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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지대

사랑해. 자음과 모음의 전기 신호로 만들어진 전파가 음성으로 변환되어 귓가에 꽂힌다.

 

사랑을 하고 싶었다.

 

 

 

 

 

 

 

11은 습관적으로 창문의 개폐 여부를 곁눈질하곤 했다. 그것은 그의 오래된 습관이었는데 박문대는 11이 창문을 확인할 필요도 없도록 꼭 필요한 때가 아니면 늘 닫아두었지만 11이 죽는 날까지 그 습관은 고쳐지지 않았다.

 

그날은 흔치 않게 우박이 내렸다. 박문대와 11은 의도치 않게 물리적으로 연결된 사이였으므로 서로의 집에 자주 오가곤 했는데(후술) 길은 땅 아래로 연결된 탓에 박문대는 얼음 덩어리를 가져가서 보여주겠다는 생각을 단념해야만 했다. 한 뼘 이상 보이지 않는 하수도를 걷고 있을 때 천장에서 희미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기 때문에 박문대는 우박이 그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수도를 타고 낡은 수도관으로 만들어진 사다리를 올라서 지하실을 거쳐, 11이 누워 있는 방으로 들어갔을 때 그는 희미하게 예감했다. 11은 창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박문대가 온 것을 확인하자 커튼을 치려고 일어나려는 것을 손짓으로 제지했다. 박문대는 11이 창문을 보고 있었는지 더욱 먼 곳을 보고 있었는지 아직도 모른다.

 

우박이 떨어지고 있어, 11은 아이처럼 천친하게 말했다. 이렇게 제대로 된 우박은 처음 봐. 평소보다도 오른 텐션은 그 속에 비가시적인 불길함을 숨기고 있었다. 박문대는 그 사실을 쉽게 알아챌 수 있었지만 지적하지 않고 그렇다고 맞장구를 쳤다.

 

여건만 된다면 들고 왔을 거다.

 

됐어, 괜히 위험을 무릅쓰고까지 그럴 필요는 없으니까.

 

11은 그리고 오랫동안 침묵했다. 둘 사이에는 불규칙적으로 우박이 지붕을 때리는 소리만이 있었다. 11은 입술을 몇 번 달싹이며 망설이다가 겨우 한 마디를 건넸다. 이대로 무너져 버리면 좋을 텐데. 11은 평소에 비관적이거나 염세적인 사람과는 거리가 멀어 박문대는 종말이 다가왔다고 믿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동반 자살을 하고 싶다는 소망을 입에 낼 만큼 뻔뻔한 사람도 아니어서 아마도 담아 두었던 말을 모두 쏟아내고 있는 중일 터였다. 직감적으로 두 손을 잡았다. 지금도 그 방의 명도 습도 조도를 명확하게 그려낼 수 있다. 박문대는 상황을 회피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자꾸만 옆 책장에 꽂힌 기초 교본에 눈길이 가는 것을 막고 가물어가는 11의 눈동자에 시선을 고정했다. 천천히 떨리는 눈꺼풀과 창백한 안색에 깨처럼 뿌려진 주근깨마저 색을 잃어가는 착각이 들었다.

 

사랑해.

 

박문대는 최초로 발화했다. 11은 웃었다.

 

지하에 있는 길을 내버려 둬 줘.

 

내가 없어지더라도 하지 못했던 일을...

 

미지근한 날숨이 뺨에 닿았다. 그리고 멎었다.

 

모든 것은 시작과 동시에 끝났다. 11이 끝맺지 못한 문장처럼 허무하게.

 

 

 

 

 

 

 

박문대에게는 특별히 준법적으로 살아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박문대가 떠나간 사람으로부터 맡아온 수하물이었다. 매일매일 신호 위반 한 번이라도 걸릴 세라 신경을 곤두세우고 자신의 본질과는 거리가 먼 태도를 취했다.( 문을 두드리는 오지랖 넓은 이웃에게 보기 좋아 보이는 미소로 응대하는 것이라던가.) 세상의 많은 일들은 억압되었고 촘촘한 위법의 모눈종이 경계 사이 여백에 박문대는 아슬아슬하게 서 있었다. 가장 준법적으로 사는 사람은 지명수배자라는 오래된 농담처럼.

