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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의 너머에서 기다려줘

1.

“사랑해요.”

 

새하얗게 빛나는 햇살 아래의 너에게 말 했다.


 

 

2. 

눈을 떴다. 서늘한 공기에 어깨를 떨었다. 굉장히 슬픈 꿈을 꾼 것 같은데 안개꽃을 흩뿌려둔 마냥 희미하다.

그보다… 여기가 어디지. 낯선 곳이다. 어디선가 빗소리가 들린다 싶더니만 허름한 터널 끝에 앉아 비를 맞고 있었다. 소매 끝이 젖은 여름 가디건을 여미며 안쪽으로 몸을 물렸다. 그래봤자 자리를 조금 옮긴 정도라 바닥에 튕겨 올라오는 빗방울들은 계속 옷을 적셨다.

어쩌다 이런 곳에 떨어졌는지 알 수가 없다. 우선은 비가 그치길 기다려야 하나? 아니면 몸을 일으켜서 터널 안쪽을 둘러봐야 하나. 생각과 다르게 몸은 일어날 생각을 않는다. 팔다리가 뻐근한 게 꼭 깊은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왕!

 

불쑥 시야 끝에서 노란 덩어리가 튀어나왔다. 깜짝 놀라 바라보니 상반신보다 조금 더 큰 개다. 노르스름하게 잘 구워진 털에 헤벌쭉 웃는 얼굴. 뒤로는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고 있어 사람을 좋아하는 티가 난다. 난데 없이 등장한 개에 벙쪄 있으려니 터널 안쪽에서 발소리가 들린다.

 

“콩, 너 이럴래.”

 

엄한 듯 해도 속에 든 다정을 숨길 수 없는 목소리다. 애정 서린 타박 뒤로 바닥에 질질 끌려 있는 하네스줄을 집어들며 다가온 남자가 보인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헐렁한 여름 셔츠와 희미하게 이슬이 맺혀 있는 안경이다. 흐트러진 앞머리 사이로 눈이 마주쳤다. 남자의 걸음이 멈추고 차분히 가라앉아 있던 시선에 놀람이 번진다. 누구지. 역시나 모르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그대로 한참 서로를 마주보았다. 이따금 개가 헥헥 거리는 소리와 비 내리는 소리가 공백을 채울 뿐이었다. 침묵을 견디지 못 해 먼저 입을 연 건 앉아 있는 쪽이었다.

 

“…초면에 죄송하지만, 혹시 여기가 어딘지 아시나요?”

 

물안개 너머 환상 같은 여름의 시작이었다.


 

 

3.

“음… 그러니까 그쪽이랑 내가 부부 사이였다?”

“그래.”

“이 아이는 내가 결혼 하기 전부터 키우던 아이였고요.”

“콩이다. 신콩.”

“신콩…….”

 

신재현(남자-류건우-가 알려준 이름이다)이 멍하니 중얼거리며 저에게 안기려 드는 개를 쓰다듬었다. 터널에 계속 있겠다는 그를 류건우가 어르고 달래 집까지 데려올 때까지 의젓하게 옆을 지키던 게 거짓말인 양 현관을 넘자마자 신나서 떨어질 줄을 모른다. 프로펠러처럼 돌아가는 꼬리를 빤히 바라보던 신재현이 조심스레 소파 밑으로 내려와 앉았다. 콩이는 기다렸다는 듯 그의 품으로 고개를 꾹 박고 신재현이 작게 미소 지었다. 노란 온기가 퍽 달가웠다. 관리가 잘 된 털을 골라내며 신재현은 제가 들은 이야기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1) 자신의 이름은 신재현. 30대 초중반에 현재 직업 없음. 남자 왈, 아파서 요양을 했다는데 지금은 체감하기론 양호하다. 그래서 터널까지 혼자 나갔던건가. 남자는 간 떨어지는 줄 알았으니까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했다. 오래 누워있다보면 그럴 수 있지 않나? 뭐 어쨌든.

2) 남자의 이름은 류건우. 나이는 그보다 둘이 많으며 공무원. 현재는 개인 사정으로 휴직 중이다. 혹시 병간호를 하느라 그랬냐 물어보니 부정도 긍정도 않았다. 말 수가 적은 사람이다.

3) 노란 반려견의 이름은 콩이. 나이는 열살 남짓에 리트리버 믹스견. 관절을 생각해 산책은 조심해서 다니려 하지만 비가 오면 참을 수 없다. 사람을 무척 좋아한다.

4) 셋은 한 지붕에 사는 가족이다. 류건우와 신재현은 결혼한 지 2년이 된 신혼부부다. 축하합니다! 딴딴다단, 딴딴따단…….

