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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ffocato

- Day 1

 

전원을 켠 것처럼 반짝 의식이 돌아왔다. 적정 수면시간을 지켜 통잠을 자고 일어나더라도 이렇게까지 극상의 아침을 맞이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졸음도 꿈도 남아있지 않은 기이한 기상. 이에 의아해진 건 사실이나, 골몰할 만큼 이상한 일은 아니었기에 나는 곧장 아침 식사를 하고 커피를 내렸다. 뜨거운 머그잔을 들고 거실로 건너오며, 오늘따라 묘하게 낯선 집안을 바라봤다. 가구의 배치가 조금 이상한 것 같기도 하고, 집안 가득 배어있는 섬유유연제 냄새가 다른 것 같기도 했다.

 

통창 너머로 보이는 전경조차 이질적인 느낌이다.

 

중요한 일정을 앞에 두고 무언가 빠트리기라도 한 것처럼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기분 탓이겠거니, 주변을 훑던 나는 이윽고 내벽 중앙에 매달린 태피스트리에 시선을 고정했다. 누군가의 손뜨개로 만든 노란 강아지 그림의 태피스트리. 내 취향과는 괴리가 있는 귀여운 모양새에 한 번 놀라고, 출처가 기억나지 않는 것에 또 한 번 놀랐다. 아마 내가 직접 구매한 물건은 아닐 것이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았겠지. 그런데 그 상대가 기억나지 않는 건 왜일까.

 

아까부터 이어지는 내 묘한 상태에 의문을 품자, 머리가 덜그럭거리며 현기증을 내기 시작했다. 나는 떨어트릴 것만 같은 머그잔을 간신히 테이블에 올리고 숨을 골랐다. 아무래도 외출을 해야 할 것 같았다.

 

특별한 일정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역시나 특별히 하고 싶었던 게 있었던 것도 아니다. 나가는 김에 새 운동화를 신었고, 새 운동화를 신어본 김에 걸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여유가 있는 날의 가벼운 산책. 스마트폰을 보지 않고 걸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유행을 구경하는 정도로도 인간은 안정감을 찾을 수 있었다.

 

계절조차 잊고 뚜렷한 목적 없이 걸음을 옮기던 나는 땀과 갈증을 식힐 겸 카페를 찾았다. 꽃잎이 함께 블렌딩 된 홍차를 주문해 마시며, 벽 선반에서 책을 꺼냈다. ‘노르웨이의 숲’. 나는 이미 완독한 적 있는 책의 처음부터가 아닌, 중앙을 열어 글자를 읽어 내리고 책장을 넘겼다. 가상의 존재 혹은 타인의 이야기에서 내 일생의 일면을 덧대며, 내 감정을 불러일으킨 모든 것을 떠올렸다. 그제야 불현듯 나는 깨닫고 말았다. 내가 지금 무언가 잃어버렸다는 것을.

 

황급히 카페를 벗어난 순간부터 초조함을 참을 수 없었다. 그 무엇에도 쫓기는 부분이 없는, 아주 평범한 하루라고 생각했지만 틀렸다. 오늘뿐만 아니라, 내게는 내일도, 내일모레의 계획조차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하다못해 휴대전화 요금을 내야 하는 정기적인 일정조차 알 수 없었다. 누군가 도려내 간 듯이 삶을 송두리째 빼앗긴 것이다. 나는 텅 빈 기억 속의 실마리를 잡느라 몸부림을 쳤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어째서 나는.

 

콰아앙!

 

그때 맹렬한 굉음이 침체하던 정신을 일깨웠다. 자동차가 완전히 우그러질 정도의 충격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사람들이 걸음을 멈춘 건 단순히 사고에 의해서가 아니었다. 반파된 차 위로 올라앉아 있는 무언가. 호러 문학에 등장할 법한 외형을 가진, 하늘에서 떨어진 공상의 산물이 머리 거죽을 만개한 꽃잎처럼 쩍, 벌렸다. 아마도 그때쯤 비명이 터졌다.

 

그것은 사마귀처럼 기다란 앞발을 뻗으며 순식간에 너덧의 사람을 찢어발겼다. 혼비백산한 사람들이 마구 엇갈리고 부딪치며 소리를 질러댔다. 나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탄환이 발사되어 날아가는 속도는 아니지만, 인간이 쉽게 피할 수 없는 속도를 가진 생명체가 주변을 모조리 휩쓸어갔다. 심지어 하나가 아니었다. 그걸 인지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인간의 여린 살가죽은 그것의 손톱에 스치는 순간 어찌할 도리 없이 내장을 토해냈다. 정말로 너무 간단하게 사람이 죽어나갔다. 반항조차 할 수 없었다. 그 끔찍한 광경이 머리에 벼락처럼 내리꽂히며 경광등을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살아남아야한다고 생각했다.

