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는다
박문대는 끝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이미 수차례 시도했던 일. 사람이 거의 드나들지 않는 건물 옥상. 누군가 이 장면을 목격한다면 지면 1면에 대서특필할 특종감이었으나, 박문대는 거침없이 달렸다. 생의 마지막 순간을 향해.
‘그럴 리가 있겠냐.’
타다다닥, 휙! 박문대는 시간을 달렸다. 시간을 뛰어넘어, 나를 기다리고 있을 너에게.
지금 만나러 간다, X새끼야.
작열하는 태양에 피부가 발라 벗겨지는 7월 초순. 초복을 막 지나 찌는 듯한 더위가 기승을 부릴 시기. 박문대는 지긋지긋한 알람 소리를 들었다.
띠디디딕-!
X발. 지각이다. 박문대는 달렸다. 아니 페달을 X나게 밟았다. 미친 선도부장에게 걸리면 X 되는 것이기에.
“오늘도 아슬아슬했네요.”
미친놈이 안 미친 척 고고하게 웃어대는 얼굴이 고깝다. 그 얼굴 잘 보여야 할 선생들에게나 보여주지. 왜 나한테 와서 지랄이냐. 속에서 천불이 나든 뭐든, 교문 앞에서 하늘 같은 선배님에게 대거리를 할 순 없으니 얌전히 고개만 숙이고 지나가려고 했다.
“아직도 생각에 변함이 없나요?”
“…네.”
“아쉽네요.”
좋은 기회일 텐데. X발. 작작 좀 하라고. 필요 없다는데 왜 자꾸 권유하는지 모를 일이다.
사건의 발단은 신입생 입학식 날이었다.
“박문대 후배님.”
신재현 놈은 이때도 속을 알 수가 없는 놈이었다. 당연한 말이다. 처음 봤으니까.
“네, 신재현 선배님. 무슨 일이신가요?”
오늘 처음 보는 놈이긴 했으나 이름 정도는 알았다. 당연히 명찰이 있으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눈에 띄는 사람이라 모르기 힘들었다. 입학식 날 3학년 학생회장도 아니고, 2학년 부학생회장이 재학생을 대표로 해서 신입생 환영사를 할 때부터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조용히 3년의 학업생활을 마치고 싶은 박문대 같은 놈이랑 상성이 최악이었다는 말이다.
“학생회에 들어오지 않을래요?”
그런데 대뜸 이런 망언을 지껄이다니. 그것도 푸릇푸릇 한 새순에 대한 호기심으로 학생과 교사 너나 할 것 없이 이목을 집중한 대강당에서 들을 첫 마디로 과해도 너무 과했다.
“정중히 거절하겠습니다.”
아. 인생의 황금기라는 고교 생활이 X 되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이었다. 한 번 거절했으나 사람 말귀 알아 처먹고 포기하면 좋으련만. 신재현은 포기를 모르는 놈이었다. 매일 아침 선도부에 별로 마주하고 싶지 않은 얼굴과 마주해야 했다. 저놈은 아침잠도 없냐. 번갈아 바뀌는 선도부원들과 달리 신재현은 항상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선도부장이란 것은 나중에 알았다. 아니 선도부장은 보통 가장 급 높은 놈들이 하지 않나? 3학년은 수능 때문에 학업에 집중하셔야 하기 때문에 2학년 부학생회장이 맡는다고 한다. 뭐 그런 개 같은 법이 다 있냐.
2학년 부학생회장의 열렬한 러브콜을 받는 건방진 1학년 신입생으로 낙인찍힌 박문대는 선배, 동급생들의 열렬한 러브콜 또한 같이 떠안게 됐다. 신재현의 추종자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왔다는 소리다. 뭐, 그렇다고 별문제가 생기진 않았다.
박문대도 한 성깔 하는 놈이었기에.
중학교 시절에 이미 성장통을 뚫고 천장으로 올라간 이세진과 선아현의 든든한 콜라보 합작이 함께 하게 된 여파도 쏠쏠했다. 초중딩 학창 시절을 허투루 보낸 건 아니란 소리다. 그래 애초에 이 두 놈이랑 친구 먹고 조용한 학창 시절을 바란 것부터가 난센스긴 했다. 워낙 시선이 몰리는 놈들이니. 어느 정도 감수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동급생들의 선망의 시선 정도를 상정한 거지, 전교생의 부러움과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정말로 학생회에 들어가야 하나.’
