, 좀 이르지만… 크리스마스 잘 보내고, 새해 복 많이 받아라.”

“후배님도요.”

“연말 무대 때문에 바쁘니까 미리 말하는 거다.”

“그렇죠.”

박문대가 신재현을 한번 안고는 뺨에 입을 맞췄다. 어색하고 당황한 티가 나는 미소가 얼굴에 떠 있었고, 이걸 신재현이 모를 리 없었다.

 

 

 

1개월 뒤, 20xx년 x+12월 x일

 

박문대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을 때, 신재현은 오늘이 비로소 그가 준비하고 또 준비했던 날일 것이라 예상했다. 새벽 한 시는 그러지 않아도 늘 복잡한 박문대의 머리를 더 복잡하게 만들기 충분한 시간이다. 그들이 애써 미뤄왔던 문제, 이별이라는 아주 큰 문제를 직면할 만큼.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가슴께가 저리다. 아마 이 전화를 받으면 지금보다 훨씬 힘들지도 모르겠지. 한숨을 한 번 내쉰 신재현이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그러나 박문대가 꺼낸 화제는 신재현이 예상한 것과 종류가 아주 다른 것이었다. 우선 사정없이 떨리는 박문대의 목소리는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여보세요.”

“…후배님?”

“지금 집이야?”

“아니요. 숙소에 있어요.”

“잠깐 나올 수 있어? 나 단지 공원이야.”

“왜 그래요?”

“…결혼한대.”

“뭐라고요?”

“걔가… 걔가 결혼한대.”

“누가요?”

대답 대신 깊고 불안한 한숨만 들려온다.

“지금 바로 갈게요.”

박문대는 두꺼운 패딩을 껴입은 채 멍한 표정으로 벤치에 앉아있었다.

“괜찮아요?”

“…아. 어, 왔냐. 새벽에 미안해.”

“아니에요.”

신재현이 박문대 옆에 앉자마자 그가 몸을 돌려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내기 시작한다.

“류건우, 그러니까 박문대. 원래 박문대, 그니까, 아이씨……. 큰달. 큰달 알지.”

“알죠.”

“걔가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생겼대.”

“그래요? 축하할 일이네요.”

주어를 듣자 신재현은 안심이 됐다. 설마 그룹에 큰 문제가 생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으니. 그러나 박문대는 아닌 모양이다.

“아직 안 했어!”

축하할 일이라는 신재현의 말에 박문대가 화들짝 놀라더니 목소리를 높인다.

“알겠어요. 진정해요.”

“오늘 같이 저녁을 먹었는데, 만날 때부터 애가 좀 이상하긴 했어. 뭔가 할 말이 있는데 얘기를 못 꺼내고 우물쭈물하는 게 느껴졌거든. 나는 일단 걔가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렸어. 밥 다 먹을 때까지도 입을 못 떼더라고. 밥 먹고, 커피 마시고, 근황 얘기할 때까지도 아무 말 안 하던 애가 나 이만 간다, 하고 일어나니까 그제서야 말 하더라. 엄청 쑥스럽다는 듯이. 형, 저 사실 며칠 전부터 만나는 사람이 생겼는데 정말 잘 맞아요. 결혼하고 싶을 정도로.”

“음, 후배님 그런데 그건 아직 결혼하겠다는 말도 안 꺼낸 거 아닌가요?”

“언젠간 할 거 아니야!”

“뭐… 그럴 수도 있겠죠.”

“모르겠어. 기분이 이상해. 마냥 어린 애 같았는데 언젠간 결혼해서 자기 가정을 가진다고 생각하니까.”

박문대가 추위에 얼어붙은 코를 훌쩍였다.

“후배님은 확실히 이런 일에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한참 걸릴 것 같아요.”

“이런 일은 익숙해지는 게 아니야. 네가 특이한 거라고.”

“그런가. 그런데, 결혼한다고 그쪽이 후배님을 안 보러오는 것도 아니고. 그런 건 잘된 일이죠. 무사히 성장해서 독립했다는 뜻인데.”

“그건 그렇지…….”

모르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저 가슴이 머리와 따로 굴러가는 것일 뿐. 박문대가 고민이 많은 얼굴을 목도리 속에 더욱 푹 집어넣었다.

“시간이 좀 지나면 아쉬움보다는 기쁜 마음이 더 커질 거예요.”

“…맞아. 내가 괜한 걸로 걱정하는 걸지도.”

한숨을 내쉰 박문대가 신재현을 돌아봤다.