 

징그러울 정도로 고막을 때리던 그것의 울음소리가 제법 가까이 따라왔다는 것을 알아챘을 때 트럭 밑으로 몸을 날렸다. 2.5톤짜리 카고 트럭이 마치 장난감처럼 간단하게 흔들렸다. 나는 반대쪽으로 빠져나와 트럭을 등지고 계속해서 주변을 살폈다. 그것의 의식을 돌려야 한다고 판단했을 때 빌어먹게도 재난문자의 경보음이 울려 퍼졌다. 이런 젠장! 나는 시끄럽게 울어대는 스마트폰을 트럭 반대편으로 내던졌다. 경보음을 따라 고개를 돌린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울리는 경보음에 의식을 빼앗겼다. 왜 눈앞에 나를 두고 굳이 다른 방향으로 떠난 건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나는 이명이 울리는 머릿속을 갈무리하지도 못한 채 내달렸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눈앞이 하얗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주인을 잃은 차들이 도로를 어지럽게 종횡하고 차 밑에 깔린 사람 몇몇은 살려달라며 울부짖었다. 누군가 내 팔을 낚아채지 않았더라면 나 또한 그들과 다르지 않은 꼴을 하게 됐을 것이다. 나는 누군가의 힘에 의해 속이 빈 봉제인형처럼 질질 끌려가 카페 테이블 아래에 몸을 구겨 넣었다.

 

“후배님.”

 

왜 익숙한지 모를 목소리로 그는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새하얗게 드러난 피부. 깨끗한 이목구비. 밤하늘을 담은 신비로운 눈동자.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어딘가 기시감이 드는 얼굴이 나를 빤히 직시했다.

 

“지금 기억하는 거 말해 봐요.”

 

지금 이 상황에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어제 뭘 했는지 기억해?”

 

나는 황급히 그의 손을 붙잡았다.

 

 

 

 

생존법칙1. 어떤 소리도 내지 말 것

 

생존법칙2. 아무 말도 하지 말 것

 

생존법칙3.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두 가지를 지켜요, 후배님

 

 

 

 

- Day 97

 

[ Enjoy your ■■■■…… XD ]

 

허공에 띄운 팝업을 원수진 듯 노려보다 손을 휘저었다. 아침마다 해당 문구를 확인하는 행위는 버릇처럼 이루어지고 있었다. 상태창이 저 문구를 띄운 날 이후로 먹통이 되어버린 탓이다.

 

재난 생존물을 찍는 것과 동시에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지만, 머릿속으로 이미 수십, 수백 번 상태창과 큰달을 호출한 뒤였다. 심지어는 아직 바깥이 혼란으로 가득할 때 소리 내어 불러본 적도 있었다. 물론 그 무엇에도 제대로 된 반응이 돌아온 적 없었다. 복장이 터지는 일이었으나, 그렇다고 포기할 수조차 없었다. 어쨌든 상태창은 여전히 팝업으로나마 자신의 존재를 표명하고 있고, 어떤 특정 조건에 의해 상태창이 활성화된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 당장 그 조건이 무엇인지 몰라서 문제였을 뿐이다.

 

스케줄이 막 끝난 저녁. 아마도 목요일. 배고프다는 애들을 데려다 밥을 해먹이고 잠이 들었던 것 같은데, 깨어보니 기억을 빼앗긴 채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다. 미디어 매체로나 봤을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관에서 대체 나와 상태창에 어떤 연관성을 찾으라는 거냐고. 나는 힌트를 찾기 전까지 최선을 다해 살아남았다. 그리고 생각을 거듭했다. 내 기억을 지우고, 알 수 없는 세상에 빠트린 시스템의 의도.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방법. 어쩌면 이 세계에 있을지 모르는 아는 사람들.

 

2주쯤 지났을 무렵 마침내 폭발한 나는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날뛰었다. 당장에라도 뛰쳐나가 괴생명체의 사이를 누비고, 생존한 사람들 사이를 뒤져볼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런 나의 어리석은 행태를 뜯어말린 건 다름 아닌 청려였다.

 

[ 위치도, 생사도 모르잖아요. ]

 

태연함을 가장하고, 빠르게 팝업을 띄우며 나의 안일함을 나무랐던 청려는 본인이 손끝을 떨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차마 떨쳐내지 못한 그의 차가운 손을 잡았다. 실제로 청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이 빌어먹을 재난상황에서 그들을 찾을 수 있기나 할까. 소리 내어 부를 수도, 연락을 취할 수도 없는데. 게다가 괴생명체의 습격을 받은 날에, 사고사를 당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지금 같은 상황에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위험했다. 나는 느긋하게 시간을 들여 마음을 가라앉힌 후, 거처나 식량 확보 등을 제안한 청려의 말을 얌전히 따랐다.

 

그리고 지금에 이른다.

 

지끈거리는 통증이 관자놀이를 가로질렀다. 뻑뻑한 눈두덩을 문지른 다음에야 억지로 눈꺼풀을 떼어냈다. 나는 그 누구보다 내 상태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나는 거의 히스테리 환자다. 의문은 원망이 되고, 갈 곳을 잃은 원망은 나를 심적으로 몰아붙였다. 본래에도 내가 그리 단단한 정신력을 가지지 못했던 탓이다. 안타깝지만 어쩌겠는가. 아마 이 세계를 벗어나는 그 순간까지도 이럴 것인데. 그렇게 자학에 가까운 자기비판 속에 빠져있던 나는 습관적으로 청려를 찾았다. 목을 죄듯 답답함을 느낄 때 그를 보면 조금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나와 같은 세상에서 온, 나와 이전 세상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

 

비어있던 옆자리를 미끄러지듯 가로질러 침대를 벗어났다.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사람을 찾는 것쯤은 간단한 크기의 패닉룸. 두꺼운 콘크리트로 사방이 막힌 작은 지하실에서 나는 청려의 흔적을 쫓았다. 이곳에 없다면 아마 지상층에 올라가 있을 것이다. 언제나 그랬다. 있는 듯 없는 듯 집안을 활보하며 새로운 것을 찾아 나타나곤 했다. 이번에도 아마 그럴 것이다.