다른 동아리 활동에 흥미가 있다는 말로 거절했으나, 박문대는 딱히 부활동에 그리 열정적인 타입은 아니었다. 그나마 열의가 있어 먼저 문을 두드린 곳이 있다면 밴드부 정도. 그것마저도 선배란 놈들의 눈칫밥을 먹고 있는 판이니.
“하. X발. 돌아가고 싶다.”
“없던 일로 만들어 줄까요?”
헙. 출입 금지 팻말을 슬쩍 뛰어넘어 들어온 건물 옥상. 대답을 바라지 않은 혼잣말에 답이 돌아오자 박문대는 그대로 숨을 멈췄다.
“선배님께서 왜 여기에…….”
진짜로 여기서 신재현 놈을 볼 줄 몰랐다. 우둥생으로 소문난 놈이 왜 여기 있어?
“후배님이 여기 있길래.”
뭔 스토커도 아니고… 잠깐. 등줄기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설마 선도부라고 잡으러 온 건가. 박문대는 평화로운 고교 생활을 원했다. 출입금지 구역에서 선도부, 그것도 선도부장과 눈이 마주쳐서 교무실로 끌려가는 미래를 바란 적이 없었다.
“우리 거래하지 않을래요?”
X발. 제대로 X됐다.
짠. 후배님 왔어요.
결국, 박문대는 그대로 학생회에 납치됐다.
안녕하세요. 1학년 7반 박문대입니다.
야무지게 자기소개까지 하고, 방가 후 학생회 회의까지 참석한 후에 귀가하는 길이다. 하, X발. 이렇게 될 거면 거절하지 말걸. 당돌하게 선배의 제안을 거절한 1학년 신입생이 결국 학생회에 들어갔다. 소문이 어떤 방향으로 부풀어 변질될지 생각하자 박문대의 머릿속은 아득해졌다. 학생회에 끌려가는 정도로 끝났으면 인생 최악의 날은 면피했을지도 모른다.
“늘 자전거를 타나요?”
“네, 뭐. 그런 편이죠.”
귀갓길. 박문대는 이세진 놈이 늘 놀리는 티벳여우 표정을 한 채 신재현과의 대화를 지속하고 있었다. 하필 집 방향도 같냐. 그동안 선도부를 서야 했던 신재현 덕분에 모를 수 있었던 그다지 반갑지 않은 사실을 하나 더 알게 됐다. 역시 오늘은 박문대 인생 최악의 날이 맞았다.
“음. 여기서 갈라지나 보네요.”
그나마 다행인 건 같이 움직여야 하는 거리가 걸어서 10분 정도라는 것. 자전거를 타면 3분도 안 걸릴 거리다.
“그럼 잘 들어가요.”
오늘 즐거웠어요. 그렇게 말하는 신재현은 슬쩍 박문대의 어깨를 터치하고 지나갔다. 생각해 보니 신재현과 몸이 닿은 건 처음이었다. 늘 그렇게 가깝게 다가오던 놈이랑 옷깃 한 번 스친 적이 없다니. 아니 저놈이랑 닿아서 뭐 하게.
“네,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문득 내일 보자는 인사가 없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뭐, 별로 중요할 건 아니긴 하지. 그런 인사 따위 없어도 이제 늘 볼 수밖에 없는 관계가 돼버렸으니. 하. 한숨이 절로 터졌다. 방학이 얼마 남지 않은 시기였다. 무탈하게 이 시기를 넘겼다면 적어도 8월까지는 시달릴 일이 없었는데. 막판에 운도 더럽게 없지. 방학 내내 별로 반갑지 않은 공간에, 반갑지 않은 놈을 보러 가야 한다 생각하니 답답함이 차올랐다. 학생회가 가장 바쁜 시기를 꼽으라면 당연히 여름 방학일 것이다. 가을 축제 준비를 해야 할 테니까.
‘옥상엔 왜 올라가가지고.’
