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停滯

“저기, 형? 제 말 듣고 계신 거 맞죠?”

“듣고 있습니다.”

“하나도 안 듣고 계셨네…….”

 

문제는 그런 게 아니라, 날씨다.

 

[오늘 : 강수확률 80% ☃ -1℃/-6℃

내일 : 강수확률 60% ☃ -5℃/-8℃]

 

비행기는 무슨, 버스 하나 못 다닐 것처럼 몰아치는 눈보라와 일기예보, 심지어는 아까 있었던 대화마저 어제와 토씨 하나 다르지 않았다. 그야 여름이고 눈이 내리고 있으니 기온이나 강수확률이 서로 비슷비슷할 수는 있겠지만, 어떻게 이렇게까지 같을 수 있냐는 거지.

 

“형, 정말……. 드디어 알아차리신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이렇게 제 말을 못 믿으세요.”

“반복이요.”

 

일리는 있었다. 어제와 완전히 같은 일들, 침대 위에서 눈을 감자마자 공항으로 직배송 된 것까지, 하루가 반복된 거라면 이해가 된다.

그런데 겨우 하루 가지고 반복이라고 해도 되는 건지. 자고로 회귀는 기본이 열 번 아닌가? 소설 속 주인공들만 봐도, 보통 서너 번은 돌려 본 후에야 자기가 루프에 빠졌니 뭐니 하던데.

어쩌면 애초에 수학여행을 제주로 온 것 자체가 문제일지도 모른다.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라면 한여름에 제주도로 단체 여행을 기획하진 않는 법인데, 대체 누가 이런 결정을 했는지.

 

“그러니까요. 대체 왜 한여름에 눈이 내려요. 여긴 제주도지 삿포로가 아니에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한여름 제주는 눈에 둘러싸이는 게 상식이다. 북쪽이니까. 삿포로는 남쪽이니 여름에 눈이 안 오는 거고. 그러니 차라리 겨울에 오는 게 훨씬 나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무리 제주라도 겨울에는 그나마 해가 드니까.

 

“아, 정말! 형! 생각을 좀 해 봐요.”

 

그리고 제주도에 눈이 안 오면 또 어떻다고? 그냥 안 오는 거지. 박문대는 남자의 말을 무시하며 걸음을 옮겼다.

 

“형! 기다려요!”

 

왜 그를 형이라 부르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누가 봐도 그보다는 나이가 많아 보이는 이 남자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고작 스무 살 먹은 박문대에게 존대를 써가며 장황한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뭐라더라. 그가 이곳에 갇혔다거나, 본인이 박문대이며 그는 그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거나, 그런 것들 말이다. 대체 무슨 소린지. 박문대는 지금 수학여행을 위해 이곳 제주에 와 있고, 저런 남자는 알지도 못한다.

 

“애초에 형이 왜 열여덟엔 가지도 않았던 수학여행을 스무 살에 와 있는지 생각해 보세요!”

 

남자의 말이 점점 멀어진다. 그는 그냥 걸음을 옮겼다. 오늘이 어제와 같은 날인지 뭔지는 모르겠고, 당장 커피가 필요할 것 같거든.

 

*

 

박문대의 8월 19일은 일 년이었다.

이런 식으로 말했다가는 알아들어주는 사람 하나 없겠지만, 실제로 그랬다. 지난 수많은 8월 19일은 떠올리기만 해도 이가 갈릴 지경이다.

 

그간 그는 ‘박문대’에게 해를 끼친 자들에게 앙갚음을 해 보기도 하고, 다짜고짜 시비를 걸어오는 사람들과 아무런 걱정 없이 주먹다짐을 해 보기도 하고, 귀엽다며 다가와 준 사람과 즐거운 하루를 보내보기도 했다. 뭐, 모두 금방 그만뒀지만.

 

이보다 조금 더 길게 해 본 것은 다른 것들보다 자학이었다. 이를테면, 쌓인 눈을 파고 들어가 하루 종일 누워 있었다거나……. 딱 죽기 직전이었지만, 죽지는 않고 어김없이 8월 19일 오전 8시로 되돌아와 있었다.