 

나는 충격을 흡수하기 위해 여러 겹 덧대어 깔아놓은 카펫을 밟고 천천히 테이블로 향했다. 가는 도중 선반에서 플라스틱 숟가락을 챙겼고, 미니 냉장고를 열었다. 찬기가 느껴지지 않는 냉장고 안에서 이미 한참 전 끓어올랐을 전투식량을 꺼냈다. 기계적인 동작으로 양념이 된 밥알을 퍼먹으며, 샌드위치처럼 쌓인 신문에 시선을 고정했다.

 

괴생명체에 의한 잇따른 참사, 원인은 ‘소리’

 

헤드라인 아래에 그것이 흐릿하게 찍혀있었다. 저 사진은 아마 죽은 누군가가 마지막으로 남긴 데이터였을 것이다. 저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들리는 셔터음을 놓칠 리 없을 테니. 아쉽지만 아무리 신문을 뒤져봐도 갑자기 나타난 생명체에 대한 정보는 몇 가지 되지 않았다. 앞을 보지 못하지만, 소리는 몹시 기민하게 받아들인다는 것. 인간을 먹진 않지만, 혈안이 되어 사냥한다는 것. 생각보다 많은 숫자가 지구에 풀려났다는 것.

 

묘하게 가라앉은 기분으로 식사를 끝낸 뒤, 가방을 챙겼다. 플라스틱 버클을 모조리 떼어낸 가방 안에 손전등과 작은 물병 하나를 챙긴 후, 활짝 열린 패닉룸의 경계를 넘었다. 이 두터운 철문은 아침이 되면 열렸다가 밤에 닫힌다. 여닫을 때마다 내는 경첩의 소음을 최소화하려는 조치였다. 그 때문에 낮에는 패닉룸 안에서도 소리를 내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여야 했는데, 이제는 그것조차 퍽 익숙해져 있었다.

 

패닉룸을 벗어나 계단을 오르고 두 번째 입구를 넘었을 때, 팝업이 떠올라 나의 진로를 가로막았다. 내가 나가려는 것을 알아채고 귀신같이 나타난 청려였다.

 

[ 후배님. ]

 

이번엔 뭘 찾아냈는지, 청려는 의뭉스럽게 웃었다. 의아한 마음에 한바탕 청려의 몸을 훑자, 그는 기계 하나를 내밀었다. 스마트폰이 보급된 이후 자취를 감춘, 건전지로 작동하던 MP3다. 생존을 위해 땅속으로 몸을 숨기고, 대화조차 여유롭지 않은 인간에게 서랍장에서 썩어가던 MP3는 무척 대단한 보물이었으나, 우리에게는 아니었다. 우리는 일단 평범하게 대화할 수 있었으니까.

 

[ 그건 뭐 하려고? ]

[ 들을 건데요? ]

 

그러면서 청려는 능숙하게 MP3를 작동시킨 후, 이어폰의 한쪽을 내밀었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지만, 썩 내키지는 않았다. 오늘은 반드시 멀리까지 나갈 필요가 있었으니까.

 

오늘은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장마가 끝난 후 빗소리로 인기척을 감출 수 있는 날의 외출은 흔치 않았다. 그러므로 당장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먼저 빗물을 받기 위해 통을 내놔야 했고, 빗물을 받는 동안 구급함을 채우기 위해 약을 가져와야 했다. 약을 찾아온 후에는 빗물에 세제를 풀어서 옷을 불릴 예정이었다. 그러니까 밀린 빨래까지 할 수 있는 귀중한 하루라는 말이었다. 나는 마치 변명처럼 이어지는 일정을 되뇌다 한숨을 삼키며 팝업을 띄웠다.

 

[ 바쁘니까 나중에. ]

 

내 말에 청려는 조금 시간을 두고 대답했다.

 

[ 알았어요. ]

 

그는 두 번의 권유 없이 이어폰을 갈무리했다. 그러더니 조용히 계단을 타고 내려갔는데 축 처진 어깨가 어찌나 처량했는지 모른다. 젠장. 나는 그 암울함에 이끌려 패닉룸으로 도로 내려갔다. 청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침대에 앉아 MP3를 만지작거리거나 했다. 저럴 거면 차라리 떼를 써보기라도 하던가. 나는 머리를 쓸어올리고, 청려의 옆에 엉덩이를 붙였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손을 내밀어 보이자, 예상하기라도 한 것처럼 눈가를 접어 웃었다. 여우 같은 놈.

 

I just want you close

Where you can stay forever

 

이어폰에서 여성 팝 가수의 노래가 나오는 동안 청려는 자신의 허벅지 위에 손을 올린 그대로 상체만 기울였다. 아무런 대비도 하지 못한 채 닿게 된 타인의 체온이 몹시 뜨겁게 느껴졌다. 어깨로 흘러내린 부드러운 흑발 탓에 목과 그 아래가 간지럽기도 했다. 청려에게서 느껴지는 만족감은 상태창과 실랑이를 하며 신경질적으로 굴던 나의 상태마저 안정적으로 이끌었다. 그게 몹시 편안하고 좋았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을 것이다.

 

[ 후배님. ]

[ 왜? ]

[ 노래 부르고 싶지 않아요? ]

 

의도를 알 수 없는 팝업이 반짝거렸다. 방금까지 잔잔해졌던 마음이 잔물결을 내기 시작했다. 청려는 가만히 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 별로. ]

 

나는 겨우 대답했다.