그나마 다른 두 놈도 끌고 올라가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덜컹. 박문대의 신세 한탄은 익숙한 내리막길 앞에서 멈췄다. 원래 박문대의 등하교 코스는 방금 신재현을 홀로 보낸 그 길이었다. 좀 빙 둘러 오는 루트긴 하나, 평지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야트막하다고 해도 오르막길이 있는 이 길을 온 이유는 순전히 신재현과 함께하는 숨 막히는 시간을 1초라도 빨리 끝내고 싶어서였다. 그래도 오르막길을 몇 번 이겨내고 나면 가파른 내리막길이 기다리고 있는 게 이 길의 장점이라면 장점이다. 그렇다고 이 한 여름에 딸을 뻘뻘 흘리면서까지 올 곳은 아니었지만. 올 때마다 한적해서 자전거에서 내리지 않고 속 시원하게 내달리던 내리막길에 와서야 자신이 자전거를 끈 채 여기까지 걸어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름이니 허벅지가 터져라 페달을 밟을 수는 없는 일이긴 한데 인식하고 걸어온 것과 그냥 어쩌다 보니 걸어온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는 법이다. 이래서 싫은 거다. 신재현과 엮이면 자신이 자꾸 정신을 차리지 못하니까. 박문대는 상념을 털기 위해 자전거 위에 올라탔다.
탁. 발을 굴려 자전거를 바퀴를 굴렸다. 바람을 갈라 쓸데없는 생각을 버리기 위해 자전거에 몸을 실었다. 핑그르르. 바퀴가 페달 없이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더 빠르게. 근질근질 양팔을 넓게 벌려 자유를 찾아 달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내리막길에서 브레이크에서 손을 놓는 행위는 위험했다. 박문대도 그 정도는 알았다. 저 골목에서 꺾어 들어가 어느 정도 속도가 줄면.
끼이익-!
어두운 골목길에서 무언가 불쑥 튀어나오는 모양이 보였다. 철컥. 브레이크가 헛도는 소리가 들렸다. 쾅. 벽에 부딪힌 시간이 슬로우 모션처럼 돌았다. 아. 이게 주마등이란 건가. 빌어먹을. 여기서 사고가 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이 길로 오지 않았다면. 시간이 늦어지지 않았다면. 옥상에 올라가지만 않았다면. 아침에 늦게 일어나지만 않았다면.
신입생 입학식 날 그놈 눈에만 띄지 않았다면.
평화로운 시간을 누릴 수 있었을까.
띠디디딕-!
헉! 박문대는 알람이 울리는 스마트폰을 손에 쥐었다. 부르르 부르르 떨리는 진동에 맞춰 박문대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뭐지?’
저승이라기엔 너무 낯익은 풍경이었다. 슬쩍 스마트폰을 화면을 켜자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하루 전으로 시간이 돌아와 있었다.
박문대는 이 기현상이 믿기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걸까. 정말로 시간을 되돌린 건가.
‘꿈일 수 있다.’
너무 생생해서 믿기지 않지만,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오늘도 아슬아슬했네요.”
꿈이라기엔 너무 똑같았지만. 박문대가 겪었는지, 꿈꿨는지 모를 것과 지금 대화가 너무도 똑같았다. 미래 예지? 타임 리프? 어느 쪽이든 가설만 존재했다.
확인할 방법은.
“음. 여기서 갈라지나 보네요.”
“네, 선배님. 조심히 들어가세요.”
조금 조급한 대답에 신재현의 고개가 기울어지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박문대는 페달을 밟았다. 모든 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박문대의 경험과 일치했지만, 그걸 겪는 박문대가 달라짐에 따라서 시간이 조금 어긋났다. 때문에 조급했다. 꼭 똑같은 시간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지만.
하아. 하아.
이왕이면 모든 변수를 통제해서 똑같은 조건에서 시작한다.
그게 박문대가 겪은 기이한 현상에 해답을 찾을 첫 단추일 테니까.
탁, 끼이이익. 둥! 띠디디딕-!
박문대의 일상이 전복되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박문대는 그날 무사히 다시 시공간을 뛰어넘었다.
그래서 박문대의 일상이 특별해졌느냐. 그건 또 아니라고 하기엔.
“후배님. 기획안은 다 작성했나요?”
예상과 달리 돌아가고 있긴 했다. 7월 중순. 방학이 시작된 후에도 박문대는 학교로 등하교 도장을 찍게 됐다. 정확히는 학생회실로 말이다. 박문대가 1학년 기획 부원이었으니까.