 

길에서 사람을 줍는 건 위법일까? 박문대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사람을 물화시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줍는다는 말 이외로는 설명이 안 되는 행위였다. 남자는 담벼락에서 비껴난 골목길에 쓰러져 있었고 행색이 좋지 않았다. 공장에서 막 출하됐을 적엔 고급스러워 보였을 의복이 잔뜩 구겨져 있었다. (그러나 얼굴만은 지독하게 좋았다) 박문대는 집 앞에서 변사체가 발견되는 일만은 막고 싶었기 때문에 그 남자를 어깨에 들쳐매고 집으로 옮겼다. 번쩍 지하에 사는 사람들의 동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지나갔다.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돕는 일은 비인도적이지도 특별히 반체제적인 일도 아니었지만 빽빽함 사각형 주택들 사이에서 행여나 들킬세라 현관문을 잽싸게 닫았다. 과거 통용되던 상식들 중 상당수가 위법의 낙인이 찍혔으니 박문대가 특별히 유난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마치 11과의 관계처럼...

 

그는 익숙하게 11을 떠올리다가, 추억하다가, 슬퍼하가가, 고개를 저었다. 이 모든 과정은 보통 10초 안으로 뇌내 처리가 완료되었다. 소파에 눕혀 두었던 남자가 일어났기 때문에 박문대는 커튼을 치고 남자의 곁으로 다가갔다. 남자가 로봇처럼 눈을 번쩍 떴다. 그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고 박문대에게 빠른 속도로 말했다.

 

내일 이 지하에서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실패할 거에요.

 

f의 편지가 흘러나갔고 hs는 정부의 개에요. 그 결과 믄대 씨의 집은 대대적으로 수색받고 이 집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모두 구속당해요.

 

그는 모든 말을 끝내도 숨을 골랐다. 살아 있는 사람 같지 않게 안색이 창백했다. 자동 인형 같은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섬뜩한 예언들을 박문대는 믿지 않았다. 남자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나는 시간여행자에요.

 

박문대는 자신이 신재현이라고 설명한 남자와 긴 대화를 나누었다. 발화의 끝에서 신재현의 말이 부분적으로 믿을 만하다는 사실을 뽑아냈다. 과거를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다. 그들은 매정할 만큼 고정되어 있으며 박문대는 그 사실을 차고 넘치게 알았다. 그러나 미래는 ... 시도해볼 가치가 있었다. 박문대는 지하 사람들과 한 점의 연결점도 생겨서는 안 되었기 때문에 그는 쪽지에 두 가지 중 한 가지 내용만 작성해서 지하도로 내려보냈다. 24시간 후 모든 일은 실현되었다. 빌어먹을 카산드라여! 박문대는 자신의 손에 들어온 초자연적인 불길함의 화신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신재현은 집도 절도 없었다. 그가 박문대의 마음 약한 부분을 파고들어도 박문대는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신재현의 머릿속에 든 지식이 절대로 가면 안 되는 곳으로 거처를 옮기면 안 되었기 때문에 신재현은 자연스러운 수순처럼 박문대의 집에 눌러앉았다. 염치는 있는지 아침과 저녁은 자기가 하겠다고 나섰다. 박문대는 일을 하는 틈틈이 신재현의 신원을 찾아보았지만 신재현은 정말 차원 어딘가에서 떨어진 사람 같았다. 돌아갔을 때 반겨주는 사람이 있다는 점은 영 나쁘지 않았다. 신재현이 계란을 굽고 밥을 지을 때 지하에는 부지런히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실처럼 열린 커튼 새로 아침 햇살이 새었다. 빛으로 된 금은 오른쪽 눈알을 가로질렀고 박문대는 미간을 찌푸리며 신음했다. 이미 기상한 신재현이 침대맡에 걸터앉아 박문대를 빤히 관찰하고 있었다. 박문대는 자신을 깨우지도 커튼을 걷지도 않은 신재현의 악취미를 규탄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 냄새가 집을 맴돌았다.

 

휴일에 그들은 주로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야외 활동과는 둘 다 호오가 연결되지 않았고 신재현은 가끔 개를 키우고 싶다고 했지만 산책 때문에 단념할 정도로 나가는 것을 꺼려했다. 박문대는 소파 턱에 기대어 바닥에 앉았고, 신재현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라디오를 틀어 놓고 멍을 때리는 일은 일종의 관례였다. 그들은 일정한 거리를 뱅뱅 도는 항성처럼 미묘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박문대가 신재현의 다리에 몸을 기댔다.