방법이 잘못되었나 싶었을 땐 이런 저런 사고를 내 보기도 했는데. 아무튼 어떻게 해도 죽지 않으니, 굳이 아픈 일을 할 필요는 없단 결론을 내린 후부터는 그마저도 그만뒀다. 흔히 등장하는, 살아있는 감각을 느끼겠다며 자해하는 일 같은 클리셰를 딱 질색이었다.

 

하루를 계속한다고 해도 24시간을 꽉 채우는 것도 아니고, 겨우 열다섯 시간 남짓뿐이다. 그것도 어디 나갈 수도 없이 한정된 공간 내에 갇힌 채로. 그런 그에게 유일하게 기댈만한 취미가 생겼다면, 아마 노래가 아닐까. 스스로가 노래를 꽤 잘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대학 다닐 때만 해도, 아니지, 나는 지금 수학여행을 왔는데.

 

“후배님, 가만히.”

“내가 개냐?”

“음……. 옳지, 잘한다.”

 

최근 계속 하고 있다고는 해도 무대에 선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시내 어디든 나가 노래를 불렀다. 그러다 마주친 사람에게 악기를 배워보기도 하고, 춤을 배워보기도 하고, 물론 보컬 레슨도 진작 받아봤다.

‘조금만 배워볼래?’ 하며 호의를 보내는 사람 하나를 두어 달 내내 붙잡고 실력을 키워 나가는 건 지루하지만 그만큼 성취감 있는 일이기도 했다. 기억이라는 건 대단해서, 처음에는 아무리 초짜처럼 굴어도 몇 번의 실수 후엔 금세 익숙하다는 듯이 행동할 수 있게 되니까.

 

그러고 보니 이런 걸 두고 루프라고 하던가. 소설처럼 퀘스트 같은 게 있는 것도 아니고, 대체 어떻게 해야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다.

무협 장르 소설에서는 경계가 이상한 지형을 찾아 진법을 해지하면 된다고도 하던데. 그런 걸 찾을 수가 있어야지. 어딜 가도 사방이 눈으로 덮인 상태에서 대체 어떻게 일그러진 지형 같은 걸 찾을 수 있겠냐는 것이다.

 

아, 그리고 하나 더 있다. 그간 박문대가 한 것.

‘그 남자’를 무시하는 거다. 안경을 쓰고, 음침한 얼굴로 울상을 지은 채 그를 따라다니는 이상한 남자. 이런 여름에는 어울리지도 않는 반팔 셔츠를 입고 있어서 더 이상하게 보이는.

정말 수상쩍은 것은, 그가 반팔 셔츠를 입고 그를 따라다니거나, 아주 커다란 소리로 ‘여기에 눈이 왜 오겠냐고요!’ 같은 소리를 해도 아무도 그들에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거였다. 거기다 심지어는 실제로 하는 말과 입 모양의 움직임이 미묘하게 다르기까지. 뭐라고 해야 하나, 더빙을 보는 느낌?

입으로는 ‘그래도 가끔은 이렇게 눈에 덮인 날도 괜찮은 것 같죠?’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에게 들리는 목소리는 ‘다른 말은 믿지 마세요. 여긴 이상해요. 이것만 생각해주세요.’였을 때가 제일 공포였다.

 

또 그는 스스로를 뭐라고 소개했는데, 그는 이상하게 그 이름을 되뇔 때마다 속이 메슥거리는 듯 한 기분이 되고는 하여 그것을 잊기로 결정했다.

잊으려 노력했더니 그 남자가 박문대에게 말을 거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었는데, 그 후에도 애써 무시하려고 하니 그 남자가 이제는 보이지 않게 되었을 뿐더러 가끔 눈에 보여도 굳이 말을 걸지 않으려고 하는 게 보였다. 조금 신경 쓰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뭐, 그래봤자 어차피 또 반복될 텐데.

 

몇 백번쯤 계속되는 루프에서 또 하나 다행인 점은, 요 며칠 간 할 일도 없고 하고 싶은 일도 없이 멍하게 공항 벤치에서 잠을 자며 열다섯 시간씩을 버려대던 박문대에게 드디어 해 보고 싶은 일이 생겼다는 것이다.

