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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셉션

철컥.

 

묵직한 무게감이 손안에 들어찼다. 차가운 금속끼리 마찰하며 일궈내는 소음이 귓가를 간질였다. 흉흉하기 짝이 없는 소품이니 경각심이 들어야 할 텐데 그냥 익숙하게만 느껴지는 상황이 이제는 조금 유쾌했다.

 

위험천만한 흉기를 거머쥔 손이 춤을 추듯 우아하게 움직여 머리를 노렸다. 신재현의 집념이 구현한 18구경 소총은 크기와 별개로 사람 하나를 골로 보내기엔 충분한 위력이 검증된 물건이었다.

 

더군다나 겨눈 상대가 타인도 아니고 무저항일 게 분명한 자신이라면야.

 

 

"신, 재현."

 

"문대 씨."

 

"...침착해라, 너. 일단 그거 내려놔."

 

"꿈이 우리에게 남길 수 있는 게 뭐라고 생각해요?"

 

 

나긋한 질문과 함께 천천히 굴려본 눈동자 위로 초조함에 틀어쥔 손이 선명하게 새겨졌다. 핏대 선 주먹, 하얗게 질린 얼굴, 흔들림을 숨기지 못하고 동요하고 있는 갈색 눈동자.

 

그래, 여전히 대지를 닮은 그 눈이었다.

 

이제부터 흉한 꼴을 보여야 한다는 사실에 미약한 미안함을 느껴 애매하게 미소지은 신재현의 고개가 살짝 옆으로 기울었다. 습관성 동작 덕분에 꿈자리 사나운 물건에서 급소가 조금이나마 멀어진 그것만으로도 안도감을 내보인 박문대가 낮은 날숨을 내뱉었다. 본래 이렇게 작은 동작에 일희일비하는 성격이 아니었을 텐데, 상황이 상황이라 그런 것인지.

 

혹은 늘 타인에게만 향했던 세심함으로 드디어 신재현까지 품기로 마음먹었던가.

 

 

"꿈은 보통은 잊히기 마련이니 '남긴다'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개소리 작작… 아니, 그래. 알겠다. 알겠으니까 차분하게 얘기 해보자고."

 

"잊히지 않고 남는다면."

 

대화라고 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는 흐름에 구깃구깃 균열을 숨기지 못한 서슬 퍼런 시선이 맑게 갠 하늘을 닮은 눈길과 마주쳤다.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한 푸른 눈동자에 서린 빛이 유쾌함을 숨기지 못하고 반짝였다. 명백하게 화가 나 있는 박문대의 모습이 더없이 유쾌했다. 좀처럼 질문에 집중하지 못하는 발칙함? 애초에 답하라고 던진 질문이 아니었으니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번의 너는 어떤 결론을 내릴까.

 

 

"너. 뭐 하자는 건데."

 

"꿈은, 경험을 남길 수 있어요."

 

 

아주 선명하게.

 

까득, 작게 이를 갈면서 내뱉은 으름장이 형편없이 바닥에 나뒹굴어도 아무런 항변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애꿎은 손바닥만 피를 봤다. 길지도 않은 손톱에 손바닥이 찢기는 경험을 이런 식으로 하게 될 거라고 누가 알았겠냐만.

 

형언할 수 없는 답답함에 하, 한숨을 내뱉은 건 그야말로 찰나에 불과했다.

 

자각조차 없던 한숨을 내뱉음과 동시에 철렁 심장이 내려앉았다. 주의를 흩트린 순간을 놓치지 않은 신재현이, 기어이 방아쇠를 당기는 모습이 슬로우모션처럼 선명하게 박혀왔다. 눈으로 보는 건데도 심장을 찢어내며 새겨지는 것 같은 장면에 인내심이 끊겨나간 건 당연한 일이었다.

 

 

"ㅡ이런 X발! 신재현! 야! 이 개자식아!"

 

"잊지 마요, 후배님."

 

 

꿈이 남기는 흔적도 결국 제대로 인지할 수만 있다면 그 모든 게 경험이고 기억이 된다는 걸.

 

끼릭, 작은 소음이 고막을 후벼팠다. 눈을 부릅뜬 박문대가 험악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달려드는 모습에 선명한 기시감이 느껴져서……

 

청려가 웃었다.

 

 

 

 

 

 

 

 

 

 

 

 

 

 

 

 

 

 

 

 

INCEPTION

 

 

 

 

 

 

 

 

 

 

 

 

 

 

 

 

 

 

 

"ㅡ!"