 

문대 씨.

 

왜...

 

커피 마실래요?

 

그래...

 

정신이 덜 깨서 말끝이 늘어졌다. 신재현은 히죽히죽 웃으면서 부엌에서 커피를 두 잔 들고 왔다. 박문대에게 한 잔을 건네주고 다시 소파에 앉은 신재현은 마치 커피를 한 잔 더 마실 것이냐고 묻는 듯한 말투로 고백했다.

 

좋아해요.

 

뭐? 박문대는 커피를 뱉었다. 떨어뜨린 유리잔이 영 각도가 좋지 않아 높이가 낮았는데도 산산조각이 났다. 신재현은 고백을 받은 박문대보다도 더 당황한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못할 말을 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는 황급히 취소했다. 아니에요. 잊어줘요. 아무 일도 없었던 걸로 해요. 박문대는 신재현이 싫지 않았다. 그러나 묵혀둔 고백의 때가 왔다는 것을 느꼈다. love가 아닌 tell. 마음속의 심각한 하자.

 

신재현 니가 싫은 건 아니야.

 

오히려 싫다 좋다 중 골라야 한다면 좋다겠지.

 

그런데...

 

내가... 내가 걜 모른다고 했어.

 

맥락과 두서가 실종된 발화도 신재현은 가만히 듣고 있었다. 박문대는 자신의 비겁함을 고백해야 하는 상황이 부끄러웠고 동시에 후련함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 자신이 혐오스러워졌다.

 

초인종을 누르고 11과의 관계를 묻는 경찰에게 박문대는 그가 누구냐고 되물었다. 경찰은 과거 같은 학교에 다녔던 사람이었고 죽은 후 집에서 불온 서적들과 글들이 나왔다고 설명했다. 11은 직계 가족이 없었으므로 유품은 필연적으로 폐기를 위한 과정을 거치게 되었을 것이다. 박문대는 한참을 누구인지 떠올리는 척 비스듬하게 허공을 바라보다가 11번이군요, 라고 대답했다. 교사들은 학생들을 이름보다는 번호로 정렬했고 동급생의 이름을 끝까지 모르는 경우도 있었으므로 경찰을 크게 의심하지 않고 넘어갔다. 심지어는 웃으면서 박문대를 격려하기까지 했다. 가까이 사시는데 물들지 않으셨군요. 왕래 기록이 없어서 저희도 확인차 들르기만 한 것이니 크게 괘념치 마시라고. 박문대는 그 말 사이에 함유된 감시와 기록의 절차를 읽었다. 카메라 렌즈의 시선이 뒤통수를 찌르는 것 같이 선득해졌다.

 

"아무도 몰랐어, 내가 걜 사랑했다는 거"

 

"걔가 날 사랑했다는 거"

 

"내가 모른다고 해서 정말로 아무도 모르는 사람이 됐다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죽어. 그리고 나는 항상 도망쳐"

 

신재현은 고해하는 박문대를 달랠 수 없다. 어떤 외로움은 고유하다. 일견 그리움과도 닮아 보이는 감정은 열쇠의 모양마저도 고유하다. 그것이 그립다와 그것이 없어서 외롭다는 비슷해 보이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박문대가 신재현을 안고 속마움을 토로하고 있지만 신재현을 사랑하는 박문대가 아니기 때문에 신재현의 외로움은 해소되지 않는다. 각자의 마음의 공동은 제각각 존재할 뿐 퍼즐처럼 맞추어지지 않는다. 시네마틱 연출처럼 외로운 사람 둘이 만났을 뿐 거짓말같이 아름다운 사랑이 형성되는 일은 없다. 어딘가에 묵혀 둔 한은 반드시 되돌아온다. 폭발하거나.

 

하지만 과거 이국의 어느 시인은 말했다. 폭발한 것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폭발하지 않은 것을 두려워하세요.

 

박문대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의자에 앉은 신재현의 무릎 위에 올리고 있었다. 마치 고해하는 죄인처럼. 신재현은 상체를 굽혀 박문대를 안았다. 박문대는 잠깐 흠칫했다가, 신재현의 허벅지에 얼굴을 뭍었다. 다리가 축축했다. 가여운 사람... 신재현은 그가 진정할 때까지 조금 기다렸다. 박문대가 고개를 들었을 때 눈 아래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신재현은 고개를 숙여 그 귀에 대고 작게 말했다.