역시 지친 상태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일 년 가까이를 맨 정신으로 살아온 게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이 동네는 이상하게 술을 팔지 않아서, 소주를 병째로 말아서 정신을 혼미하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던 탓도 크고.

또 최근에는 늘 같은 관객, 늘 같은 무대에 서서 버스킹하듯 노래하는 것도 지친 참이다. 고작 열다섯 시간으로 건설적이거나 역동적인 활동을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버린 지가 몇 달 째였기도 하고.

 

다만 어제 12시가 되기 전 쯤 생각난 것이다. 버스킹을 하는 거리 맞은편에 있는 카페 하나가.

그 거리는 거친 눈보라가 몰아칠 때에도 그런 것 따윈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눈 밑에 덮인 낙엽이 바스락대는 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눈을 보고 웃는 아이들이 있는 거리기도 했고. 박문대는 눈밭에서 홀로 노래를 하다가 다음날 아침을 맞이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요 몇 주는 그 곳에 터를 잡고 있었다.

아무튼 건너편 그 카페는 동네 주민이 운영하는 꽤 큰 가게였는데, 사실 커피숍을 카페보다 다방으로 많이 부르던 시절에 인테리어가 멈춰 있어 크게 관심이 갈 만한 곳은 아니었다. 다만 사장의 말에 따르면 어제 오늘만은 창가에 앉은 웬 곱상한 남자 덕에 카페를 흘긋대다 들어가 보는 사람이 많긴 했다.

그 남자는 가게에서 데리고 있는 떠돌이 개 한 마리를 쓰다듬으며 노트북을 두들기고 있었다. 코끝에는 안경 하나가 걸려 있었는데 도수가 높은 것은 아닌지 왜곡이 생기진 않았다. 손목을 드러낸 채 타자를 치는 남자의 모습은 시선을 끌지 않을 수 없었기에 박문대도 그를 유심히 관찰한 끝에 말을 걸어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봐요.”

“……네.”

 

망했군.

그가 최근 다른 사람에게 사근사근하게 군 일이 없기는 했다. 그러니까 무슨 서부영화 속 황야의 카우보이처럼 굴었다는 말이었다. 모든 말엔 단답. 어차피 저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할지는 대충 알고 있으니 먼저 말을 걸지는 않고. 스몰톡을 걸어오면 대강 받아주되 말을 길게 잇지는 않는…….

 

남자는 굳은 얼굴의 박문대를 빤히 쳐다보더니 결국엔 개나 쓰다듬기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잠든 노란 개의 엉덩이를 조심조심 쓰다듬는 손길에 개 꼬리가 풍차마냥 뱅뱅 돌아갔다.

아……. 이 X끼 이거, 힘들겠는데.

 

*

 

다음 날 아침, 그는 할 일 없는 사람처럼 아침 일찍부터 노래를 불렀다. 그 남자는? 뭐, 하루 만에 공략하기 힘든 사람이면 그냥 포기하는 게 낫다고 본다. 보름 후에야 다시 올 수 있을 법한 도서관에서 책을 딱 한 권만 빌려갈 수 있다면, 연작은 손대지 않는 것이 당연하니까.

박문대는 그냥 평소 하던 대로 머리를 비워보기로 했다. 플레이리스트는 평소와 비슷했다. 첫 곡은 항상 이 노래, [Party In Me]. 다음은 [POP☆CON], 그 다음은 [새로운 세상으로], [태양처럼 타오르는], [기다림이 좋아], [Challenger], 그리고 사이엔 [바로 나]를 한 번쯤 끼워줄까 싶다.

 

[바로 나]?

그건 무슨 노래지?

 

노래를 부르던 사람이 갑자기 멈춰 서니 구경하던 사람들이 웅성대는 게 느껴졌다. 박문대는 그 곳을 빠져나가서, 건너편 카페 안으로 도망치듯 들어가 차 한 잔을 시켜놓고 책상 위에 엎드렸다.