 

움찔, 경련과 닮은 움직임으로 뜨인 눈이 가늘게 떨렸다. '죽는' 경험은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쳐도 깨어날 때의 생리적인 반응까지 컨트롤 할 수 있는 건 인간이 조절하기엔 어려운 영역이니 당연했다.

 

익숙한 천장, 익숙한 향기, 그리고….

 

 

"형? 일어났어?"

 

"...채율."

 

 

익숙한 사람.

 

차분하게 신재현의 현실에 존재하는 그것들을 상기하던 청려가 손끝에 걸리는 물건을 가볍게 쥐었다 놓았다. 기억하고 있는 감촉이 생생히 와 닿는… 이곳이 '현실'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해주는 유일한 장치.

 

한때 손에서 빠졌던 반지가 다시 끼워진 것도 모자라 토템이 되리라곤 한 번도 생각한 적 없는데 말이지.

 

 

"후배님은?"

 

"아! 그…. 우음… 그게 있지……."

 

 

아.

 

실패구나.

 

온몸으로 난감함을 표현하는 채율의 반응은 그 자체로 훌륭하게 답변의 기능을 해냈으니 더 이상 추가적인 질문은 없었다. 하긴, 한번 심어진 생각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있다면 인셉션이라며 거창하게 표현할 필요도 없었겠지.

 

잠기를 몰아내며 가볍게 관자놀이를 눌러두던 손을 떼며 상체를 일으키자 삐걱삐걱 끼이익 스프링이 혹사당하는 소리가 났다. 침대도 아니고 의자를 눕혀둔 상태였으니 별수 없긴 했다.

 

솔직히 킥으로 빠져나오기보다 꿈속의 마지막으로 빠져나오는 경우가 많으니 굳이 의자를 고집할 필요가 있나 싶긴 했지만… 위 단계의 꿈을 모두 생략하고 림보까지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도록 약물을 조절할 수 있는 인도자는 전 세계를 통틀어 진채율 하나였고, 곤란한 부탁에 고심하던 채율이 제안해온 안전장치가 그거였으니 딱히 불만을 가질 사항은 아니었다.

 

VTIC 전격 은퇴 후 채율이 본인의 인지도와 이미지를 살려 선택한 길은 꿈 인도자였다.

 

오로지 티카들의 편안한 잠자리와 무대를 넘은 무대를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선택한 길인 데다 꿈속에서는 스스로가 아닌 상대에게도 '즐기는' 특성을 적용할 수 있게 된 진채율은 본인이 희망한 진로에 빠르게 적응한 상태였고, 덕분에 적절한 타이밍에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특유의 심지 굳은 긍정적 사고방식을 기반으로 '청려'가 가망 없는 일에 왜 매달리는지 의구심을 갖는 수많은 군중에 포함되지 않는 유일한 아군이기도 했으니 협력할 수 있는 부분에는 얌전히 응하는 게 맞지 않겠는가.

 

 

"다음은 언제 가능하지?"

 

"아~ 바로 가능하지만… 형, 조금 쉬는 게 낫지 않을까?"

 

"현실과 림보의 시차는 무시할 수 없으니까."

 

"우웅……."

 

 

그건… 그렇지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율이 힐끔 옆을 돌아봤다가 '다음' 다이빙을 준비하기 위해 바쁘게 약물을 조정하기 시작했다.

 

채율을 따라 눈동자를 굴리자 얌전히 잠든 '박문대'가 보였다.

 

자력으로 깨어나지 않겠다는 의지를 반증하듯 불편한 의자가 아니라 푹신한 침대에 손까지 모으고 잠들어 있는 '후배님'.

 

 

'......'

 

 

림보가 아니라 현실을 활보하며 '테스타 박문대'의 이름을 공고히 하던 시절을 떠올린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시스템에 손대는 걸 그냥 두지 말 걸 그랬지.

 

인간의 의지로 인간을 휘두르는 인외를 없애겠다는 발상 자체는 훌륭했다. 실제로 박문대-류건우는 시스템이 따라오지 못하는 발상을 몇 번이고 반복해가며 시스템을 아슬아슬한 순간까지 몰아넣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것마저 시스템의 계산에 들어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시스템을 없애기 위해 계속해서 박문대가 시스템을 헤집는 사이, 시스템도 박문대를 면밀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도 나를 들여다본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경우 아닌가.

 

 

"형~ 준비 끝났어!"

 

 

지난한 수 싸움에서 이긴 건 시스템이었다.

 

 

"응."

