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루먼쇼
※자살과 우울증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감상에 주의해주세요.
※글의 형식은 영화 시나리오에서 차용했지만, 가독성을 위해 변형된 부분이 많습니다.
S#1 오프닝
류건우의 첫걸음마부터 성장 과정이 어설픈 홈비디오처럼 지나간다.
N(내레이션): 회사원인 아버지와 학원강사인 어머니. 외고를 거치고 명문대를 나와 번듯한 직장에 다니는 남자. 월급을 모아 독립한 건실한 청년. 노력한 만큼의 결과가 당연하게 돌아오는 삶. 실패해도 다시 일어날 수 있고, 감당할 수 있는 좌절만 있는 곳.
핸드폰으로 찍은 영상이 이어진다. 흔들리는 화면에서도 피사체의 표정은 쉬이 확인할 수 있다. 환하게 웃는 류건우의 얼굴. 그 얼굴이 점점 클로즈업된다.
N: 그러니까,
이윽고 검은 화면에 흰 글씨로 제목이 떠오른다.
Enjoy your
Real Life Show
S#2 아침, 류건우의 오피스텔
침실 천장 구석에서 촬영하는 구도로 침대가 보인다. 머리맡에 둔 핸드폰 알람이 울리자 이불로 덮인 류건우의 몸이 꿈틀거린다.
류건우: (잠긴 목소리로) 으음….
손만 뻗어 폰 화면을 확인하더니 알람을 종료한다. 잠시 후 부스스하게 일어나 부엌으로 향한다.
벽시계에 부착된 카메라 앵글로 부엌이 보인다. 류건우가 식탁에 앉아 시리얼이 담긴 그릇에 우유를 붓는다. 무표정한 얼굴로 먹는 도중 초인종 소리가 들린다.
류건우: (목을 가다듬고는) 누구세요.
택배기사: (목소리만) 택배인데요-
류건우: 앞에 두고 가주세요.
택배기사: (목소리만) 네~
문 앞에 상자를 내려놓는 소리와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린다. 잠잠해지자 문을 열어 택배 상자를 챙겨 들고 식탁으로 향한다. 시리얼 건너편 자리에 올려둔 뒤 상자를 응시하다가 돌연 카메라 반대쪽 허공을 바라본다.
잠시 후 한숨을 내쉬더니 택배를 뜯지 않고 제자리로 돌아와 앉는다. 몇 입 더 떠먹다가 반쯤 남은 시리얼을 싱크대에 둔다.
S#3 이른 오후, 유기견보호센터
산속 넓은 공터에 컨테이너와 철장이 ㄷ 모양으로 늘어서 있다. 평범한 중형차가 입구로 들어와 한 구석에 차를 댄다. 운전석 문이 열리며 류건우가 나온다. 들고 온 가방에서 익숙하게 장갑을 꺼내 들며 컨테이너로 이동한다.
개들이 짖기 시작하자 컨테이너 안에서 센터 직원이 나온다.
센터 직원: (반가운 목소리로) 건우 씨 오셨네요~ 벌써 첫째 주가 됐구나. 시간 참 빨라요, 그쵸?
류건우: (엷게 웃으며) 그러게요.
류건우, 가방을 컨테이너 안에 던져두고는 장갑을 양손에 낀다.
류건우: 청소부터 하면 될까요.
센터 직원: 그 전에 애들 산책 좀 시켜주시겠어요? 마침 다른 봉사자분이- 아.
센터 직원, 불현듯 뭔가 깨달은 듯 주저하더니 목소리를 낮춘다.
센터 직원: 건우 씨, 혹시 연예인에 관심 있어요?
류건우: (한 박자 늦게) 네?
센터 직원: 사실… 우리 센터에 주기적으로 방문하시는 분이 있는데, 유명한 연예인이거든요. 엄청 많이.
류건우: (조금 떨떠름하게) 그런데요?
센터 직원: 프라이버시 문제로 보통 사람 없을 때 오시는데 갑자기 날짜가 미뤄져서… 건우 씨 오는 날인 걸 깜빡 잊고 있었네.
류건우: 아….
센터 직원, 큰 감흥 없어 보이는 류건우를 보며 안심한다.
센터 직원: 그래도 건우 씨는 믿으니까~ 괜찮죠?