 

나는 알고 있었어요.

 

뭐? 박문대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형형하게 떴다가, 현실을 부정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어. 나는 정말로 알고 있었어요. 네가 어떻게? 내가 모르는 건 없어요. 박문대의 눈동자 속에서 불꽃이 탔다. 신재현은 다시 되뇌었다. 폭발한 것은 두렵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장난치지 마. 아무리 너라도 이건 아니야. 박문대의 두 손이 신재현의 목을 조를 기세로 올라왔다가, 이내 떨어지고, 그가 다시 추상적인 무언가에 모습을 신재현은 본다. 아니요. 분명한 사실이에요. 나는 문대 씨가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어요. 한 마디의 문장은 삼킨다. 그리고 그건 나의 행동 원리가 되었죠. 타인의 존재를 담보삼아서라도 박문대가 오롯이 자신에게 의지하는 모습을 보는 신재현은

 

시간을 멈추고 싶었다.

 

그들은 오래도록 겹쳐져 있었다. 상대방과 자신의 경계가 흐려질 정도로. 그러나 꼭 맞지 않고 어슷하게. 박문대는 일평생 자신이 사랑 고백을 단 한 번 했다는 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신재현이 11을 알고 있다는 사실도 부분적이나마 납득했다.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가, 11에 관한 이야기를 고장난 수도꼭지처럼 줄줄 흘려대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라기보단 압력을 견디지 못한 수문이 터지는 모습과도 같았다. 무지한 사람에게 새로운 지식을 고백하는 것과 이미 알고 있다고 가정한 상대에게 재차 강조하는 일의 난이도는 상이했다. 박문대는 더듬거리며 말하기 시작했다.

 

이 길고 지루한 이야기를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11과 박문대의 집은 이유 모를 지하도로 연결되어 있었다. 11은 부모님을 일찍 여읜 박문대와 같은 처지의 사람이었지만 정반대의 성격을 지녔고 박문대는 자석처럼 11에게 끌렸다. 조용히 살기를 소망했던 박문대와 달리 11은 반체제적인 성향이 강했다. 안타깝게도 박문대의 연정은 억압받아야 하는 종류의 행동이 된 것이다. 까마귀가 울었고, 끝이 났다.

 

옷은 커피 얼룩으로 지저분했고 거실에는 온통 깨진 유리 투성이었다. 박문대가 얼굴을 뭍는 바람에 신재현의 바지도 커피 자국이 났다. 총체적으로 바보 같았으며 동시에 모든 것이 지나간 폐허였다.

 

 

 

 

 

이십 년이 지났다. 박문대는 여전히 같은 직장에 다녔다. 그는 두 번 승진했으며 회사 이름이 한 번 바뀌었을 때도 살아남았다. 그들은 가끔 키스하고 잠을 자고 뒷목에 입술을 대고 웅얼거리기도 했지만 다시는 사랑한다 고백하지 않았다.

 

라디오에서 정부가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신재현이 커피잔을 깨뜨렸다. 그는 좋아한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의 박문대만큼이나 당황했다. 박문대의 집 지하에는 이윽고 아무도 드나들지 않게 되었다.

 

시간여행자는 빨리 늙었다. 외관의 노화 속도는 박문대와 다를 바 없었지만 점점 허약해졌고 누워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신재현이 박문대를 불러서 더듬거리며 말하기 시작했을 때 박문대는 다시 종말을 직감한다.

 

 

 

나는 문대 씨의 얼굴도 모르면서 사랑에 빠질 수 있었어요.

 

사랑한다는 그 말 한마디 때문에

 

벽을 뜯어봐요.

 

그리고 나를 용서하지 마요.

 

시간여행자의 시간이 멈췄다. 박문대는 조용히 울었다. 사랑하는 사람은 죽는다. 말하지 않아도 그랬다.

 

신재현은 가루가 되어 소멸하지 않았다. 박문대는 구청에 사망 사실을 신고했다. 행정 절차의 변경으로 주민 등록이 소실되는 경우가 왕왕 있어서 신재현의 사망 신고는 제대로 들어갔다. 사실 그들이 납득하지 않아도 신재현의 잔해가 엄연히 존재했다. 있는 시체를 없는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 세상은 죽음으로부터 역설적으로 신재현의 삶을 인식했다. 박문대는 그 사실이 우스워서(신재현도 살아 있다면 함께 웃었을 것이다.) 홀로 남은 집에서 웃다가 흐느끼는 것을 반복했다.