 

 

몸이 굳지 않도록 박문대의 자세를 적당히 바꿔준 청려가 다시 의자로 향했다. 나름대로 좋은 의자를 고르긴 했어도 뒤로 한껏 기대자 끼이익 위태로운 소리를 내는 의자 위에서 눈을 감자 팔뚝을 타고 들어오는 약물이 익숙한 풍경을 불러오기 시작했다.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장, 몰려오는 흰 파도에 무너지는 모래성, 콜라주처럼 모여있는 각양각색의 무대, 그리고……

 

한때 박문대와 신재현이 같이 살았던 세이프 하우스.

 

다시, '불청객'이 찾아갈 시간이 왔다.

 

 

 

* * *

 

 

 

"신재현. 밥 먹어라."

 

"……음…."

 

 

 

이것 봐라?

 

말소리에 귀를 움찔하더니 부스럭 돌아눕는 발칙한 반응에 허, 눈썹을 쓱 추켜세운 박문대가 슬그머니 아직 연인이 정신을 차리지 못한 침대로 기어 올라갔다. 제정신이라면 국자 들고 어딜 올라오느냐며 따박따박 잔소리를 했을 앙증맞은 입술이 조용한 걸 보니 어지간히 지난 밤이 피로했던 모양이었다.

 

…뭐, 귀엽게 굴어서 자중을 못 하긴 했다만.

 

 

"먹고 다시 자."

 

"밥 먹고 어떻게 자요…."

 

 

잠에 취한 상태로도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졸음 가득한 말투가 쭉쭉 늘어지면서도 맹랑한 요구를 묵살하는것조차 신재현다웠다. 힘없이 늘어진 손에 얌전히 끼워져있는 반지를 애정 가득한 눈으로 지켜보던 박문대가 쪽, 말랑한 뺨 위에 입술을 눌렀다 떨어졌다.

 

일어나고 싶은데 피로가 방해하는 모양이니 억지로라도 정신 차릴 주제를 던져 주는 수밖에.

 

 

"콩이가 기다릴 텐데."

 

"그럴 리가. 여긴 콩이가 없잖아요."

 

"......?!"

 

 

회심의 일격을 선명하게 받아치는 목소리가 아래가 아닌 뒤에서 들려오자 대번에 얼굴을 굳힌 박문대가 휙, 뒤를 돌았다. 박문대 외의 목소리가 심지어 제 목소리로 들린 까닭에 바로 정신을 차린 신재현 역시 반짝 눈을 뜨고 느리게 일어나 앉고 있었다.

 

완벽하게 같은 얼굴이, 문밖과 침대 위에서 서로를 마주 보았다.

 

 

"…나?"

 

"아. 음…. 이번엔 이렇구나. 준비하는 시간이 생각보다 길었던 모양이네요."

 

"......"

 

 

가장 빨리 준비했지만 그래도 5~10분 정도는 흘렀을 테니 그 정도 흐름이라면 림보에선 어마어마하게 긴 시간이었다. 그러니 망가진 꿈이 새로운 꿈으로 바뀌고, 망가진 사람도 소망으로 끌어낸 피사체로 대체할 수 있었겠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유쾌하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여부만큼은 나중으로 판단하자고 미룬 청려가 빙긋, 자연스레 미소지었다. 이쪽도 저쪽도 신재현인 까닭에 혼란에 빠진 지아비가 제법 귀여워서 어느 정도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얼굴이었다.

 

나는 이제 이렇게 웃을 수 있지만…. 너는 이번에도 그렇지 않을 텐데, 네가 원하는 나날 속의 풍경을 직접 끝내야 하는 게 조금은 유감스러운가.

 

 

"기억하고 있나요?"

 

"...뭐?"

 

"'꿈은 무엇을 남기는가'."

 

"......"

 

 

꿈.

 

현실에 충실히 임하며 살아온 박문대인 만큼 한 번도 생각한 적 없는 주제에 자연스레 이마가 구겨졌다. 이 새끼는 저번에도 그러더니 이번에도 갑자기 나타나서 뜬금없이….

 

아니, 잠깐.

 

'이번'에도?

 

...이번?

 

 

"......너…."

 

 

-두근.

 

 

심장이 불안하게 달음박질치기 시작했다.

 

필요 이상의 예민함이, 맥락 없는 압박감이 숨통을 조여왔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게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일 텐데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가 너무 훤하게 다가와서, '그 장면'을 보기 싫다는 본능적인 공포가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박문대의 모든 부정적인 신호가 신재현에겐 긍정적인 신호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저번' 이미지가 소용없었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계산하며 조금은 굳어있던 입매가 부드럽게 말려 올라갔다.