“밤에 고생만 시켰네.”

“괜찮다니까요.”

“옷은 또 왜 이렇게 춥게 입고 왔어.”

“후배님이 누가 들어도 빨리 나가야 할 것 같은 목소리로 전화했잖아요.”

피식 웃은 박문대가 얼굴을 파묻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 신재현 목에 감아주기 시작했다.

“가서 따뜻한 개 안고 자라.”

여전히 생각이 많은 얼굴이었다. 그 생각 하나하나가 뭔지 다 눈에 보이는 표정이 재미있었다. 그러면서도 손은 열심히 자신에게 목도리를 둘러주는 것도 웃겼다. 추위 때문에 빨갛게 변한 코와 뺨이 귀여웠다. 목도리에서 박문대의 체취가 묻어났다. 그래서 신재현은,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결혼은 내가 하고 싶네…….”

목도리를 감던 손이 멈칫한다. 말을 내뱉은 장본인도 멈칫한다. 옷 속을 파고들던 겨울바람도 멈칫, 눈 위에서 일렁거리던 가로등 불빛도 멈칫, 이 세상이 멈칫한다.

 

“이 새벽에 어딜 다녀와?”

새벽에 물을 마시러 잠시 주방에 나온 이세진은 현관 불빛 아래 신발을 벗어던지는 박문대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큰일 났어.”

같은 시각, 숙소로 돌아온 신재현도 갑자기 사라진 신재현을 찾기 위해 전화를 걸려던 참인 진채율과 마주쳤다.

“형 놀랐잖아! 말도 없이 어디 갔다 왔어?”

“…큰일 난 것 같아.”

박문대가 이세진에게 말했다.

“오늘 신재현을 만났거든. 큰달이가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길…….”

“뭐? 진짜?”

“아니 들어봐. 이건 나중에 자세히 말해줄 테니까. 아무튼 큰달이 결혼한다고 생각하니까 좀 심란해서 신재현 불러내 가지고 같이 산책 좀 했는데…….”

이번엔 신재현이 진채율에게 말했다.

“내가 청혼한 것 같아.”

“뭐?”

진채율이 휴대폰을 던지듯 떨어뜨렸다.

“산책 중에 후배님이 나한테 목도리를 둘러줬는데 기분이 좋아서 무심코 한 말이야.”

“뭐라고 했는데?”

박문대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결혼은 내가 하고 싶네.”

두 사람이 상대방을 향해 동시에 묻는다.

“이거 청혼 맞지.”

이세진이 먼저 답했다.

“일단 너랑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건 확실한 것 같은데.”

진채율이 물었다.

“형 문대씨랑 결혼하고 싶어?”

“…안 할 거야.”

“안 할 거야가 아니라, 형 마음을 말해봐! 하고 싶기는 해?”

“…….”

이세진이 물었다.

“어떻게 할 거야?”

박문대가 답했다.

“모르겠다. 걔가 먼저 말 꺼낼 때까진 일단 가만히 있으려고.”

진채율이 물었다.

“어떻게 할 거야?”

신재현이 답했다.

“말해야지. 별 뜻 없이 한 말이라고…….”

 

 

1개월 뒤, 20xx년 x+13월 x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들이 바람처럼 지나갔다. 그동안 박문대와 신재현은 연락을 거의 하지 못했다. 마침내 연말 무대가 성공적으로 끝났다. 짬밥 찰 대로 찬 전설의 선배 격인 브이틱과 다르게 테스타는 방송국 이곳저곳에 들리느라 퇴근 시간이 한참 지체되는 중이었다. 다른 관계자에게 인사를 하러 바쁘게 이동하는데 신재현에게서 전화가 왔다. 박문대는 급한 전화라는 핑계를 대고 자리를 빠져나오는 데에 성공했다.

“여보세요.”

“아직 퇴근 안 한 것 같은데 전화할 수 있나요?”

“이거 핑계로 인사 좀 안 하려고.”

휴대전화 너머로 신재현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왜 전화했냐.”

“후배님.”

“어.”

“난 후배님이 나랑 헤어지려는 줄 알았어요.”

“뭐?”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빽 지른 박문대가 비상계단 문을 살짝 열어 근처에 사람이 있는지 살핀 후 다시 문을 닫았다. 그가 목소리를 다시 낮췄다.

“왜, 왜? 나 뭐 잘못했냐?”