그는 도대체 무슨 노래를 부르고 있었단 말인가? 늘 그 다음에 불러오던 노래들도 그랬다. [마법소년]이라거나, [Hi-five], [비행기]……. 대체 누가 불렀고, 누구의 곡인지 전혀 모르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걸 따라 불렀다.

대체 왜?

……어떻게?

 

박문대는 떨리는 손을 애써 감춘 채 종업원에게서 찻잔을 받아들었다. ‘괜찮으세요?’ 묻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머리가 아파왔다. 찻물이 손에 엎질러졌는데, 분명 뜨거운 것일 텐데도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는 왜 순서대로 노래를 불러왔던 걸까. 순서와 관련 없는 노래들은 [바로 나]나 [마법은 너] 같은 노래들뿐이었다. 왜일까, 대체 왜,

 

“괜찮아요?”

 

청려다.

아니, 아니다. 저건 그 남자다. 개를 쓰다듬던 남자.

남자는 손수건을 들고 와 박문대의 땀을 닦았다. 박문대는 그것을 뿌리치고 싶었지만, 찻잔 하나 제대로 붙잡지 못하는 손으로는 그럴 수가 없어서, 이 남자가 도대체 누군지 알 수가 없어서, 그럼에도 익숙한 느낌이 들어서, 심장이 뛰어서…….

 

*

 

8월 19일이었다.

박문대는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눈에 갇혀 길 위에서 옴짝달싹 못 할 버스나 택시는 쳐다도 보지 않았다. 늘 그랬던 것처럼 한 시간쯤 눈길을 헤치고 나아가 광장에 도착하자, 시계는 9시 30분. 부지런히 나와 카페 문을 연 사장이 카운터 근처에 어정쩡하게 서서 그를 이상하다는 듯 바라봤다.

 

“총각, 왜 이렇게 땀을 흘려? 물 한잔해요.”

 

고개를 끄덕였다. 숨이 거칠어 제대로 답할 수 없었다. 박문대는 입술을 씹어대며 창가 자리, 남자가 늘 앉던 테이블 바로 뒤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고는 커피 한 모금, 시계 한 번, 커피 한 모금, 시계 한 번, 다시 커피 한 모금. 실은 그 남자가 언제 이 카페에 올지도 모르지만, 그렇게라도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사장의 미묘한 눈초리에도 가만히 앉아 한참을 기다렸을까.

 

딸랑.

종소리가 울렸다. 박문대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 남자였다. 그는 남자에게 다가가 물었다.

 

“당신 정체가 뭐야?”

 

음.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다소 막무가내기는 했다. 남자가 당황스럽다는 듯 반문했다.

 

“네?”

 

“당신 누구냐고 물었어.”

“어머, 총각! 왜 이래?”

 

사장이 호들갑을 떨며 말렸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박문대는 남자를 뚫어져라 쳐다봤는데, 남자는 답 없이 그를 조금 흘겨보더니 벽 뒤에 숨어있던 개를 안아들고 카페 구석, 카운터에서는 보이지 않는 곳으로 향했다. 박문대의 말 보다는 개가 눈치를 보는 것에 더 신경 쓰는 것이 확실했다.

 

다음 날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그는 남자를 찾았고, 전날보다 조금 시간을 두고 관찰하다가, 이름을 물었다. 남자는 박문대에게 답하지 않고, 개를 쓰다듬던 손으로 짐을 모조리 챙겨 뒷문으로 나갔다.

그 다음 날은 조금 더 조심스러웠다. 박문대는 카페에서 하루 종일 죽치며 곁눈질로 남자를 관찰했다. 남자의 자리는 여전히 카운터에서는 보이지 않는 뒷문 근처 구석진 곳이었다.

그리고도 다음 날은 조금 나았다. 박문대는 남자에게 아예 관심이 없는 척 구석 자리에 앉아 날씨밖에는 나오지 않는 휴대폰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남자는 카페 안을 살피다 이전과 같이 볕이 잘 드는 창가 자리에 앉아 개를 쓰다듬었다.