 

 

"기억하는구나."

 

"…뭐가. 갑자기 나타나서 무슨 소리냐, 너. 내가 뭘 기억한다고."

 

 

박문대가 경각심을 날 세우자 덩달아 조용하게 가라앉아 '신재현'을 주시하는 연인의 체온이 등 뒤에서 유일한 위안을 가져왔다. 그 체온에 홀려 '신재현'이 나타난 순간 말이 없어진 것이 피사체의 특성이라는 사실을 떠올리지 못한 박문대가 어지러운 가운데서도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았다.

 

불안하지 않았다. 불안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신재현은,

 

 

"나를요."

 

 

신재현을…….

 

 

"......"

 

 

......잃지 않았을 텐데.

 

 

'-잊지 마요, 후배님.'

 

 

불안할 이유가 없다고 주문처럼 외는 강박 사이로 하얗게 웃으며 붉게 물들어 흩어지던 얼굴이 어지럽게 떠올라 심상을 뒤덮었다. 욱신대는 통증이 머리에서 시작된 것인지 심장에서 시작된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아 침대를 짚은 팔이 비틀, 힘을 잃었다.

 

자박, 특유의 모델 같은 걸음걸이로 다가온 '신재현'은 어느샌가 거울상처럼 똑같은 자기 자신을 앞에 둔 채였다.

 

처음 보지만 익숙한 불안감이 느껴지는 물건을 손에 쥔 채로.

 

 

"……신… 재현."

 

"후배님이 '나'를 이렇게 그리워 해 준 건 기쁜 일이지만…."

 

 

차게 식은 총구가 무방비한 눈으로 그저 지켜보고만 있는 또 하나의 자기 자신을 노렸다.

 

마지막을 끝맺는 과정에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식의 자기 살해는 신선한가. 여러모로 허를 찔렸다 싶었지만 치워야 할 것을 치우려는 과정에 망설임은 없었다.

 

죽여야 하는 실체가 나뉘어 있을 뿐, 이미 신재현은 박문대를 '자각'시키기 위해 몇 번이고 죽음을 반복했으므로.

 

 

"그거 치워."

 

"우리의 현실은 이곳이 아니에요, 문대 씨."

 

"치우라고."

 

"후배님은 시스템이 아니고…, 그러니 림보에 자신을 가둘 이유도 없죠."

 

"......"

 

 

수 싸움에서 이긴 시스템이 박문대에게 심은 생각은 심플했다.

 

 

 

'박문대는 시스템이다.'

 

 

 

성공적인 인셉션을 끝마친 시스템은 림보를 제 터전으로 삼았다. 이미 리얼리티에서의 경험으로 '실재'하는 공간이 아니라도 양분을 끌어낼 수 있다는 검증을 마쳤으니 차라리 현실보다 림보에서 노니는 쪽이 더욱 낫다는 게 그것의 판단이었다.

 

림보.

 

심층의 심층까지 내려온, '모든' 인간들이 공유하는 무의식 밑바닥.

 

그곳을 터전으로 삼고 심지어 림보를 계속해서 변화시킬 '축'을 심어둔다는 건 제법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그러니까, 시스템의 입장에서는 무척 훌륭한 선택지일 게 분명했다. 모든 인류가 공유하는 무의식인 만큼 동원되고 흩어지는 열망은 바닥을 몰랐고, 실제로 거기까지 도달하는 사람은 적은 만큼 림보에 갇힌 박문대만을 통제하면 시스템의 할 일은 끝이었으니까.

 

박문대의 이변을 눈치채고 어떤 상황인지 정확하게 분석해낸 GM, 청려가 없었다면 이번에야말로 영원히 끝나지 않는 '꿈'을 볼 수 있었을지 모르는 선택이었다.

 

그렇다면, 이미 인셉션에 갇힌 상대를 끌어내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

 

 

'...림, 림보로 직접 들어가신다고요…?'

 

'네.'

 

'그, 선배님까지 거기 갇히시면….'

 

'나는 괜찮아요. GM 권한이 남아 있어서 100% 빠져나올 방법을 쥐고 있으니까.'

 

'.....!'

 

 

자칫 잘못했다간 한순간에 대한민국 대표 유명인사를 둘씩이나 가사상태로 빠트릴지 모른다는 부담감에 차마 부탁하지 못하고 눈치 보던 면면들이 밝아지던 순간을 똑똑히 기억했다.