류건우: 제가 괜찮고 말고 할 게 있나요. 어차피 봉사하러 오신 건데.
센터 직원, 류건우의 등을 두드리며 웃는다.
센터 직원: 그쵸~? 건우 씨는 시원시원해서 좋다니까.
잠시 후 센터 직원이 입구 쪽을 바라본다. 잘 관리된 고가의 중형차가 매끄럽게 들어와 류건우의 자동차 바로 옆에 주차된다. 앞문이 열리며 키 큰 남성이 나온다.
센터 직원: 마침 오셨네.
면바지 차림의 신재현이 두 사람을 향해 다가온다. 편한 복장임에도 단정해 보인다.
신재현: (미소를 지으며) 안녕하세요. 이분은…
센터 직원, 류건우를 가리키며 소개한다.
센터 직원: 이쪽은 건우 씨. 매달 첫째 주 토요일마다 오시는데 어떻게 딱 겹쳤네요.
신재현, 감정하는 듯한 눈빛으로 류건우를 응시한다.
신재현: (눈웃음을 지으며) 그러게요.
센터 직원: (신재현을 가리키며) 이쪽은 당연히 아시죠?
류건우, 자신을 훑는 시선을 의식하나 신재현을 마주 보진 않는다.
류건우: (무덤덤하게) 네, 알죠.
잠시 대치하듯 두 사람의 옆모습을 비춘다. 이윽고 센터 직원의 발랄한 목소리가 들린다.
센터 직원: 그럼 두 분, 애들 산책 부탁드려요~
S#4 이른 오후, 산책길
허리까지 오는 수풀이 넓게 펼쳐진 가운데 산책길이 길게 나 있다. 류건우와 신재현이 각각 커다란 진도 믹스를 한 마리씩 산책시키고 있다. 류건우가 두어 걸음 앞서 걷는다.
목줄을 잡은 두 사람 모두 말이 없다. 이와 대조적으로 활동적인 개들은 이리저리 냄새를 맡고 다닌다.
신재현: 건우 씨라고 하셨죠.
류건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건조하게 답한다.
류건우: 네. 류건우입니다.
신재현: 좋아요, 류건우 씨.
신재현, 걷는 속도를 유지하며 평이하게 묻는다.
신재현: 연예계에 거부감이 있는 편인가요.
류건우, 걸음을 멈추고 돌아본다.
류건우: (황당하다는 듯) 예?
신재현: 아이돌이 특히 거북한 건가.
류건우: 무슨 소린지….
신재현, 따라 멈춘다. 어이없다는 표정의 류건우를 향해 은은하게 미소 짓는다.
신재현: 봐요. 이제야 내 눈을 보네.
류건우, 신재현을 노려보다 다시 앞을 보고 걸음을 옮긴다.
류건우: 아이돌은 허상이잖습니까. 만들어진 이미지에 작위적인 삶. 가짜죠.
신재현, 성큼성큼 따라와 류건우와 나란히 걷는다.
신재현: (살짝 웃음기 있는 목소리로) 가짜는 싫다?
류건우: 예.
류건우, 신재현이 산책시키는 개를 고갯짓한다.
류건우: 당장 이러는 것도 이미지 때문이겠죠. 개를 좋아하는 건 맞습니까?
신재현: (류건우를 똑바로 마주 보며) 네, 좋아해요. …기다리는 아이도 있고.
그 순간 [동료 선택권]이라는 단어가 글리치를 튀기며 화면에 스쳐 지나간다. 그러나 류건우는 눈살을 찌푸릴 뿐 크게 반응하지 않는다. 신재현은 이러한 돌발상황을 모르는 듯 평온하다.
류건우: 기다리는 아이라면,
신재현, 목줄 끝의 개를 바라보지만, 다른 곳을 보는 듯 초점이 맞지 않는다.
신재현: 꼭 함께하고 싶은 아이예요. (씩 웃으며) 건우 씨도 분명 좋아할 거예요.
류건우, 불만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려고 하지만 이내 다문다.
다시 침묵. 부산스럽게 냄새를 맡고 걷기를 반복하는 강아지가 화면에 잡힌다.
류건우: 저도 좋아합니다, 개.
신재현: 그런 거 같네요. 이런 날에도 빼먹지 않을 정도면.
류건우: …‘이런 날’이요.
신재현,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류건우의 눈을 바라본다.