 

 

- Day 98

 

그날. 그러니까 인간들 사이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재앙이 떨어진 날. 우리는 공황상태의 사람들 틈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서울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인구수를 가진 도시였고, 당시 그들은 괴생명체에게서 목숨을 부지하려면 소리를 내지 말아야 한다는 정보조차 없었다. 즉, 이유도 목적도 알지 못한 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죽어나갔다는 말이다.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괴생명체가 인간들을 찾아 죽이는 건, 개미굴에 불을 지르는 만큼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은 곧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으로 바뀌어갔다. 발끝이 피에 젖어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참을 수 없이 구역감이 차오르며 공포심에 온몸이 얼어붙었다. 걸을 때마다 부서진 잔해와 사람들의 주검이 발에 채여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기억은 듬성듬성 비어있고, 당장 눈앞에는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이 상태로 제정신을 차리고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정신 차려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공황상태에 접어든 나는 청려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는 내가 사람들에게 치이거나 밟히지 않도록 조심해가며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그러더니 누군가 들이닥치기 전인 작은 건물의 화장실로 나를 밀어 넣었다. 문 건너편에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가 도로 내려오는 사람들의 소리가 한참이나 이어졌다. 잠긴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흔들거나 쾅쾅 두드리기도 했다. 사위가 조용해지고 나서야 청려가 아주 작은 소리로 제안했다.

 

연희동으로 가요.

 

청려는 놀랍게도 패닉룸이라 불리는 작은 지하실을 보유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패닉룸이 포함된 주택 한 채였다. 연희동에 오래된 주택을 허물고 새로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다. 참으로 기이하지. 요즘에는 주택 지하를 파내어 패닉룸이나 미니벙커를 함께 짓는 일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이 재난상황에서 그 귀중한 곳을 선점할 수 있다는 건 분명 거짓말 같은 행운이었으니. 어쨌거나 우리는 지체할 새 없이 곧바로 이동했다. 걸어서 두 시간이면 이동할 거리를 꼬박 반나절이 걸려 도착했고, 그리하여 우리는 지금 연희동 주택에 몸을 의탁한 상태다.

 

다시 한 번 말하는데, 패닉룸의 존재는 말도 안 되는 행운이다. 마당까지 딸린 2층짜리 주택의 패닉룸엔 당장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비상식량과 식수가 채워져 있고, 가정집에 있을 법한 물건들이 모두 구비되어 있었다. 우리는 패닉룸의 상태를 점검한 뒤, 곧장 지상층에서 필요할 만한 것들을 모두 털어 패닉룸으로 옮겼다. 그렇게 누구보다 형편 좋은 우리에게도 단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의약품에 관한 것이었다.

 

98일째인 오늘 새벽녘쯤부터 청려가 열을 앓기 시작했다. 델 듯 뜨거운 이마를 찬 수건으로 문지르며 활짝 열린 구급함을 바라봤다. 붕대와 응고제, 탈지면 등을 포함하여 소화제나 종합감기약 같은 비상약까지 담겨 있었다. 없는 거에 비하면 차고 넘치는 구성이라지만, 4알 정도밖에 남지 않은 감기약의 포장지를 보며 미간을 눌렀다. 이것마저도 하루 권장량 꽉 채워 먹이면 오늘로 끝이다. 오늘 안에 열이 내릴지, 이게 감기가 맞긴 한 건지, 혹시 다른 병이라면 어떡해야 할지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았다.

 

[ 괜찮아요. 다른 지병이 있던 게 아니니까. ]

 

청려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내게 팝업을 띄웠다.

 

[ 그보다 본인이나 걱정하는 게 어때요? ]

[ 무슨 헛소리냐. ]

[ 옮을까 봐. 후배님은 종종 크게 아팠잖아요. ]

 

부정하고 싶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 전 세계에서뿐만 아니라 이 세계에 떨어지고 나서도 나는 삼일 가량 앓아누운 전적이 있었다. 감기약이 모자란 건 다 그 탓이다. 내가 심란해 하는 동안 청려는 눈을 반쯤 뜨고 나를 올려다봤다. 말하지 않아도 원하는 바가 또렷했으나, 나는 모른 척했다. 그리고 바로 어제 챙겨놓고 결국 목적을 이루지 못한 가방을 집어 들었다.

 

[ 갈 건가요? ]

 

청려는 막 패닉룸을 벗어나려는 내게 팝업을 보냈다.

 

[ 좀 자라. ]

 

팝업을 되돌려주고 벗어나려니 덜컥 팔이 붙들렸다. 청려의 손바닥에서부터 열감이 살갗을 타고 올랐다. 열이 나서 이성을 말아먹기라도 한 건가. 내가 저항하기도 전에 청려는 단숨에 내 몸을 끌어당겨 테이블 위로 밀쳤다. 양팔 안에 나를 가두듯 테이블을 짚었지만, 정상인 상태가 아닌 사람의 힘은 조금만 몸을 비틀어 빼면 저항이 가능할 정도였다. 손끝에 잔등이 닿지 않았더라면 아마 나는 청려를 제압해 도로 침대에 눕히고 한소리를 했을 것이다.

 

“…….”

 

작은 소란에 촛불이 흔들리고, 쇠잔등은 테이블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쳤다. 저게 떨어졌을 거라고 생각하니, 소름이 끼쳐 올라 삽시간에 몸이 굳었다. 그래, 힘으로 이길 수 없으니까 이걸 노렸군.