 

당연하지만 설명을 들었다고 해서 모든걸 그렇군요 하고 받아들일 수는 없다. 신재현은 (류건우가 주장하는) 자신의 신혼집 거실을 크게 둘러보았다. 구석구석 어쩔 수 없이 노란 털이 묻어 있는 걸 제외하면 아주 깔끔하다. 폭우가 내리는 날씨에도 집안은 뽀송하기 그지 없으며 갈아입은 자신의 옷(역시 류건우의 주장이다)에선 향긋한 향이 난다. 한 마디로 ‘신경 쓴 티’가 많이 나는 공간이다. 신재현은 스스로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 했지만 이게 하루이틀의 정성으로는 꾸며낼 수 없는 풍경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말이지. 신재현은 이젠 제 허벅지 위에 턱을 얹고 잘 기세인 콩이의 귀 뒤를 긁적여주며 류건우를 올려다보았다. 두 발자국 정도 떨어진 채 둘을 구경하고만 있던 류건우가 왜 그러냐는 듯 눈을 맞춰온다. 잔잔하고 차분한 표정이지만 처음 터널에서 마주쳤을 땐 한참 넋을 놓고 있었다. 말로는 집에 있어야 할 사람이 혼자 터널까지 나와있길래 놀랐다고 했지만 막연하게 그 이상의 이유가 있을거란 짐작이 든다.

왜 그랬을까. 사랑해서 결혼까지 했다면서 왜 그런 얼굴로 날 바라봤을까. 궁금한 걸 참을 이유는 없으니 신재현은 곧장 물었다.

 

“증명이 필요해요.”

“뭐?”

“류건우… 씨랑 내가 정말 부부사이였다는 증거라든가, 옛날 이야기라든가. 알려줄 수 있는게 많이 남았잖아요?”

 

그러니 보여달라고. 눈 하나 깜짝 않고 요구하는 것에 류건우가 허 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익숙하게 TV 리모콘을 누르는 걸 보니 이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내 성격을 잘 알고 있네? 신재현은 일단 그가 자신을 오래 겪은 사람이라는 사실에 동그라미를 쳤다.

 

그 사이 단조로운 광고를 출력하던 TV 화면이 버튼 몇 번에 화려한 콘서트장을 띄운다.

하얀 탑조명 아래에 서 있는 네 명의 남자. 강렬한 비트의 반주와 동시에 일제히 춤을 추기 시작한다. 누구 하나 어디 빼놓을 곳 없이 훌륭하지만 이 순간 가장 돋보이는 건 중앙에 서 군무를 이끄는 장신의 남성이다. 카메라가 남성의 얼굴을 클로즈업 하자 신재현의 눈이 동그래진다. 화면 속의 남성이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재현은 전직 명실상부 전설로 남은 1군 아이돌 VTIC의 리더이자 메인댄서- 청려였다.

 

 

이후 몇 번의 무대 영상을 더 돌려보았다. 신재현은 한 손으론 콩이를 쓰다듬고 한 손으론 류건우의 팔을 붙든 채로 스크린 속 자신의 모습을 관찰했다. 머쓱해진 류건우가 감상을 물어보니 ‘완벽하네요.’ 딱 그 한 마디 뿐이었다. 언뜻 무심해보이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이다. 실제로 청려는 은퇴 후에도 활발히 언급되고 있는 아이돌계의 전설이자 우상의 화신이니까. 사람 꿰뚫어보는 건 천성이구나 싶어 류건우는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그리곤 자신과 함께 활동했던 멤버들을 궁금해하기에 그들의 본명과 가명을 번갈아가며 짚어주었다. 신재현은 기억을 되찾진 못 했으나 그 이름들을 발음하는게 제법 편하다는 감상을 남겼다.

 

“류건우 씨는 내가 인기 아이돌이라서 좋아했나요?”

“꼭 그것 뿐만은 아니지만… 네가 아이돌이었던 덕에 우리가 만날 수 있었으니까. 방금 네가 본 영상은 사귀기 전에 내가 찍은거다.”

“아, 어쩐지 초점이 집요하게 따라붙는구나 싶었어요. 아이돌과 팬… 흔한 조합인가?”

 

그걸 나한테 물어서 어쩌자는거야. 차마 대답하지 못 한 류건우는 다 봤으면 밥이나 먹자며 제 팔을 잡은 신재현을 식탁 앞으로 끌고갔다. 도저히 요리를 해먹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더니만 주방은 줄곧 그의 영역이었나보다. 조금 즐거운 기분이 든 신재현이 소리 없이 웃었다.

 

 

저녁 식사를 하고 콩이의 목욕을 돕다보니 취침 시간이 다 되었다. 아직은 낯선 안방 침대에 눕자 함께 들어왔던 류건우가 두꺼운 이불 하나를 챙겨 거실로 나가려 했다. 신재현은 의아한 낯으로 그를 붙잡았다.