신재현: 네, 이런 날.
두 사람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고, 류건우가 말을 꺼내려는 순간 류건우가 산책시키던 개가 수풀에서 불쑥 튀어나온다. 온몸이 흙투성이고 입에는 무언가 물고 있다.
신재현: 이런, 저희가 얘기하는 동안 재밌는 시간을 보냈나 보네요.
신재현, 개를 잘 달래 물고 있는 걸 뺏어 든다. 자세히 보면 소형카메라임을 알 수 있다. 바로 외투 주머니에 넣는다.
류건우, 의구심이 드는 눈빛으로 바라보지만 이내 한숨을 쉬며 개의 흙을 털어준다.
신재현: 돌아갈까요. 다른 애들도 산책시켜야 하고.
류건우: …예, 그러죠.
S#5 저녁, 유기견보호센터
노을이 지는 저녁, 류건우와 신재현이 센터 안에서 장갑을 벗고 있다.
센터 직원: 두 분 다 너무 고생 많으셨어요! 괜찮으시면 식사라도 하고 가실래요?
신재현: (미소 지으며) 그러고 싶지만 이후에 일정이 있어서요.
센터 직원: 어머! 역시 바쁘시구나. 건우 씨는요?
류건우, 잠시 주저하다 답한다.
류건우: 음…. 저도 할 일이 있네요.
센터 직원: 아이구, 고생하셨는데 밥 한 끼 대접 못 해드려서 어떡해요~ 다음에 함께 해요!
류건우: …네, 감사합니다.
신재현, 묘하게 가라앉은 류건우의 얼굴을 확인하고 센터 직원에게 인사한다.
드론 카메라의 시점으로 센터를 크게 잡는다. 두 사람이 각각 자신의 차에 올라타지만, 신재현의 차는 시동이 걸리다 말고 꺼진다. 이내 신재현이 밖으로 나와 류건우의 운전석 차창을 두드린다.
이후 류건우의 차 안 카메라가 둘을 번갈아 비춘다.
류건우: (차창을 내리며) 무슨 일이죠.
신재현: 제 차 시동이 안 걸리네요. 사람은 불렀는데 당장 일정이 코 앞이라. 혹시 시간 되시면 차 좀 얻어타도 될까요?
류건우: 어느 방향인데요.
신재현: 00동이요.
류건우, 눈을 가늘게 뜨며 대답을 유보한다. 신재현은 여전히 그린 듯한 웃는 낯이다.
류건우: …타세요. 저도 그쪽으로 가니까.
신재현: (입꼬리를 올리며) 감사합니다.
S#6 저녁, 류건우의 차 안
류건우, 운전석 앞 거울(룸미러)로 신재현을 힐끔 훔쳐본다. 조수석에 앉은 신재현은 평온하게 창밖을 바라본다.
신재현: (고개를 돌리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 같은데.
류건우, 순간 핸들을 쥔 손이 움찔거리지만 태연한 척 답한다.
류건우: 제가요.
신재현, 룸미러를 통해 류건우와 눈을 마주 본다. 신재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류건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류건우: …일정이 빠듯한 사람이라기엔 느긋해 보여서요.
신재현: (피식 웃으며) 급하다고 하면 속도 내주시나요.
류건우: …경우에 따라 다릅니다.
신재현, 그 말에 웃음을 터뜨린다.
신재현: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게까지 급한 일은 아니라.
신재현, 말을 마치곤 핸드폰을 확인하더니 자판을 두드린다. 류건우는 묵묵히 운전한다.
어느새 00동에 진입하고, 00동이라 쓰인 표지판을 비춘다.
여전히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는 신재현에게 묻는다.
류건우: 어디서 내려드리면 될까요.
신재현: (핸드폰 화면을 끄며) 음….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네요. 일정이 방금 취소돼서.
류건우: 이렇게 갑자기요?
신재현: 이왕 이렇게 된 거, 건우 씨한테 저녁 얻어먹으면 안 되나. 고생했는데 밥 한 끼 정도는 대접받을 수 있잖아요.
류건우, 센터 직원의 말을 인용한 제안에 오히려 경계를 표한다.
류건우: …저도 할 일이 있어서요.
신재현, 표정이 굳으며 검지로 제 무릎을 두드린다.
신재현: (딱딱하게) 무슨 할 일.