“음. 좋네요.”
약간 수정이 필요하겠지만, 이대로 가죠. 신재현은 역시 제 안목이 틀림없었다는 듯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실실 흘려댔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데 왜 이렇게 욕이 목 끝까지 차오르는지 모르겠다. 아니지. 1학년 신입에게 기획안부터 짜오라는 놈이니 욕 좀 먹어도 할 말 없지 않나? 웃기는 일이게도 이제 막 들어와 신입 중에서도 신입인 박문대는 그 누구보다 부학생회장 신재현과 엮일 일이 많았다. 한 마디로 따까리 신세를 못 벗어났다는 소리다. 처음 신재현에게 학생회 제안을 받았을 때 예상한 바이긴 했다. 일면식도 없는 1학년 신입생 대표에게 학생회에 들어오지 않을래요? 같은 제안을 한다는 건 너 내 밑에서 굴러 봐라 이게 아니면 뭐겠는가.
‘이래서 도망쳤던 건데.’
왜 여기서 이러고 있냐. 쏟아져 나오는 한숨을 막을 길이 없었다. 분명 옥상에서 마주치지 않았다. 시간을 돌린 이후로 옥상은 쳐다보지도 안 봤으니 당연한 소리다. 옥상에 올라가지 않는 것은 물론, 교실에 딱 들러붙어 앉아 어떻게든 무사히 방학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시간을 되돌려서라도. 그런데도 매번 학생회 엔딩이 나는 것이다.
덕분이랄지 그날 그 시간대가 아니어도 되돌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천운이었다. 아니었으면 그대로 벽과 한 몸이 된 자전거에 짓눌려 어디 한 군데쯤은 부러진 채 방학을 맞이했을 테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차라리 그게 더 나은 결말이 아니었나 싶다. 적어도 신재현이 양심이 있다면 자전거를 타다가 구른 가여운 1학년 학생을 이렇게 부려먹을 리는 없을 테니까.
‘미친 생각이지.’
겨우 사람 하나 피하겠다고 평생 후유증이 남을지 모를 사고를 당하겠다는 미친 생각을 실행할 정도로 돌아있진 않기에 상식적인 선택을 했다. 학생회에 들어간다는 결론은 똑같더라도, 저놈 마수에서 조금 더 자유로워지기 위해 제 발로 찾아왔다는 소리다.
매번 비슷한 패턴으로 학생회 문턱을 밟게 되는 게 지겹기도 하고. 돌아오는 횟수를 특정할 수 없으니 함부로 남발할 능력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은 길고 신재현과는 딱 1년 아니 반년만 참으면 서로 얼굴 볼 일 없이 지낼 수 있었다. 어차피 저놈도 3학년이 되면 수능 준비하느라 바쁠 테니까. 딱 반년만 이놈이랑 얼굴 마주하며 시간을 흘러 보내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환장할 놈이 거기서 멈추지 않은 것이다.
“후배님, 좋아해요.”
헥헥. 노란 털 뭉치가 기분 좋다는 듯이 신재현의 손을 타고 있는 모습을 구경하던 박문대는 갑자기 날아온 공격에 손에 들고 있던 공을 떨어트렸다. 왕! 통통 공이 바닥을 구르자 개 또한 바닥을 굴렀다.
맴- 매맴- 매애애앰-
마가 뜬 그 자리에는 잔디 깔린 정원을 나뒹구는 개 소리와 뜨거운 여름을 알리는 매미 소리만이 가득했다.
박문대는 그날 아주 오랜만에 시간을 돌렸다.
당연하다. 그놈에게 고백 같은 걸 들을 줄 몰랐으니까. 반사적인 반응으로 가장 가까운 건물 옥상으로 달려가 그대로 날았다.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렸다. 안 그래도 얼굴 마주하면 속 불편한 새끼. 마주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늘었다.
박문대는 신재현을 필사적으로 피하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단둘이 있을 상황을 만들지 않았다. 처음엔 고백받은 그 자리만 피하면 될 줄 알았다. 신재현의 집에 초대받아도 안 가면 그만이니 어렵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러나 다른 장소에서 같은 고백을 받았다. 박문대가 어떻게든 학생회에 들어갈 수밖에 없게 된 것처럼. 박문대가 별 수를 다 써도 고백을 받게 됐다. 붉은 실로 꽁꽁 싸매기라도 한 건지. 무슨 그런 젠장 맞을 운명이 다 있단 말이냐.