 

[ 뭐하자는 거냐? ]

 

청려는 팝업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어깨로 힘없이 떨어진 머리가 여전히 뜨겁다.

 

[ 가지 마요. ]

[ 그냥 옆에 있어주면 좋겠어요. ]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어떤 목소리를 냈을지 모르지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도 있었다. 담담히 떠오른 팝업에 담긴 저항할 수 없는 기운. 아마도 불안함. 자신이 없는 장소에서 나를 잃어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그는 참지 못한 감정을 기어코 끄집어냈다. 나는 그를 이해했다. 내가 청려를 의지하듯, 청려도 나를 의지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생존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기반이다. 나는 열감이 느껴지는 청려의 머리통에 손바닥을 올려놓고 한숨을 쉬었다.

 

[ 옮을까 봐 걱정됐던 거 아니냐? ]

 

내 말에 청려가 고개를 들고 작게 미소 지었다.

 

[ 안 옮길게요. ]

 

 

- Day 99

 

전날 약을 두 번 나누어 먹인 뒤, 밤새 청려의 옆에 붙어 상태를 살폈다. 앓는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조용히 몸 상태를 감내하던 청려는 잠이 들었다가도 눈을 뜨면 나를 찾았다. 옆에 있을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자. 대체 몇 번이나 확인하는 거냐. 핀잔하며 청려를 재우고 그 사이에 커피를 찾아 마셨다. 만약 해가 뜬 이후에도 상태가 나아지지 않는다면 청려를 강제로 침대에 묶어둔 뒤 외출할 생각이었다. 조용히 나를 노려보며 항의할 테지만, 이번만큼은 나도 양보할 수 없었다. 분리불안을 겪는 게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 나 이제 괜찮은 것 같아요. ]

 

물론 그런 불미스러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새벽 4시쯤부터 점점 상태가 호전되던 청려는 아침이 되자, 기운을 차렸다. 체온도 정상에 가까운 온도로 내려가 있었다. 나는 그제야 쏟아지는 졸음을 억지로 물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 배가 고프네요. 밥 먹을까요? ]

 

청려는 만류하는 내 말을 깔끔히 무시하곤 분주히 식사를 준비했다. 그는 패닉룸의 문을 열기 전에 미니 화로에 물을 끓여 닭 가슴살을 데우고 비싼 통조림 몇 개를 조심스럽게 깠다. 심지어 특별한 날에 마시자며 아껴두었던 병 주스까지 꺼냈다. 생사가 갈대처럼 흔들리는 우리에게 제법 과분한 성찬이 차려졌다. 그래서일까 청려는 상당히 기분이 좋은 것 같았고, 나는 반대로 기분이 가라앉았다.

 

세상에 재앙이 떨어진 지 99일째.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지금 이 상황에서 자그마치 99일이라는 시간이 흘러갔다. 앞으로도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아주 작은, 사소한 실수로 소리를 내어 죽을 수도 있다. 도심에 존재하는 수많은 생존자와 싸우다 죽을 수도 있었다. 이제는 감기에 걸려 죽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오늘 당장에라도 청려가 눈을 뜨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자 첫째 날의 악몽이 되살아나며 피곤에 절은 뇌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뒤쫓는 괴생명체들. 박살이 난 인류의 흔적. 사람들의 주검. 아무리 흔들어도 더이상, 눈을 뜨지 않는, 청려. 발끝부터 수렁이 조금씩 차오르는 것 같았다.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나를 옭아매는 지독한 수렁이.

 

“…….”

 

청려의 상태를 염려하며 꼬박 밤을 새웠더니 약간 지친 걸지도 모르겠다. 생각을 거듭하던 나는 마침내 주의를 돌릴 새로운 화제가 필요하다 판단했고, 일단 식사를 시작했다. 통조림에서 꺼낸 게살을 입안 가득 밀어 넣고 씹으며 깨작거리는 청려를 가만히 바라봤다.

 

[ 너 말이야. ]

 

내 물음에 금방 닭 가슴살 반절을 해치운 청려가 눈을 들었다. 푸르게 맞닿은 시선에 슬쩍 눈을 돌리고 팝업을 보냈다.

 

[ 날 왜 계속 그렇게 부르냐? ]

[ 후배님이요? ]

[ 그래. ]

[ 본래의 세상에서도 계속 그렇게 불렀는데요? ]

 

청려는 얼마 먹지 못하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주스로 조금 목을 축인 후에는 아예 식사를 마친 듯 입가를 닦아내기까지 했다. 그는 본래의 세상에서도 입이 짧고, 미식이 까다로웠으며, 나를 후배님이라고 불렀다. 기억이 전부 돌아왔을 쯤부터 나는 청려에 대한 기억 또한 모두 떠올렸다. 그런데 호칭 따위가 이제 와서 왜 신경 쓰이는지 모르겠다.

 

혼란스러운 마음에 식사를 중단하고 통조림이나 노려보고 있는데, 청려가 팝업을 띄웠다.

 

[ 그러는 후배님도 제 이름 불러준 적 없잖아요. ]

 

그랬던가?

 

내가 무어라 팝업을 보내려는 순간, 내 팔꿈치에 채인 잔등이 아래로 추락했다. 그저 떨어지기만 한 거라면 다행이다. 초에 불이 붙어있지 않았으니까. 문제는 채이면서 통조림과 쇠잔등이 부딪쳤다는 점이다. 날카로운 소음이 허공을 치솟고 나와 청려의 시선이 동시에 부딪쳤다. 기어코 잔등이 사달을 냈다.