“설마요. 굳이 잘못을 가려야 한다면 내 쪽에 있겠죠. 그냥… 후배님한테 미안하네요.”

잠시 침묵하던 신재현이 말했다.

“결혼, 못 하겠다고 했잖아요. 후배님이 못 미더워서.”

“…….”

“전에 내가 한 말 있잖아요.”

“무슨 말.”

“밤에 공원에서 만났을 때, 결혼하고 싶다고 했던 거.”

“…아.”

“그거…….”

말해야 했다. 별 뜻 없이 한 말이라고. 그런데 선뜻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시간이 지체된다. 부자연스러운 침묵이 차오른다.

“…신재현.”

박문대가 입을 열었다.

“음?”

“사실 말 못 한 게 있는데.”

“뭔데요?”

“우리 술 마신 날. 네가 다 얘기했어.”

“무슨 얘기?”

“네 옛날얘기.”

“…아.”

박문대가 불빛이 어둑한 비상구 벽에 기대 들릴 듯 말 듯 웃음을 흘렸다.

“결혼 안 해도 돼.”

“…정말?”

“대신 하나만 약속해.”

“뭔데요.”

“너도 더 이상 이 문제 신경 쓰지 마. 마음 좀 편하게 먹으라고. 난 너랑 행복하려고 결혼하고 싶다는 거였지, 네가 이렇게 신경 쓰고 힘들어하길 바란 건 아니다.”

“…….”

“너 다른 사람 만날 생각 없지.”

“무슨 소리예요. 전혀 없어요.”

“그래. 내가 좋은 거냐?”

“…당연한 걸 묻네.”

“나도다. 그걸로 충분하지 않냐.”

“…….”

“결혼 같은 거 안 해도 이미 충분해. 그러니까 헤어지네 마네 이상한 소리 말고. 가만 보면 너도 상상력이 풍부하다?”

“…….”

“혹시 오늘 그 결혼 발표 한 새X 만나면 얼굴 한 대 쳐. 특별히 이번만 수습하는 거 도와줄게. 결혼 선물 못 주니까 그 대신 해주는 거야.”

“…….”

농담 삼아 한 말이었는데 전화기 너머 신재현은 웃지 않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괜히 머쓱해진 박문대가 급하게 통화를 마무리했다.

“아무튼, 나 이제 진짜 가봐야겠다. 혼자 비상계단에서 꿀 빨려니까 양심 찔리네.”

“…후배님.”

“어?”

“어느 비상계단이에요?”

“여기 A 방송국 C동 6층. 왜?”

“잠시만 기다려요.”

그리고 전화는 뚝 끊어졌다. 황망한 심정으로 통화 종료된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보고 있던 박문대가 다시 신재현에게 전화를 걸려는 순간이었다. 아래층에서 계단을 뛰어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린다. 곧 소리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신… 신재현?”

목소리를 낮춰야 한다는 것을 또다시 망각한 박문대가 소리쳤다. 신재현은 조용히 하라는 듯한 눈빛을 보냈지만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내뱉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너 간 거 아니었어?”

“안 갔어요. 후배님 얼굴 한번 보고 가려고.”

“그, 그러냐. 그러면 천천히 올라오지 뭐 하러…….”

“해요, 결혼.”

“…뭐?”

“결혼하자고요.”

“…너 내가 이때까지 한 얘기 뭐로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제대로 들었어요. 그러니까 하는 이야기예요. 내가 힘들어할 거면 결혼 안 해도 된다고 했었죠? 후배님은 나랑 행복하려고 결혼하고 싶었던 거니까.”

“…그랬지.”

“후배님 얘기 듣다 보니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후배님이랑 결혼하면 그 기분 나쁜 기억보다 훨씬 더 행복한 추억이 생길 것 같다는 생각.”

“…….”

“그래서 결혼하고 싶어졌어요. 후배님이랑.”

숨을 몰아쉬는 신재현을 멍한 얼굴로 쳐다보던 박문대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이거 청혼이냐?”

“그러네. 청혼이네요. 이번엔 진짜 청혼.”

옆 대기실에서 뒤풀이를 하는 모양이었다. 열댓 명이 동시에 있는 힘껏 외치는 ‘메리 크리스마스 앤 해피 뉴이어!’에 온 건물이 울리는 느낌이다.

“반지를 준비 못 했네.”

신재현의 중얼거림에 박문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됐거든. 그런 건 나중에 내가…….”

“대신 이거라도.”

신재현이 고개를 기울여 박문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후 약 1년 3개월 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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