“후배님.”
됐다. 말하지 마라.
“무슨 말씀을 하실지 알겠으니까 하지 마시죠, 선배님.”
두 눈을 끔뻑끔뻑 뜨는 게 그걸 어떻게 아느냐는 표정이다. 모르겠냐. 매번 똑같은 어조로 말하는데. 덕분에 후배님 소리만 들어도 그다음 말을 예측하게 됐다. 이 새끼는 마주치기만 하면 얼굴부터 구기는 후배 새끼가 뭐가 좋다고 고백을 해대는 건지. 하. 드르륵. 창문을 연 박문대가 자신의 기구한 인생에 대해 생각했다. 입학하자마자 부학생회장에게 찍혀 전교에 얼굴이 팔리게 된 것도 억울한데, 이제는 그놈의 부회장님에게 고백을 받고 자살 소동을 벌이는 미친놈이 되게 생겼으니. 한숨이 절로 터져 나왔다. 그나마 위안이 된다는 건 아무도 이 사건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 정도인가. 평생 박문대의 가슴속에 묻을 흑역사, 아니 역사도 뭣도 아닌 허상의 과거가 될 것이다.
휙.
“후배님?”
순간 놀란 듯 떨리는 눈동자가 옆으로 스치는 것을 본 것 같았지만, 박문대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만약 이대로 떨어진다면 꽤 아플 테니까.
퍽!
“윽…….”
머리 위로 떨어지는 스마트폰의 무게가 꽤 묵직했다. 미간 사이를 문지르며 몸을 일으킨 박문대는 날짜와 시간을 확인했다.
‘또 돌아왔나.’
박문대는 지긋지긋한 하루를 다시 시작했다.
“후배님.”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가 시작될 것이라는 예측은 한 사람의 부름으로 인해 빗나갔다. 아슬아슬하게 지각을 면하고, 수업을 듣고 점심을 먹으러 가는 박문대를 신재현이 붙잡았다. 예의 그 후배님 소리로. 다만, 이번에 박문대를 부르는 목소리는 고백의 전조와는 어감이 달랐다. 아니 애초에 신재현의 고백은 8월 중순에 일어나는 일이었다. 한 여름날의 고백은 수능 준비로 유명무실하기만 한 3학년 학생회장 대신 축제 준비를 이끌어야 하는 2학년 부학생회장인 신재현과 얼렁뚱땅 실무를 담당하게 된 박문대가 지지고 볶다가 일어난 사고 같은 일이었으니까.
이 시기에 박문대는 학생회도 아니다. 이제 점심을 먹고 자원 입부 신청을 하거나 신재현에게 끌려가거나 둘 중 하나 일 텐데. 그렇다면 후자가 다른 때보다 더 빠르게 시작된 것일까? 하지만 박문대는 시간을 뛰어넘은 후에 특별히 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처음 겪는 패턴. 박문대는 오늘 아침 정신없는 와중에 확인한 어깨의 문신을 떠올렸다. 경고라도 하겠다는 듯이 붉게 타오르던 흔적.
“네, 선배님.”
박문대는 어떠한 예감에 평소와 달리 꽤 얌전한 모양새로 신재현의 부름에 응했다. 뚜벅뚜벅. 점심을 먹기 위해서든, 제 혈기를 쏟아내기 위해서든 제각기 흩어진 한적한 복도. 특히나 숨소리 하나 컨트롤해야 하는 3학년 복도를 지나쳐 온 곳은 바로 첫 순간, 박문대가 신재현에게 약점이 잡힌 그 옥상이었다. 처음 이후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은 박문대는 신재현의 인도에 따라 결국 이 자리에 다시 발을 들이게 되었다. 짧지만 어색한 대치 후에 먼저 말을 꺼낸 건 신재현이었다.
“시간을 돌리는 일은 도움이 됐나요?”
“뭐?”
“음. 이제 슬슬 알려줘야 할 것 같아서.”
그게 무슨 말이야.
“후배님.”