그 모습을 내려다본 류건우가 퉁명스럽게 말한다.
류건우: 그쪽이 상관할 바는 아니죠.
신재현, 천천히 상체를 류건우 쪽으로 숙인다.
신재현: (단호하게) 아뇨, 상관있어요.
긴장감 있는 배경음악이 시작된다. 표정이 사라진 신재현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신재현: 덕분에 내가 손해를 좀 봐서.
류건우, 애써 침착하려 한다.
류건우: …손해라니. 오히려 도와준 쪽 아닌가.
신재현, 다시 상체를 물려 카시트에 기댄다. 고저 없는 목소리로 별일 아니라는 듯 말한다.
신재현: 쇼가 끝날 위기야. 너 때문에.
핸들을 꽉 잡는 류건우의 손이 클로즈업된다.
류건우: …알아듣게 설명해.
신재현: 눈높이에 맞춰 설명해드리죠. 당신은 이 쇼의 주인공이에요. 메인캐릭터지. 난 쇼의 기획자고. 그런데 당신은 스스로 쇼를 끝내려 해요.
류건우: 자꾸 헛소리를-
배경음악이 고조된다. 산책로에서 언뜻 본 소형카메라가 스쳐 지나간다.
초점이 흐려진 신재현의 눈이 류건우를 향한다.
신재현: 더 쉽게 말해줄까? 네 삶은 처음부터 온 세상에 중계되어왔어. 네 첫걸음마를 보고 감동한 사람이 수도 없이 많지. 최고의 오락프로그램이자 휴먼드라마로 인기를 끌었어. 그렇게 모은 정신 에너지가 나를 더 강하게 만들고, 너는-
류건우: 너 미쳤어?
순간 배경음악이 뚝 끊기고, 부자연스러운 정적이 흐른다.
신재현: (차분하게) 아니, 미친 건 너지.
류건우: (한 박자 늦게) …무슨 개소리야.
신재현: 이상한 게 보이잖아. 어떨 땐 홀로그램 같은 게, 어떨 땐 겪은 적 없는 기억이.
류건우, 핸들을 잡은 손이 미세하게 떨린다.
류건우: 너… 정체가 뭐야.
신재현, 여유롭게 미소를 짓는다.
신재현: 이제 집에 초대할 마음이 들었어요?
S#7 늦은 저녁, 류건우의 오피스텔
벽시계에 부착된 카메라 앵글로 부엌이 보인다. 아침과 똑같은 풍경. 다만 시리얼을 먹은 그릇만 설거지 되어 있다.
현관이 열리며 두 사람이 들어온다. 신재현은 제집처럼 자연스럽게 들어가 식탁에 앉는다. 류건우는 앉지 않고 맞은 편에 서 있다.
류건우: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제 말해.
신재현: (오피스텔 안을 둘러보며) 깔끔하네요. 사람 사는 게 맞나 싶게.
류건우: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신재현, 느긋하게 다리를 꼬고 무릎에 깍지 낀 손을 얹는다.
신재현: 류건우 씨. 왜 삶에 만족하지 않죠? 부족한 건 없을 텐데.
류건우: 말 돌리지 말고-
신재현: 음. 역시 무의식 기저에 깔린 욕망 때문인가….
류건우, 식탁을 주먹으로 내리친다.
류건우: 똑바로 대답해!
신재현: (빙긋 웃으며) 어쩐지 아이돌에 과민 반응하더라니. 신 포도구나.
류건우, 뭐라 대꾸하려는 순간 기억이 스쳐 지나간다. 무대 위에서 보는 수많은 불빛의 향연. 꼭 은하수가 일렁이는 듯한 풍경.
신재현: 미안하지만, 지금의 브이틱은 완벽해요. 레티에 더 이상 남자그룹은 나오지 않을 거고. 옛 멤버를 돌려줄 수도 없어. 위험 요소니까.
무대 위 장신의 남성들이 보였다가 사라진다. 번쩍이는 조명 탓에 제대로 보이진 않는다.
신재현: 그래도 불만 사항을 말해봐. 최대한 수용할 테니까. 다음엔 더 마음에 들 거야.
류건우, 혼란스러워 식탁에 손을 짚는다. 아침에 받은 택배 상자가 건드려진다.
신재현: 그러니까,
택배 상자의 운송장이 클로즈업된다. 품목은 ‘안전 로프’.