 

덕분에 또 다음 날, 박문대는 생각할 시간을 조금 얻을 수 있었다. 그가 다짜고짜 이 잘생긴 손님을 다그치기 전에, 남자는 박문대의 노래를 들었는지 뭔지, 적어도 조금의 도움을 줄 정도의 호감이 있었다. 뭐, 무관심일지도 모르겠지만.

 

호감이겠지. 내가 아는 신재현이라면.

 

맞다. 그는 박문대를 좋아하…….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더라?

아, 그래. 그런데 그가 남자를 다그치거나 윽박지르거나, 눈치를 주면 그 다음 8월 19일에는 남자는 늘 그를 피했다. 분명 그는 전 날의 일을 기억하지 못할 텐데도. 혹시 이 루프 시스템에 바뀐 점이 있는 걸까?

 

처음부터 다들 조금씩이나마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보다는 나은 상황이기는 하다. 변경점이 있다는 것은, 이 공간에 구멍이 생겼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그런 것 치고는 남자를 제외한 사람들은 누구도 박문대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 남자만 다른 걸까? 그렇지만 딱히 기억하는 것 같은 티는 나지 않았다. 그랬다면 박문대를 한 번 살핀다거나, 그가 질문하기 위해 다가왔을 때 싫은 내색이라도 했을 테니까. 하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이상하다. 그는 그렇다면, 박문대가 누군지 모르는데도 불구하고 그를 피해 다른 자리에 앉는 건가?

 

대체 문제가 뭔데?

박문대는 생각했다. 이런 고민 같은 건 전혀 기껍지 않았다. 별다른 생산성도 없지만 할 게 이것뿐이라 하는 생각 같은 것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기에 금세 이유 비슷한 것을 생각해 낼 수는 있었다.

남자는 박문대에 대한 감정을 기억하는 모양이다. 생각할수록 황당한 말이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 증거도 있다. 루프 초반에 박문대와 쉴 새 없이 갈등을 빚었던 학우들은 요즘에 들어서는 그에게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못마땅함을 행동으로 드러나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그게 박문대와 수많은 8월 19일을 함께하며 시도 때도 없이 싸우고 엿 먹으며 감정이 켜켜이 쌓여댄 탓인 건가, 싶다.

 

*

 

그가 이 시간을 기껍게 생각하든 말든 간에 박문대에게는 이제 루틴이 생겼다. 예전보다 훨씬 지루하지만, 이제는 목표도 목적도 없는 것에 익숙해져서 그저 잔잔하게 우울하기만 한 루틴이었다.

적어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어떻게 해야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몸을 혹사시키던 때보다는 나은 것 같긴 한데……. 문제는 하나였다. 목적 없이 바다를 떠도는 끈 풀린 부표가 된 듯한 느낌이 전혀 좋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 그래도 남자와의 관계에는 진전이 있는 듯하니 다행인가?

 

오전 일찍, 공항에서부터 이곳 거리까지 걸어온다. 점심시간까지는 거리에서 노래를 한다. 그 후엔 카페로 가 따끈한 커피나 차를 한 잔 시켜놓고 남자를 빤히 바라본다. 박문대가 주는 ‘감정’에 가장 예민하게 구는 한 남자를.

그러다보니 이제는 남자가 먼저 말을 걸어오기도 한다. 여전히 손발목이 살짝 드러나는 옷을 입고, 코끝에 걸쳤던 안경은 노트북 자판 위에 벗어둔 채 몸만 돌려서. 그가 하고 싶은 말은 왜 이렇게 자꾸 쳐다보냐는 것이겠지만, 입 밖으로 내는 것은 의례적인 칭찬이다.

 

“노래가 꽤 괜찮던데요.”

 

그러면 박문대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한다.

 

“저한테 관심 있으신 모양입니다.”

“이상한 말을 하네. 관심은 당신이 있죠, 나한테.”

 

그러고서 슬쩍 웃으면, 금방 전까지도 빤히 쳐다보고 있던 박문대로서는 움찔대는 어깨를 참을 수가 없어진다. 여기까지는 늘 있는 일임에도 그렇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다면, 박문대는 조용한 카페 안에서 앞 테이블에 앉은 남자를 꼬셔낼 수 있는 재능 같은 건 없다는 점? 덕분에 결국 두 사람의 대화는 대부분 이런 식으로 끝났다.