톡톡. 신재현이 자신의 어깨를 두드렸다. 박문대는 반사적으로 이상한 문신이 새겨진 부위를 가렸다. 어차피 옷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테지만 어쩐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이제 더 돌릴 수 없으니, 사고가 나지 않게 조심해요.”
역시. 여기 적힌 숫자가 타임 리프가 가능한 횟수였나. 박문대가 손을 짚고 있는 어깨는 처음 사고를 당하기 직전, 신재현의 손이 닿았던 부위였다.
“너 뭐냐.”
“음.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할까.”
차갑게 기울어진 음성에 실린 말은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미래에서 왔어요.”
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왔는데, 돌아갈 수 없게 돼서. 보고 싶은 게 무엇인지, 돌아갈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 말해주지 않았으나, 박문대는 자연스럽게 노란 털 뭉치를 떠올렸다. 축제 준비를 하기 위해 신재현의 집에 몇 번의 방문을 반복했다. 그때마다 그놈의 개와 조금 시간을 보내서 안다. 저놈이 얼마나 그 온기를 아끼는지. 시간을 돌릴 때 저놈이랑 쌓은 것들은 안 아쉬워도 그놈 개가 자신을 기억 못 하는 건 조금 섭섭할 정도로 애교가 많은 놈이니까. 뭐, 처음부터 유독 자신을 잘 따르는 놈인지라 걱정할 것도 없었다만.
“후배님이 그날 나랑 헤어지고 나서 사고를 당한 걸 알게 돼서.”
“허. 미안한 마음에 시간을 되돌리는 초능력이라도 주었다, 이 말입니까?”
“음. 그게 그렇게 되나.”
해를 등진 신재현의 얼굴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앞뒤가 안 맞는데.”
신재현과 박문대는 이 고등학교에 와서 처음 알게 된 사이다. 그런데 그런 놈을 위해서 능력을 선뜻 내준다고? 신재현이 미래에서 왔다는 소리보다 더 믿기 힘든 말이었다.
“그냥 찝찝하잖아요.”
자기랑 대화하고 사고 난 게 찝찝해서 시간을 돌리는 능력을 줬다. 일견 일 리 있는 말처럼 보이지만 이 또한 개소리다. 그럴 거면 그냥 시간을 되돌린 다음에 자신을 학생회에 데려가겠다는 억지를 부리지 않았으면 될 일이다. 아니면 하교를 같이 하지 않는다거나. 그랬다면 박문대가 굳이 신재현을 피해 한 여름에 오르막길을 오른다는 미친 짓을 하지 않았을 테니까. 아까부터 말이 안 되는 변명을 횡설수설 주저리는 놈을 노려봤다.
“그렇게 아무나 도와주다가 문제가 생기면 어쩌려고.”
SF 공상 영화나 소설에 나오는 타임 패러독스처럼. 누군가의 작은 날갯짓이 미래에 큰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위험한 행동이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함부로 누군가에게 줘서는 안 되는 능력. 그걸 신재현이 몰랐다고?
“하하. 후배님 똑똑하네요.”
아니 이 정도는 누구나 다 생각할 수 있거든. 저놈 가끔 개를 칭찬하듯이 당연한 행동에도 맞장구를 친다.
“나는 범죄자거든.”
“뭐?”
이건 또 갑자기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냐.
“이미 과거에 간섭을 해버려서 못 돌아가요.”
“무슨 말이냐.”
“사람을 한 명 구하고 싶었는데. 그게 잘 안돼서.”
박문대의 입이 딱 벌어졌다. 박문대의 생각대로 신재현은 시간을 뒤로 돌려 박문대를 학생회에 데리고 오지 않은 적도, 같이 귀갓길을 걷지 않은 적도 있다. 그러나 박문대는 매번, 매번, 그 길 위에 섰다.
몇 번을 반복해도 되지 않아서 능력을 넘겼다는 건가. 신재현이 왜 능력을 넘겼는지는 이해했으나, 여전히 근본적인 질문은 해결되지 않았다. 왜 하필 신재현은, 박문대를 살리기 위한 선택을 했을까.
“돌아갔어야 했었는데, 어느새 여름이 됐네요.”
신재현의 눈동자가 박문대를 스치듯 지나갔다. 너무 많은 여름을 반복했다.