 

“어디 가요?”

“...? 거실. 거기 소파 있으니까.”

“굳이? 원래 부부였다면서요. 난 상관 없으니까 여기 편하게 누워요. 그게 아니면 혹시…”

“잠깐. 무슨 말 하려는지 알겠으니까 그만 해라.”

 

다급하게 신재현을 도로 눕힌 류건우가 의자 하나를 끌고 와 그의 옆에 앉았다. 왜 눕지 않고? 한쪽 눈썹을 들어올린 표정이 그렇게 말 했으나 류건우는 모른 척 했다. 꼼꼼히 신재현의 몸 위로 이불을 덮어주고 슬쩍 뺨에 손등을 얹어 열을 확인했다. 아까 터널에서 비를 맞은 게 아직도 걱정인가보다. 그게 아니면 의식하지도 못 한 새에 간호할 때의 버릇이 나왔든가. 어느 쪽이든 나쁘지 않아 신재현은 잠자코 얌전한 아이인 척 그의 챙김을 받았다. 잠시 류건우의 왼손 약지에 자리한 반지에 시선을 두던 그가 말했다.

 

“연애 할 때 이야기도 해주면 좋겠어요.”

“.......”

“오늘 보여준 건 결국 대외적인 모습의 나잖아요. 대중이 사랑한 청려. 그러니까… 류건우 씨의 신재현은 어땠나 궁금해요. 나였으면 남편이 하루아침에 기억을 다 잊었다고 하면 그런 걸 먼저 설명했을텐데요.”

 

그러니 당신이 수상하고 궁금하다는 말은 부러 하지 않았다. 낯선 곳에선 잠이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오늘 하루가 고되긴 했나보다. 슬슬 가물거리는 눈을 저항 없이 감으며 신재현이 속삭였다.

 

“왜 내가 건우 씨를 기억하지 않았으면 해요?”

 

이내 새근거리는 숨소리만 남는다.

끝까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던 류건우는 멍한 눈으로 신재현을 바라보다 곧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양손에 고개를 묻었다. 내내 참았던 감정이 터져 무너졌으나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진득하게 눌러붙은 우울과 이 상황에 대한 경악과 공포 그리고… 어찌할 도리 없이 깨달아버리는 사랑. 여전히 그의 숨을 틀어쥔 사랑.

 

왜 기억하지 않았으면 하냐고? 당연한 이야기다.

 

류건우와 신재현은 2년 전 결혼했다.

신재현은 바로 그 다음 해의 여름에 죽었다.

 

‘1년 뒤의 장마와 함께 돌아올게요.’

 

그 말만을 남기고서.


 

 

4.

[어제부터 시작된 올해 장마는 최대 3주 까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며……. ]

 

빗소리는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간단한 아침 식사 뒤 류건우는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신재현은 콩이와 이런저런 놀이를 하며 창 밖을 구경하는 중이다. 작은 마당에 핀 꽃의 이름을 떠올려보려 애를 쓰는데 문득 거실 한쪽 벽을 채운 사진들이 눈에 들어왔다.

사진이 생기는 대로 손 닿는 곳에 이리저리 붙여둔 듯한 모양새다. 비중으로 따지자면 1등 신재현 2등 콩이 3등 류건우다. 콩이와 신재현이 찍힌 사진은 한 눈에도 잘 찍은 티가 나는데 류건우의 사진은 하나 같이 초점이 엇나가 있거나 구도가 애매하다. 누구 솜씨인지 잘 알겠다.

 

신재현은 중앙에 붙어 있는 사진을 떼어냈다. 투명한 우산을 쓴 채 웃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다. 사진을 챙겨 류건우의 옆에 앉으니 작은 화면에 몰두해 있던 그가 흠칫 놀라 돌아보았다. 아랑곳 않고 그의 코앞에 사진을 들이밀고 흔들었다.

 

“이건 언제 찍은 사진이에요?”

“…결혼하기 직전 여름일걸.”

“역시 건우 씨가 찍은 거구나. 내가 비 오는 날을 좋아했나요?”

 

류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콩이가 둘의 다리 틈을 파고들어 몸을 부비고 있었다. 목덜미를 살살 긁어주니 헤벌쭉 표정이 풀어진다. 신재현이 사랑스러운 것을 보는 눈을 하며 웃었다.

 

“원래는 날씨 같은 거에 호불호가 없어보였는데… 언제부턴가 좋아하더라고. 비 오는 날엔 항상 산책 나갔어. 그러다 쫄딱 젖으면 감기 걸린다 했는데도 말도 안 듣고.”

“하하, 처음 눈 떴을 때 터널에서 그러고 있었던 걸 보면 신빙성은 있네요. 그럼 오늘도 산책 가도 돼요?”