 

“내가 마음에 안 드냐?”

“아, 처음에 했던 말 그대로 돌려줄까요?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건 당신이겠죠.”

 

그 말에 쥐죽은 듯 카페를 나가 아침으로 돌아간 적도 있고, ‘뭐?’ 하고 반문한 적도 있다. 물론 후자는 최악의 선택이다. 되묻는 순간 남자의 입 꼬리가 애매하게 올라가고,

 

“당신, 관객이 누구에요? 말해주면 나도 협조하죠.”

 

이런 말이나 듣게 되는 것이다. 박문대도 여기서 더 이상 발끈해서 남의 업장에 피해를 끼치지 않을 정도의 눈치는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후는 늘 오전 8시 행이었다.

 

남자, 신재현은 마치 박문대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굴었다. 아는 사람이 괜히 허세를 부리거나 거짓말을 하는 것을 목격한 사람처럼. 그러니 그를 대할 때 딱히 거짓으로 꾸며낸 말을 한 적이 없다 자부하는 박문대로서는 억울할 지경인 것이다. 여기서 어떻게 더 솔직해지라고? 뭐, 2년째 계속되는 8월 19일 이야기라도 하라는 거야?

……괜찮은 생각일지도 모른다.

 

큰세진도 내가 비밀을 알려주지 않는다며 관계에 대한 생각을 고쳐먹으려고까지 하지 않았나.

 

뭐, 이 신재현은 서로 안 시간도 그렇게 길지 않지만.

‘이 신재현?’ 이상한 생각이었다. 그가 아는 신재현은 눈앞에 있는 신재현 뿐인데, 두 사람쯤 있는 것처럼 생각하다니. 이놈의 루프인지 회귀인지 뭔지가 사람을 어지럽게 한 탓인 모양이다.

아무튼 박문대는 문득 떠오른 생각의 도움을 받아 조금 더 솔직해져보기로 했다. 이 이상 어떻게 더 솔직할 수가 있냐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래, 어쩌면 더 솔직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말해봤자 안 믿을 것 같기도 하고.

 

“난 8월 19일 아침만 2년째 맞고 있어.”

“나는 오늘 아침에 태어나서 25번째 8월 19일 아침을 맞았고요.”

 

거봐, 안 믿을 줄 알았다니까.

기대하지 않았으니 실망할 것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도대체 누가 이런 거짓말 같은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고 들어주겠는가? 박문대 본인이어도 증거가 어디 있냐,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거 아니냐 하며 캐물었을 것이다. 이 시점에서 본인의 오판이 드러날 줄은 모르고.

신재현은 그의 말을 믿었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는 박문대의 말을 이야기한 그대로 믿은 후 조언인지 동정인지 모를 말을 하나씩 던져주고는 했다.

 

“여기서 빠져나갈 수 없어서 뭘 해도 무기력하단 생각이 든다는 말이죠?”

“그렇다니까.”

“음, 나도 비슷한 일 겪은 적 있어요.”

 

거짓말. 박문대는 믿지 않았다. 토라진 어린애마냥 볼을 작게 부풀린 그를 본 신재현이 바람 빠지듯 웃었다.

 

“나도 믿어줬는데, 안 믿어줄 건가?”

“너 같으면 믿겠……. 믿었네.”

“봐요. 나 같은 사람 흔치 않다니까?”

 

반박하기 힘들군. 그렇지만 믿기지 않는 건 사실이었다. 과거의 박문대에게 지금 이 상황을 말해줬어도 못 믿었을 테니까. 이럴 때면 박문대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개를 쓰다듬곤 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개와 함께 붙어있으며 신재현이 추가점수를 준다는 것을 알아낸 덕이다.

덕분에 박문대는 그가 보고 있을 것을 염려해 아침부터 쫓아와 개를 돌보고 있고는 했다. 이 녀석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사장의 ‘어우, 콩이가 총각을 잘 따르네!’ 하는 소리를 거의 매번 들을 정도로.