“내가 욕심부리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일지도 모르니까.”
“그게 무슨 헛소리야.”
“사라지려니까 후임이 필요하더라고.”
알다시피 신임 받는 부학생회장이었으니까요. 웃는 얼굴이 꼴값이다. 그래서 뭐, 훌륭한 후배 하나 잡아다가 후학 양성 후에 홀라당 자리 내주고 떠날 생각이었다 이 말이냐.
“근데 말을 잘 안 듣던데.”
분명 좋은 기회일 텐데 왜지? 기울어지는 고개에 어이가 없었다. 미래에선 초면인 사람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기본예절도 안 가르쳐 주는 건가?
“음. 이런 일은 처음이라.”
조금 재밌다고 느꼈던 거 같네요. 얼씨구. 사람 속 다 태워먹고 재밌었다니 환장할 노릇이다. 이 미친놈 눈에 띈 내 잘못이지.
“그러다 문득, 후배님이랑 같이 축제를 보고 싶어졌는데.”
후배님은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아서.
아. 설마.
“너 네가 시간을 돌린 순간을 다 알 수 있는 거냐.”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그건 불가능하죠.”
이미 되돌아왔으니까.
“하지만 추측은 가능하지.”
고백을 한 사람은 바로 나니까. 검은 눈동자가 자신을 찌를 듯이 꿰뚫어본다. 첫 고백을 하는 신재현의 눈도 저랬다. 그 뒤로 반복된 고백 속에서 신재현은 지금과 꼭 닮은 눈동자로 박문대에게 진심을 내보였다. 박문대는 그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지웠다. 신재현의 고백을 없었던 일로 만든 것이다. 어렵게 내뱉은 소중한 마음을. 존재하지 않았던 일로.
시간을 되돌리는 일은 도움이 됐나요?
가벼운 말이 비수처럼 돌아와 꽂혔다.
“…….”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몰라 한참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신재현과 함께 한 시간이 싫었나? 그건, 아니었다. 정말로 그랬다면 시간을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거절을 했을 테니까. 박문대가 신재현의 고백을 받을 날, 시간을 되돌린 것은,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예상 경로를 이탈한 관계가 어디로 흐를지 알 수 없었으니까. 이 한 달간 쌓아온 관계가 신재현의 고백 후에 달라질까 봐. 아, 바보 같은 생각이다. 그건, 신재현과 함께 한 그 시간을 잃고 싶지 않다는 소리인데, 박문대가 스스로 시공간의 틈 속에 버려버렸다. 다시 쌓는다고 해도 같지 않을 시간을.
“…미안.”
“그게, 답인가요?”
신재현이 어느새 옥상 난간에 가까이 다가가 있었다.
“아니!”
다급하게 소리치는 모습에 신재현이 작게 웃었다. 지금 이 간절한 외침으로 대답을 대신하겠다는 듯이. 두근두근. 심장이 거세게 떨려왔다. 이대로 돌아가는 걸까. 아니면, 떠나가는 걸까.
“…이제 어떻게 할 건데?”
“글쎄요.”
답은 뻔했다. 이대로 돌아갈 것이 아니라면, 떠나야 했다. 아무도 신재현을 알 수 없는 곳으로 가서 새로 시작해야겠지. 누군가 신재현을 먼저 찾아간다면 그건 신재현에게 작은 평화를 앗아가기 위해서 일 테니까. 과거로 오고 싶을 정도로, 과거에 메어있을 정도로 소중했던 존재를 놓고 떠나야 함에도.
사람 목숨 한 번 살린 것에 대한 대가가 너무 크지 않은가.
박문대는 신재현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곧 아무것도 쥘 수 없게 될 손에 힘을 주며 다짐했다.
“날 기다려.”
“……!”
이미 지나간 과오를 수정할 수 없다면, 앞으로 찾아갈 미래에 즐거움이 되겠다고.
“네 개도 책임지고 데려다줄 테니까.”
날 기다려, 신재현.
“하하. 좋아요.”
기다릴게요, 미래에서. 박문대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진 마요. 바람결에 흔들리는 목소리가 박문대의 염원이 만든 환청인지, 정말로 신재현의 목소리였는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지금 당장은 말이다.
말뚝 박고 얌전히 기다려라, 신재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