 

“…….”

 

우리는 숨을 죽이고 문을 노려봤다. 아마 이 정도의 소음이 바깥으로 새어나갔더라도 아주 작은 소리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안심할 수 없었다. 만약 그 괴생명체가 바로 위에 있다면? 혹시라도 이 소리를 들었다면? 그것은 우리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 당장 지하로 달려들어 문을 뜯어낼 것이다. 눈앞에서 청려가 죽어나가는 상상을 하자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워졌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눈을 감았다.

 

그때 청려가 툭툭 나의 어깨를 두드렸다.

 

[ 괜찮은 것 같아요. ]

 

눈을 뜬 내 앞으로 청려가 먼저 팝업을 띄우며 팽팽한 긴장감을 거둬냈다. 입이 바짝 마르고, 입맛까지 싹 달아날 때쯤 본능적으로 해당 사안이 위기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잔뜩 긴장한 근육을 이완시키며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탈력감이 몸을 휘어 감싸며 극심한 피로감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사과도 해야 했고, 기껏 차려준 식사도 해야 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 난 좀 쉰다. ]

 

나는 그대로 침대로 기어들어 눈을 감았다.

 

 

- Day 100

 

혹시 내가 떠올리지 못한 기억이 있냐?

 

글쎄요.

 

 

- Day 137

 

기어코 이 세계에도 혹독한 겨울이 찾아들었다. 훈기가 돌지 않는 패닉룸은 한낮에도 긴 팔과 겉옷을 걸치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울 만큼 추위가 사무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눈도 내릴 것이다. 그러면 오며 가며 뿌린 흙길이 얼어붙어 무용지물이 될 터였고, 양말 하나로 거리를 걷는 건 소중한 발가락 몇 개를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래서 청려와 나는 오늘을 마지막으로 최대한의 생필품과 식료품을 획득한 뒤, 실내의 겨울 방비를 논의하기로 결정했다.

 

[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라. ]

 

내 말에 고개만 끄덕인 청려가 끈을 묶어둔 간이 바리케이드를 넘었다. 그는 나와 함께 움직이고 싶은 기색이었지만, 크게 반발하진 않았다.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고 효율적으로 도심을 탐색하기 위해선 둘로 나누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을 테니까. 나는 청려가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찬가지로 바리케이드를 넘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근방의 모든 크고 작은 가게들은 살점을 죄 뜯긴 채 뼈만 남은 상태였다. 그만큼 많은 생존자가 존재한다는 뜻이었으나, 제한된 식료품의 숫자가 마음에 걸렸다. 이 세계는 냉장고가 작동하지 않은 상태로 여름을 보냈다. 아직 사람들이 다녀가지 않은 가게를 찾아내더라도 멀쩡히 먹을 수 있는 게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게 될까. 나는 얼굴을 쓸어내린 다음 고민 끝에 일단 마트로 향했다. 그곳은 이 근방에서 거의 유일하다시피 남은 공급처임과 동시에 상대할 수 없는 거대한 수문장을 둔 보물창고였다.

 

출입XXX 괴물 있음!

 

나는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남긴 표식을 넘어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물론 내가 노리는 것은 마트 안쪽의 내용물이 아닌, 마트에서 도망쳐 나오다 죽은 사람들의 물건이었다. 식량이 떨어지면 사람들은 어쩔 도리 없이, 마트로 향해야 했다. 운이 좋으면 뭐라도 건져 조용히 돌아갈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괴물에게 찢겨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지난번에 왔을 때보다 시체의 숫자가 늘어난 것을 보면 내 생각이 틀리진 않은 것 같았다.

 

나는 마트 입구와 가장 가까운 시체 몇 구에게 다가가 그들의 가방을 조심스레 주워들었다. 당장 괴생명체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나는 감각을 기민하게 세우고 숨소리를 내는 것조차 조심해야 했다. 가방을 주워 주차장을 가로지르는 동안 긴장으로 손바닥이 축축해졌다. 다리가 조금 떨렸지만, 더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마트 반대쪽으로 돌아 나왔다. 그런 내 손에는 내 것을 포함한 네 개의 가방이 들려있었다.

 

“…….”

 

성공적으로 목적을 이룬 셈이었으나……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언제까지 이러고 살아야 할까.

대체, 언제, 까지.

 

[ 후배님. ]

 

나는 갑작스럽게 날아든 팝업에 번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 집으로 와줄래요? ]

[ 도움이 필요해요. ]

 

무슨 일이냐고 물을 새도 없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발이 엉켜 휘청거리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흙길을 거슬러 올랐다. 괜히 시체를 가까이에서 본 탓일까. 별일이 아닐 수 있는데도, 쓸데없는 망상이 머릿속을 시꺼멓게 물들였다. 추위 때문에 손끝은 시릴 정도인데, 식은땀이 흘러내려 안쪽 티셔츠가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나는 집 근처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 일단 바리케이드의 끈은 끊어져 있지 않았다. 괴생명체가 다녀간 흔적도, 인간이 습격한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청려는 무사할 것이다.

 

[ 너 지금 어디야? ]

 

나는 펄떡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청려에게로 팝업을 보냈다. 답신은 금방 돌아왔다.