신재현: 네 멋대로 끝낼 생각하지 마.
류건우의 눈이 클로즈업된다. 크게 뜬, 흔들리는 눈동자.
노이즈 소리가 길게 이어지며 이전의 기억이 단편적으로 빠르게 지나간다.
공시를 포기하고, 적당한 중견 기업에 들어가 스스로 소모하며 보낸 날들. 스티어의 해체. 내몰려진 끝.
류건우: (떨리는 목소리로) 너….
위시즈로 대상을 받고 은퇴를 선언하던 순간. 수많은 각성. 시스템의 손에 부서진 골드 채팅창. 에러가 된 큰달.
류건우: 실패했구나, 우리.
신재현, 씁쓸하게 웃는다.
신재현: 네. 플랜 B까지 수포가 되었어요.
류건우: …그런데 왜 아직 내가 캐릭터인 거지? 분명 서버로 만든다고 했는데.
신재현, 눈을 내리깔며 답한다.
신재현: 시스템에게 새로운 제안을 했거든요. 내가 협조하는 대신, 류건우를 캐릭터로 쓰라고. 거추장스러운 기억도 지우고, 성가신 동료들도 치워두고.
류건우, 식탁에 올려둔 손을 꽉 말아쥔다. 신재현은 고개를 들며 말을 잇는다.
신재현: 아이돌이 아니어도 시기와 증오, 사랑과 열망을 받을 방법이 있으니까.
류건우: (낮게 중얼거리며) …쇼?
신재현: 그래. 전에 본 영화에서 착안했지. 주인공의 삶을 TV쇼로 전 세계로 송출하는 거야. 모두가 그를 알도록. 그렇게 무대 없이 스타가 되지. 탄생부터 죽음까지 영원한 별!
일순 황홀한 표정이 신재현의 얼굴에 떠오른다. 이와 대조되게 류건우의 표정이 딱딱해진다.
류건우: …너 신재현 맞아?
신재현: (고개를 기울이며) 맞긴 한데…. 아닐 때도 있어.
신재현, 외형은 그대로지만 다른 사람이 된 듯 표정이 사라진다.
신재현: (무기질적인 톤으로) 너희의 발악에 두 번 당하지 않으려면 안전장치가 필요하니까.
류건우, 제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쉰다.
류건우: 그래서 신재현이 평소보다 더 정신 나간 소리를 한 거군.
신재현: (다시 미소가 떠오르며) 하하. 너무하네.
류건우, 이마를 짚던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다.
류건우: 딴 놈들은, 멀쩡한 거냐.
신재현: 네. 적당한 곳에 뒀어요. 없애버리면 건우 씨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류건우: 그래….
그 말과 함께 신재현 맞은편에 털썩 앉는다. 한동안 말이 없다가 입을 연다. 두 사람 다 시선을 내려 식탁을 보고 있다.
류건우: 네가 기다린다는 녀석, 콩이지.
신재현: …네.
류건우: 태어나면 동료 선택권으로 영입한 다음 각성시킬 생각일 테고.
신재현: 그렇죠.
류건우, 시선을 올려 신재현을 바라본다.
류건우: 그렇게 만들어진 개가 현실에서 기다릴 네 개와 같을 거로 생각하냐.
신재현: (힘없이 웃으며) 철학적인 논제네요.
류건우, 여전히 아래를 향한 신재현의 눈동자를 노려본다.
류건우: 현실에 있을 팬들은. 네 멤버들은. 내팽개쳐도 되는 거냐? 네가 실패 후에 새로 쌓은 경험, 그게 진짜 네-
신재현, 말을 끊고 서늘하게 눈을 마주한다.
신재현: 아뇨. 여기가 진짜 삶이에요.
류건우: …시스템 놈한테 완전히 먹혔군.
신재현: 제 의지고 제 의견이에요.
류건우: (점점 격해지며) 개소리 마. 넌 그 새끼 논리에 잠식된 거라고!
신재현,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본다. 해가 져 어두워졌다.
신재현: (체념한 듯) 그럼 뭐 어때요.
류건우, 신재현의 옆모습을 멍하니 응시한다.
신재현: 저는 주어진 과업을 할 뿐이에요. 여태까지 그래왔듯이.