 

방법이란 게 스스로 끝내는 방식인 건 구태여 말할 필요가 느껴지지 않아 함구했고, 하나뿐인 메인보컬이자 친구를 넘어선 가족을 잃을 위기에 처한 어린애들은 순진하게 잘 부탁한다며 부탁에 부탁을 거듭했다.

 

 

'선배님~ 문대문대는 어떻게 끌고 나오실 것인지는 여쭤보고 싶은데요~'

 

'아.'

 

'아! 제가 선배님을 의심하는 게 아니고! 인셉션이 벗어나기 쉬운 게 아니니까요~'

 

 

개중에 하나만큼은 정신을 차리고 경계를 놓지 않았었지만.

 

이세진이 박문대와 기질이 비슷한 걸 알고 있었으니 딱히 불쾌하진 않았다. 오히려 흥미로웠지.

 

림보에서 미아가 되는 순간 의식을 찾지 못한다는 팩트를 가장 빨리 물어온 게 이세진이었고, 벗어날 방법을 백방으로 알아보다가 포기한 뒤 멤버들에게 알린 사람이었으니. 가망 없는 상황에서 어중간한 당근을 흔들고 빚을 지우려는 게 아닌가 의심하는 것도 제법 쓸만한 판단이었다.

 

결과가 모든 것을 말해주겠지만 그전까진 일방적인 부채감을 안고 살게 되는 셈이니 그쪽 측면에서 보자면 당연히 다른 가능성을 확인하고 싶을 것이고 말이다.

 

살짝 턱 끝을 까딱인 신재현이 톡톡, 테이블 위를 가볍게 두들겼다. 깔끔한 미소가 어렸다.

 

 

'인셉션.'

 

'네?'

 

'덮어씌워야죠.'

 

 

시스템이 심어둔 생각을, 신재현이 심을 생각으로.

 

애초에 박문대가 림보에 빠진 건 박문대 자신의 판단 때문이었다. '내'가 시스템이라면 살아있는 이상 현실에, 신재현에게 필연적으로 개입하고 싶을 테니 모든 것을 망치기 전에 나 혼자 가라앉겠다는, 시스템의 암시가 진짜라면 신재현조차 부정하지 못했을 선택지 아니던가.

 

하지만 근본이 달라진다면 박문대가 림보를 고집할 이유는 사라진다.

 

림보 속의 박문대가 위화감을 없애기 위해 림보가 현실이라며 스스로 암시까지 걸어버린 탓에 덮어쓸 의식이 이중이 된 건 조금 번잡스러웠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신재현을 무의식의 피사체로써 불러올 만큼 박문대가 강하게 염원하는 만큼, 신재현 역시 박문대를 현실로 불러오기 위해서 기꺼이 '마지막'을 반복하며 박문대가 스스로 새겨둔 현실이 가짜라고 알려줄 용의가 있었으니까.

 

드디어 현실에 자리 잡은 신재현에게 해를 끼치고 싶지 않기에 림보로 가라앉았는데, 막상 지켜주겠다 다짐한 대상이 자기를 깨우겠다고 림보까지 찾아와서 몇 번이고 죽어버리는 '경험'을 남긴다?

 

 

'후배님이 반길 선택이 아닐걸.'

 

 

그래서 선택했다.

 

이것은 모두 꿈이며, 꿈이라도 경험은 남는다는 인식을 남겨 다른 메시지를 지우겠다고.

 

신재현이 아는 박문대라면 여기까지만 심어놓더라도 꿈이 끝나지 않는 이상 신재현이 계속 다른 방식으로 마지막을 맞게 된다는 걸 충분히 짐작할 테고, 그놈의 리셋을 지긋지긋하게 생각하며 치를 떨던 박문대였으니 다른 두 생각을 충분히 떨쳐낼 수 있을 테니까.

 

다만 시작과 끝이 없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게 림보였으니 꿈에서 장면이 바뀌는 것처럼 맥락 없이 불러오는 '평화로운 일상'이 조금 곤란했다. '신재현'이 사라진 사이를 평화로운 피사체 신재현이 메꾸고 타격을 지워버리는 부분이 예상보다 일을 더디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와야 할 결론은 결국 느리게라도 도달했고, 그게 지금이었다.

 

 

앞으로 한걸음.

 

 

"나는… 솔직히 말하자면, 이번에도 실패해도 상관없어요. 내겐 내 마지막이 그렇게 큰 가치를 지니지 않거든."

 

"......너."