 

[ 지하요. ]

[ 무슨 일 있었던 건 아니지? ]

[ 멀쩡해요. ]

 

그제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삼키고 패닉룸으로 향했다. 청려는 내가 도착하자마자 말끔한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그는 가벼운 차림으로 떠나서 꽤 무겁게 돌아온 채였다. 핫팩 스무 개와 지금 쓰는 것보다 조금 더 큰 미니 화로, 고체연료 같은 것들이 바닥에 놓여있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그가 터보 라이터 꾸러미나, 즉석밥을 꺼내자 나는 기함했다. 이런 걸 대체 어디서 구해왔단 말인가.

 

[ 어디서 난 거야? ]

[ 이 근처예요. 사람이 살던 집. ]

 

아, 그렇군.

 

[ 죽었냐? ]

[ 네. 손전등을 떨어트렸던 것 같아요. ]

 

고작해야 집 앞을 살피러 잠깐 나간 사이였을 것이다.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진 안일한 실수가 그의 목숨을 앗아갔다. 청려는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그의 시체를 발견하고 집안을 살핀 모양이었다. 내가 마트에서 죽은 이들의 가방을 가지고 온 것처럼 청려 또한 죽은 이가 남긴, 그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친 흔적들을 저 가방 안에 담아가지고 왔다. 덕분에 우리가 연명하게 될 것이다. 그 사람이 살아야 했을 시간만큼 더.

 

가슴이 울렁거렸다.

 

[ 몇 번 더 다녀와야 할 것 같아서 불렀어요. ]

[ 그러냐. ]

[ 제법 잘 모아뒀더라고요. ]

 

청려는 가방을 모두 털어낸 다음 빈 가방을 들고 패닉룸을 벗어났다. 나는 제일 가벼운 가방 하나만 둘러매고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끌어 그의 뒤를 따랐다.

 

[ 여기예요. ]

 

청려가 손으로 가리킨 곳은 정말로 여기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두 블록쯤 지나서 보이는 주택. 태양열 발전기까지 설치된 것을 보면, 괴생명체가 나타나기 전부터 이 집은, 집주인에 의해 잘 관리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로 끝이다. 거대한 발톱에 의해 대문이 뜯겨나가고, 나무 한 그루가 완전히 박살이 났다. 집주인은 목이 좌로 크게 긁혀 반쯤 잘려나간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발끝에 저 주검의 것이었을 손전등이 채이는 순간 나는 형용할 수 없는 구역감이 차올라 고개를 돌렸다.

 

더이상 목소리를 낼 수 없게 된 그날, 수십 수백의 죽음을 목격했다. 뱃가죽이 뜯겨 내용물을 쏟아낸 시체. 가슴의 반대편이 보일 정도로 큰 구멍이 난 시체. 오늘 다녀온 마트에서도 몇 구나 되는 시체를 보고 온 참이었다. 그런데도 왜.

 

청려의 손이 조심스럽게 어깨에 닿았다. 그냥 돌아가자는 것 같았다.

 

[ 괜찮으니까. ]

 

나는 구역질을 억누르며 고개를 젓고 문을 넘었다.

 

집안은 몹시 깨끗했는데, 기이할 정도로 지독한 냄새가 났다. 아직 채 다 가라앉은 속이 다시 한 번 들끓면서 구역질을 쏟아냈다. 차라리 게워내 버리는 편이 나을 것 같단 생각에 몸을 돌리려는 순간, 냄새의 근원지를 찾아냈다. 그것은 작고 마른 여자아이였을 것이다. 이미 부패한 시체가 새하얀 블라우스와 파란색 치마를 입고, 소리가 꺼진 텔레비전 앞에 앉아있었다. 그 어떤 채널에서도 방송하는 일이 없으니, 아마 DVD나 블루레이였을 테다. 나는 그런 텔레비전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누군가의 콘서트장이었다. 관객석을 가득 채운 사람들이 반짝이는 응원봉을 흔들었다. 뜨거운 조명이 내리쬐고, 소리가 없이도 환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그 강렬한 무대 한복판에 청려가 있었다. 아니다. 청려가 아니였다. 외형이 조금 닮아서 착각했다. 청려는 저 사람보다 더 대단한 존재였다. 셀 수 없이 많은 시간을 반복하여 종내엔 팬들과 아이돌의 우상이 된 존재. 그래, 청려는 아이돌인 너의 이름이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영원히 이루고자 했던 아이돌의 이름. 그리고 억지로 감추고 억눌렀던 작은 소원을 위해 기꺼이 등을 돌린 아이돌의 이름이기도 했다.

 

시체를 봤을 때보다 더한 충격이 머리를 뒤흔들었다. 겨우 버티고 서있던 무언가가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 Day 156? 157?

 

간밤에 꿈을 꿨다.

 

눈가를 태우는 뜨거운 조명. 돔의 가장 높은 곳까지 치솟는 환호성. 너무 보고 싶고 그리운 사람들이 나를 불렀다. 나는 그에 화답하듯 목소리를 폭죽처럼 터트리며, 노래했다. 이 모든 게 거짓말처럼 너무나도 생생한 원래의 내 삶이었다. 내가 끝내 거머쥐었던 소중한 나의 일상이다.

 

나는 눈앞의 것들이 소중해서 뒤에 선 누군가를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 Day ...

후배님 오늘은 195일째예요.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 Day 199

 

슬슬 날이 풀리기 시작했다. 다음 달부터는 다시 이 작은 패닉룸에 생필품과 식료품을 채워 넣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어쩌면 지금보다 더 안전한 장소를 찾아 이동을 해야 할 수도 있었다. 150일 차쯤부터 군대가 동원되기 시작했는지, 멀리서 폭음이 들리기도 했으니까. 그러니 우리는 언제 머리 위로 떨어질지 모를 미사일의 위험까지 감수해야했다.