 

 

박문대는 주방에서 커다란 식칼을 들고 왔다. 천천히 벽지를 칼날로 그었다. 주택 단지는 곧 구시대의 흉물로써 철거될 예정이었다. 박문대는 마음 놓고 불가역적인 힘에 이끌려 벽지를 난도질했다. 칼끝에 무언가가 걸렸을 때 그는 칼을 내려두고 조심스럽게 벽지를 벗겨내었다. 전선에 이어진 초소형 기기가 빨간 불을 번뜩이고 있었다. 박문대는 전선을 따라가면서 뜯었다. 장장 수십 미터에 달하는 장치가 모든 집에 걸쳐 설치되어 있었다.

 

박문대는 배신감에 울부짖거나, 발을 구르거나, 달려가 신재현의 묘지에 침을 뱉기에는 나이를 많이 먹었다. 대신에 벽에 매달린 장치의 수신기를 생각했다. 모든 정보부는 폐쇄되었고 수신기는 폐기되었을 것이다. 이미 설치된 도청기만이 아무것도 모르고 작동하고 있었다. 네가 잡아챈 전파는 어디로 갈까.

 

박문대의 말. 신재현의 말. 속삭임. 장장 이십 년에 걸친 으침 식사 만드는 소리와 청소기를 돌리는 소리. 식탁에 틀어두었던 레코드 판과 맞춰서 추었던 춤의 스텝.소리. 그러다가 식탁 상판의 두꺼운 유리를 깨뜨려 산산조각이 때의 굉음. 함께 웃었던 웃음소리. 도착할 곳을 잃어버린 수많은 소리들. 전파 신호로 변환되어 허공을 떠돌기만 하는.

 

박문대는 손에 든 도청기에 조용히 속삭인다.

 

사랑해.

 

언젠가 듣게 된다면 다시 만나자.

 

어떤 과정은 목적을 이긴다. 이 긴긴 세월 박문대는 신재현을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되었고... 11을 더 이상 추억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세상에 때론 0아니면 1로 정의할 수 없는 일도 있는 법이다. #000000과 #FFFFFF 사이에 회색조 색상들처럼.

 

차원과 시간을 떠돌다가 우연히 만분지 일도 안 되는 확률로 네가 이 전파를 듣는다면, 그때는 다시 사랑을 하자. 박문대는 눈에 보이는 증거를 부정하고 신재현의 마지막 유언을 거짓말 취급하기로 했다. 매우 파렴치한 짓이지만 신재현이 한 짓에 비하면 아주 작다. 너는 시간여행자다. 박문대가 그렇게 믿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ㅡ 박문대는 신재현의 진실을 영구히 부정하며 동시에 영구히 긍정한다.

 

네 마지막 각오가 부정당한 기분이 어떠냐고 묻고 싶었다. 신재현은 비겁한 사람이었고 박문대도 그에 필적할 만큼 멍청이는 맞았다. 내보일 수 없는 진실을 숨기는 일이 얼마나 피곤한지도 잘 알았다. 체제가 무너진 지 이십여년이 지났을 무렵 죽기 직전에야 말을 꺼낼 수 있었던 신재현의 기분조차도...

 

 

 

 

 

박문대는 습습한 공기가 맴도는 집에서 이삿짐을 쌌다. 대부분의 짐들에는 미련이 없었으나 레코드 플레이어와 지질구레한 몇 가지 가재도구 두 박스 분 정도를 트렁크에 실었다. 곧 이 집은 철거되고 박문대에게는 신축 독신자 아파트가 지급될 것이다. 지하실에서 조심스럽게 고른 언뜻 보면 나뭇결처럼 보이는 문도, 문을 막아둔 낡은 책장도 전부 과거가 된다. 벽 뒤에 있는 신재현의 타임머신도. 새 집은 여러 면에서 지금 사는 집보다는 훨신 낫겠지만, 박문대는 공허한 기분을 숨길 수 없었다. 어떤 집은 거주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그것을 위하여 철거를 반대하거나 이 집에 남겠다고 고집을 부릴 만큼 거창한 것도 아니다. 박문대는 실리주의자에 가까웠으니 곧 부서질 자택을 떠나 넓게 트인 도로를 달렸다. 한 방울 두 방울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그는 신호등의 적신호를 무시하고 끊임없이 가속 페달을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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