 

"하지만 후배님은 다르겠지."

 

 

아니야?

 

 

동의를 구하듯 부드럽게 휘어진 눈이 '직전'과 비슷하게 반짝였다.

 

직전. 연예계에서 떠난 신재현과 연애하고, 결혼하고, 반짝이는 순간들을 소중하게 보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스스로 끝내는 것을 봐야 했던…….

 

찰나의 '꿈'.

 

 

"......"

 

 

균열이 터지듯 닥쳐오는 그간의 '장면'들에 헉,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꿈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실제로 꿈이었으니 선명하게 기억나진 않았지만, 녀석이…, 신재현이 몇 번이고 같은 말과 같은 행동으로 꿈을 끝냈다는 건 이제 어렴풋이 인지할 수 있었다.

 

현실을 부정하듯 밀려온 가짜가 눈을 흐리고 있었지만, 계속해서 이걸 외면한다면…….

 

 

"돌아가요, 문대 씨."

 

 

……녀석이, 또 저렇게 웃을 것 아닌가.

 

차라리 우는 게 더 나을 만큼 안쓰럽게 미소짓는 얼굴이, 눈가가 하얗게 질려있는 게 이제는 눈에 들어왔다. 현실을 일깨울 수 있다고 믿으면서 반복하고 있었겠지만…. 그 과정 내에서 이미 함께 늙어가던 시간이, 기억이 같이 남아버린 게 신재현이었다.

 

현실보다 더 애틋한 꿈을 뒤로 한 채 '현실'을 선택할 수 있을 거란 확신이 결정적인 순간에 요동치는 건 인간이라면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그래."

 

"…!"

 

 

훅, 한순간에 바뀌어버린 공간은 더는 세이프 하우스가 아니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본래의 모래사장이 그린 지평선 위로 푸른 공허를 그대로 담아낸 물결이 잔잔하게 밀려왔다. 생생하게 느껴지는 소금기 어린 바람을 따라 결 좋은 머리카락이 곡선을 그리며 유영했다. 가늘게 조각나는 시야 너머로 '준비'를 끝마친 박문대의 얼굴이 비쳤다.

 

가장 바라온 순간이지만 가장 하고싶지 않기도 했던 일을 목전에 앞둔 신재현이 작게 숨을 들이켰다.

 

……이것만큼은, 흐려지면 좋겠는데.

 

가급적 완전히.

 

 

"돌아가자, 재현아."

 

"…네."

 

 

일어나서 만나요.

 

 

입 모양으로 속삭인 마지막 인사에 박문대가 푸슬 웃는 걸 확인한 신재현이 눈매를 부드럽게 휘었다. 뒤이어 웃음기를 빼고 천천히 감겼던 눈이 조용히 뜨이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이 아닌 상대를 겨눌 수 있게 된 총구가 곧게 뻗어 나갔다.

 

 

총성이 울렸다.

 

 

 

 

 

 

* * *

 

 

 

 

 

 

 

"ㅡ……."

 

 

 

움찔, 경련과 닮은 움직임으로 뜨인 눈이 가늘게 떨렸다.

 

흐릿했던 초점이 개화하듯 또렷하게 잡히고 풀려있던 청회색 눈동자에 이지가 깃들어 선명한 자아를 되찾는 장면을 하나하나 눈에 새기며 똑똑히 지켜보던 남자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맥락 없이 끊기고 시작되던 꿈속에서 내내 지켜본 얼굴이었지만 역시 아무리 생생한 꿈이라도 현실이 제일이다 싶은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자는 내내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마시지 못했지만, 신재현의 지휘 아래 수액으로 철저하게 관리된 덕에 컨디션도 그렇게 나쁘지 않았으니 버틸 만했다. 고생길을 자청한 녀석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으니 다행인 일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란 게 먼저 정신을 차린 사람이 나중에 눈 뜬 사람에게 건넬 인사치고는 이상한 이야기고, 거기에 대답하는 말도 오묘한 내용인 걸 서로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순간을 위해 감수해온 지난한 시간이었으니 인제 와서 인사말 따위가 문제 될 리 없고, 오히려 듣고 싶어 마지않은 내용일 게 분명하니까.

 

예상했던 말을 그리웠던 목소리로 읊는 박문대를 확인하며 반지를 어루만진 신재현의 얼굴 가득 번진 미소가 더없이 눈부셨다.

 

 

"돌아왔다, 신재현."

 

"어서 와요, 건우 형."

 

 

더없이 찬란한, 현실의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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