 

그 모든 상황을 빠르게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근래에 나는 무기력증에 시달리며, 도통 써먹지 못할 놈이 되어있었다. 머리가 무겁고, 아침에 눈을 뜨기 힘들어졌다. 식욕이 떨어지며 점점 살이 빠지고 있다는 것조차 알아챘지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내게 주어진 이 시간을 감내하기만 했다.

 

청려는 그런 나를 굳이 일으켜 세우지 않았다. 언제든 내가 눈을 뜨면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책을 읽거나, 노래를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팝업으로 대화하는 일이 줄어도, 내가 잠들어있는 시간이 길어져도, 이 작고 고요한 지하실에서 우리는 언제나 함께였다. 그 덕분에 나는 괴로웠지만, 외롭지는 않았다. 그러나 청려는 이 상황이 충분히 괴롭고 또 외로울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내게 어떠한 요구도 질책도 하지 않았다.

 

너는 원래의 세상에서도 그랬다.

 

‘씨발.’

 

나는 결국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서 일어나 카펫 위를 걷는 동안 청려의 시선이 내게 따라붙었다. 나는 청려의 맞은편에 앉아 팬에 얇게 구운 핫케이크를 옆으로 치우고 물을 한 잔 쭉 들이켰다.

 

[ 넌 왜 밥 안 먹냐. ]

 

청려는 눈을 깜빡이며 나를 바라봤다. 설마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이틀 전부터 하나씩 비어가는 찬장과 하나씩 모아지는 쓰레기를 보며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잖아. 심지어 이 핫케이크조차 본인 손으로 직접 만들어 놓고 내 몫밖에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 만들면서 먹었어요. ]

[ 거짓말하지 말고.]

 

청려는 무미건조한 손길로 책을 덮었다.

 

[ 필요가 없어서. ]

[ 죽을 생각이야? ]

[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제가 아니라 후배님이겠죠. ]

 

청려는 몸을 일으킨 뒤, 그대로 계단을 올랐다. 그래야할 것 같아서 청려의 뒤를 따라가니, 청려는 금방 바스라질 것 같은 모습으로 거실 한복판에 서 있었다. 정확히 뭘 보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텔레비전 화면에 비친 자신일 수도 있고, 뒤따라온 나일 수 있다. 물론 텔레비전 옆에 놓여있는 노란 털뭉치의 사진일 수도 있었다. 나는 순간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누군가 귀띔해준 것이 아님에도 알 수 있었다.

 

[ 후배님, 우리 이제 그만 돌아갈까요. ]

 

왜.

 

[ 그냥. ]

[ 후배님의 노래가 듣고 싶어졌거든요. ]

 

그러며 웃는 청려는 진심으로 더없이 불행해 보였다. 너를 그렇게 만든 게 나라는 사실이 너무나도 끔찍해서 누군가 내 가슴을 난도질하는 것 같았다. 그 누군가는 연인을 옆에 두고도 외로움을 끌어안아야만 했을 과거의 너일 것이다. 뜨거운 통증이 가슴과 목을 가로질러 눈가가 시큰해졌다. 목을 쥐어뜯고 울음을 쏟아내고 싶었다. 아마 나보다 네가 더 그랬을 거다.

 

[ 넌 아이돌이야. ]

 

더없이 완벽하고 빛났던 겉과 달리 속은 진창일 만큼 갈구했던 삶일 것이다. 너는 그런 아이돌이었다. 네가 내게 응석 부리고자 하는 생각도 하지 못할 정도로 내 삶을 소중히 해주었던 만큼 나도 네 삶이 소중했다. 그런데 그게 너를 괴롭게 할 줄 몰랐다. 너를 그렇게 비참하게 만들 줄 몰랐다. 우리의 안전한 보금자리가 되어주었던 이 자그마한 감옥은 나의 죄였다. 나는 손바닥의 통증을 느끼며 주먹을 움켜쥐고 메마른 입을 벌렸다.

 

“신재현.”

 

약 200일 만에 낸 목소리가 또렷이 나아갔다.

 

“난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을 거다. 너도, 아이돌도.”

 

이 부끄러운 고백은 눈앞의 사랑하는 연인을 넘어 귀가 아주 좋은 무언가에게까지도 닿게 될 것이다. 눈밭을 가로지르는 달음박질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네가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아도 될 만큼 너의 모든 것을 좋아하고 있어. 그건 틀림없는 진실이다.”

“…….”

“그러니 현실에서 기다려.”

 

비명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꽉 안아줄 테니까.

 

“……그래요.”

 

청려는 눈앞에 튀어 오르는 피를 바라보며, 조그맣게 대답했다.

 

 

- Day 200

 

아, 이 얼마나 분수에 넘치는 확신이란 말인가.

 

신재현은 연인을 눕힌 침대에 천천히 몸을 뉘었다. 그는 지난 200일간의 시간이 존재하는 이 작은 감옥에, 어리석기 그지없던 이전의 자신을 남겨놓고 가기로 했다. 이제 그는 의심하고, 재단하고, 끝을 단정 지을 필요가 없었다. 연인에게서 받은 확신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신재현의 것이었다.

 

그러니,

 

“기다릴게요.”

 

신재현은 두 눈을 감으며 연인의 뺨에 키스했다.

 

[ Enjoy your daydream :) ]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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