 

오늘도 그랬다. 개의 따끈한 체온이나 오래된 라디에이터가 탈탈대는 소리, 사장이 주고 간 보드라운 담요, 맞은편에 앉은 신재현의 작은 미소 같은 것에 따끈하게 데워진 박문대가 문득 말을 뱉었다. 눈앞에 앉은 신재현은 개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나눴을 뿐 아직 2년간의 8월 19일에 대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도.

 

“어쩐지 이름이 자꾸 기억나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그래요? 어떤 사람인데?”

“거의 잊긴 했는데…….”

 

실은 왜 이런 말이 튀어나왔는지도 모를 정도로 기억이 안 난다. 슬슬 어떻게 생긴 사람이었는지도 잊은 것 같다. 그럼에도 그 존재만큼은 이렇게나 생생하다는 게 조금 신기한 정도.

 

“마지막으로 봤을 때도 이상한 소릴 했지. 자꾸 날 구하고 싶다고, 어디 구멍을 찾으라든가.”

“이상한 말이긴 하네요.”

“그래. 그런데 그 사람 이름이 생각이 안 난다니까. 분명 말했는데.”

“난 알 것 같은데.”

 

신재현이 웃었다.

 

“류건우잖아요, 후ㅂ―”

 

암전.

 

*

 

8월 19일, 아침 8시.

결항 소식으로 공항이 시끌벅적했다. 그런데도 박문대의 주변은 어쩐지 고요한 느낌이었다. 아직 그의 앞에 앉은 신재현의 숨소리나 그의 다리 위에 올라탄 개의 온기가 느껴지는 듯 하는 게 그랬다.

박문대는 멍하니 앉아 시간을 흘려보냈다. 여름의 짧은 해가 뉘엿뉘엿 지고, ‘류건우’가 그를 찾아오기 전까지.

 

“건우 형.”

“박문대.”

“절 기억해 주셨네요.”

 

큰달이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웃으며 이야기하는 모양새에 심장이 안정을 찾아갔다. 시끌벅적한 공항의 소음이 점점 귀에 들어오기 시작해서, 박문대는 큰달의 옆에 붙어 앉아 귀를 기울였다.

 

“시스템?”

“그런 것 같아요. 아마 꿈의 형태를 빌려서 형의 힘을 빼놓은 다음에, 형한테 ‘소원’이 생기게 하고 싶은 모양이에요.”

 

시스템이라는 건 대체 왜 이렇게나 끈질긴지……. 녀석은 본인이 가장 잘 하는, 시간을 돌리는 것을 응용하여 이런 가상공간을 만들어낸 모양이다. 지난번 ‘현실’에서 발견된 문제점, 현실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서 가상의 퀘스트를 한 번에 해결해 강제로 문을 여는 방법을 막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그게 현실이 떠오르지도 못하게 한여름에 눈보라가 치는 북쪽의 제주도 같은 이상한 세계를 만드는 방식이라는 게 황당하긴 하지만.

아, 어쩐지 아무리 TV나 휴대폰을 뒤져도 온통 날씨 뉴스밖에는 안 나오더라. 진짜 소름끼치는 건 그런 걸 보면서도 이상하다는 걸 느끼지 못했던 그 스스로지만.

 

“형이 잊을 때마다 제가 사라진 건……. 아마 제가 지난번 아현님 같은 경우라서 그런가 봐요. 오류보다는 바이러스에 가까운 것 같기도 하지만요.”

“‘잊을 때마다?’”

“여기서 절 처음 봤을 때가 언젠지 기억해요?”

“날씨 확인하고, 네가 여긴 수학여행이 아니라는 이야길 했었지.”

“제가 어떻게 여기서 형의 설정 값이 수학여행 온 학생이라는 걸 알았겠어요?”

 

큰달이 어깨를 으쓱였다.

맙소사. 그가 잘못을 많이 한 모양이다. 여기서 나가면 당장 밥이라도 한 끼 먹자고 해야 할 것 같다 생각하며, 박문대는 손을 들어 큰달의 머리를 헤집었다. 큰달은 그의 손에 머리를 맡기다가, 곧 말없이 어깨에 기대 힘을 풀었다. 더 이상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는 듯 눈을 감은 채로. 아마 긴장이 풀린 탓일 테다.