침묵만이 내려앉은 오피스텔 안. 감성적인 배경음악이 시작된다. 양손으로 제 얼굴을 감싼 류건우의 모습과 창밖의 풍경을 차례로 비춘다.
신재현을 각성시킨 뒤 그가 보인 반응이 흐릿하게 지나간다.
‘왜 나는 현실로 돌아가고 싶을까.’
이윽고 류건우가 이를 빠드득 간다.
류건우: 아니. 넌 네가 하고 싶은 걸 해.
류건우, 양손을 치우면 비틀린 미소를 짓고 있다.
류건우: 난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테니까.
배경음악이 긴박하게 전개된다. 류건우가 절박하게 소리친다.
류건우: 상태창!
신재현: 무슨…!
허공에서 글리치가 튀더니 그것들이 모여 네모난 홀로그램을 구성한다. 마침내 떠오르는 글자는,
[형!]
류건우, 상태창을 조작해 신재현의 손 앞에 가져간다. 신재현은 그대로 굳어 섣불리 움직이지 못한다.
류건우: 잡아, 신재현.
공간 자체를 울리듯 목소리가 격노한다.
시스템: 너, 괜한 잔재주를…!
신재현의 몸이 발끝에서부터 하얗게 탈색된다. 류건우는 오히려 단단한 목소리로 말한다.
류건우: 돌아가자, 개자식아.
팔까지 도달한 백색이 손바닥에 닿기 직전, 배경음악이 클라이맥스에 도달하고-
신재현이 상태창을 움켜쥔다.
신재현: 그래요.
그대로 상태창이 흡수되며 탈색되었던 부분이 거꾸로 글리치로 변한다. 스파크처럼 튀는 글리치가 주변까지 번져나간다.
휘청거리던 신재현이 다시 제 모습을 되찾는다. 자세를 가다듬고 상태창을 하나 띄운다.
[플레이어 : 박문대 (류건우)]
“성공했네요.”
[형! 무사하신 거죠? 몸은 괜찮으세요? 부작용 같은 건…]
류건우는 쏟아지는 큰달의 걱정 세례를 끊었다.
“안부는 이따 묻고. 다른 놈들은 어딨냐.”
[테스타 분들이랑 브이틱 분들은 심상 세계로 모셔 왔어요! 아, 맞다. 일단 처리부터!]
큰달이 류건우의 앞에 상태창을 보냈다. 시스템의 자폭 시퀀스.
간단한 절차를 밟은 뒤, 신재현에게 눈짓하자 제 심장 부근을 틀어잡았다. 그대로 힘주어 뜯어내자 똑같은 외형의 새하얀 청려가 분리됐다. 시스템의 마지막 발악이 이어졌다.
[너희, 어리석은 짓 그만둬. 고작 감정 따위에 휘둘려서…]
류건우는 더 듣지 않고 게임 삭제 버튼을 눌렀다. 시스템의 말이 끊기고 인간형이 터진다. 주변 세계도 따라 터져 나간다.
어느새 오피스텔과 주변 풍경은 온데간데없고 푸른 하늘만 남는다. 방금까지는 밤이었는데 말이다.
그 가운데 문 하나가 생겨난다. ‘출구’라고 적힌 작은 문이.
[심상 세계로 연결되는 문이에요! 충격을 최소화하려고 만들었는데….]
큰달은 류건우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음… 두 분은 다른 멤버분들과는 다른 경험을 공유했을 거 같아서요. 마음 준비 좀 하시라고.]
큰달은 머쓱하게 웃고는 먼저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 너머는 어디로 통하는지 알 수 없는 새까만 공간. 넘어가면 현실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류건우가 슬쩍 옆을 보자 가만히 서 있는 신재현이 보였다.
‘시스템의 영향력에서 막 벗어나서 혼란스러운가.’
류건우는 제 뒷머리를 벅벅 긁더니, 가볍게 신재현의 등을 쳤다.
“뭘 멍하니 있어. 가자.”
신재현은 예상 밖의 행동이었는지 조금 놀란 표정으로 돌아봤다. 하지만 이내 눈웃음지었다.
“네. 돌아가요.”
류건우가 앞장서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한 걸음 내디딘 신재현이 문득 카메라가 있었을 허공을 바라본다.
바라보고 씩 웃는다.
“안녕.”
그리고 어둠 속으로 퇴장한다.
실패 위에 쌓은 진짜 삶을 되찾으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