 

조용히 생각했다. 그래도 큰달이 처음에 구멍을 찾니 뭐니 말을 했으니, 이 녀석이 찾지 못한 탈출 방법이 어딘가에 있기는 한 모양이다. 그게 뭔지가 중요한 거지만. 이 좁은 세상에서 내가 못 찾았을 리가 없는데. 혹시 이번 경우처럼 내가 잊어버린 건…….

 

“류건우잖아요, 후배님.”

 

아니, 잊은 게 아니다.

눈앞에 두고도 몰랐던 거다.

 

그랬다. 박문대가 알고 있는 신재현은 안경 하나만을 낀 채 카페에 하루 종일 앉아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도 브이틱인데 이런 곳에서 카페 죽돌이가 되면 목격담은 또 얼마나 만들어지겠는가? 그게 다 환경오염이다.

잠든 큰달에게 쪽지를 대충 써준 후, 박문대는 가로등 불빛과 붉은 노을에 의지해 눈밭을 헤쳐 걸었다. 아침보다는 바람이 덜 불었지만, 해가 지고 나니 눈이 얼어붙어 걷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이곳은 시스템이 만든 거짓 세계, 그것도 시공간이 일그러진 세계가 아니던가. 박문대는 이제 그가 실제로 한 시간을 걸어간 적이 없었음을 깨달았으니 오히려 더 쉬웠다. 어느 지점에서 눈을 감았다 뜨면 거리에 도착해 있을 것을 아니까.

 

가로등이 켜지고, 지나다니던 사람도 모두 들어간 늦은 저녁. 카페 앞에는 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노트북이 든 가방을 든 채, 두꺼운 코트의 매무새를 단정하게 다듬고 있는 것을 보니 이제 막 카페에서 나온 모양새였다.

신재현이다.

 

박문대는 그에게 다가가 입술을 부딪쳤다. 밖에서 한참을 있어 차가워진 입술이 따뜻하고 말랑한 것에 닿았다. 두 입술 사이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상대가 웃은 것이다. 그는 박문대의 뒤통수를 쓰다듬듯 부드럽게 잡아들어 입맞춤에 응했다.

차 한 대 다니지 않는 듯 한 거리에 두 사람의 숨소리가 채워지면,

 

박문대는 잠에서 깨어났다. 본인이 공항이 아니라 침대 위에서 깨어났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옆자리를 확인했다. 그의 연인이 잠에서 막 깨어난 듯 작게 하품하는 것이 보였다.

 

“신재현……. 너 맞지?”

“또 무슨 꿈을 꾼 거예요?”

“아니, 진짜 너 맞지?”

“이럴 때 보면 정말 아기 같다니까.”

 

박문대는 연인의 손에 이끌려 다시 누웠다. 신재현이 그의 머리를 가슴팍에 꼬옥 끌어안았다.

 

“너, 지금 왼손으로 나 좀 꼬집어봐.”

“오른손으로 꼬집으면 안 되나.”

“옆구리에서 손 떼고. 그러다 쥐난다.”

 

그가 박문대를 끌어안고 있던 왼손을 풀어 박문대의 볼에 가져다댔다. ‘아플 텐데…….’ 중얼거렸지만 그런 건 상관없다. 중요한 건 지금이 그놈의 8월 19일인지 아닌지 뿐이니까. 박문대는 눈을 감은 채 볼을 꼬집힐 미래를 기다리고 있었다.

 

쪽!

하고, 기대하지 않았던 소리가 침실에 울려 퍼지기 전까지.

 

“너……. 꼬집어보라니까.”

“어떻게 그래요, 후배님이 이렇게 귀엽게 굴 때가 한두 번이어야지.”

 

신재현이 그를 꽈악, 더 깊이 끌어안았다. 얼굴과 맞닿은 가슴팍에서 카페에서 나던 커피 향이 아니라 언제나의 바닐라 향이 나서, 박문대도 함께 눈을 감았다.

©2023 by MDCR THEATER. Proudly created with Wix.com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