“아니.”

 

반은 농담으로 꺼낸 말에 정색을 하며 대답한다. 갑자기 손목을 콱 틀어잡은 손에서부터 희미한 떨림이 느껴진다. 신재현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류건우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아차 한 표정이 된 그가 손아귀를 느슨하게 만들었다. 엄지 끝으로 조심스레 신재현의 손목 안쪽을 문지르고 변명하듯 덧붙였다.

 

“기억도 없는데 나갔다가 길이라도 잃으면 어쩌려고.”

“건우 씨가 같이 가주면 되죠?”

“난 오늘 별로 외출하고 싶지가 않다. …아니면 마당까지만이라도 나가볼래?”

 

아닌 척 눈치를 살피는 게 꼭 사고 친 대형견 같다. 안절부절 하는 류건우와 달리 태평한 생각이나 하던 신재현은 고개를 저었다. 대신 얇은 눈웃음을 짓고 그의 옆에 붙어 앉으니 무뚝뚝한 얼굴에 금이 간다. 신재현은 제 손목을 문지르던 류건우의 손을 마주 잡았다. 손끝에 얇은 금속의 감촉이 걸린다. 그러고보니 자신의 반지는 어디에 있을까.

 

“생각해보니까, 건우 씨가 해주는 이야기를 듣는 게 더 재밌을거 같네요.”

“.......”

“해줄거죠?”

 

네?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고개를 기울이니 잠시 눈을 흘기던 류건우가 한숨을 쉬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이렇게 파고든다면 앞으로 마냥 덮어두기가 힘들것이라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신재현이다. 어설프게 둘러댔다간 금세 눈치채고 찔러들어올테지…….

 

거기까지 생각한 류건우는 아침 드라마를 송출하던 TV의 전원을 껐다. 짧은 정적 사이에 말을 고른 그가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5.

20대 초중반. 신재현은 한참 주가가 폭등하고 있는 인기 아이돌 청려였고 류건우는 그를 자주 쫓아다니며 사진을 찍던 데이터팔이였다. 청려는 이미 그 때부터 아이돌로서 최고의 실력과 그에 걸맞는 이미지를 쌓아둔 상태였다. 작은 논란이라도 구설수에 오른 적이 없어 그의 팬들은 자주 ‘천년돌’이라거나 ‘아이돌의 별 아래에서 태어났다’는 말을 중얼거리곤 했다.

류건우는 그들만큼 청려에 대해 알지 못 했으나 이따금 렌즈 너머로 눈이 마주치는 순간에서 그가 자신을 알아본다는 걸 어렴풋이 짐작했다. 스쳐지나가는 표정 사이로 저 나름의 청려를 상상했다. 처음의 둘은 그렇게 가까우면서도 먼 사이였다. 서로를 인식하고 있으나 말 한 마디 섞지 못 하는 관계. 어딜 가나 있을 법한 아이돌과 팬 사이.

 

그런 두 사람의 첫 대면은 지금 생각하면 좀 엉뚱했다. 류건우의 대학 졸업 후 공무원 시험 준비에 들어가기 직전의 어느 날이었다. 슬슬 데이터팔이 일도 접을 생각이었던 그가 마지막으로 촬영한 무대의 데이터를 점검하던 중 불쑥 앞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청려였다.

 

‘안녕하세요. 저희 무대 자주 보러 오시죠?’

 

코앞에서 손을 내미는 연예인에 당황한 나머지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이름과 번호가 뜯겨있었더라… 라는 게 류건우의 주장이다. 더 기가막힌 건 신재현은 본인 연락처는 남겨놓지도 않았다는 점이었다. 류건우는 일반인의 신상을 일방적으로 털어간 1군남돌 리더에 대해 커뮤니티 글을 남길까 고민했으나 의미 없는 일이라는 결론을 짓고 빠르게 털었다. 잠깐 변덕이 들었나보지. 남자 아이돌을 찍는 남자 팬은 드무니까 신기했던걸 수도 있고.

이후로 류건우는 수험 생활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런 걸 더 신경 쓸 여유도 없었다. 그렇게 데이터팔이와 아이돌로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 지나갔다.

 

“그게 끝? 그럼 사귀는 건 언제 한건데요? 결혼은 어쩌다 하게 됐고요.”

“조금 더 얘기를 들어봐라. 아직 남았으니까.”

 

류건우 공시생 생활 2년차. 첫 시험에 떨어지고 곧장 다음 해의 시험 준비에 한창인 초겨울이었다. 그 쯤의 류건우에겐 VTIC은 물론 모든 연예인들의 근황이 종종 가는 국밥집 TV에서나 볼 수 있는 조각 정보에 그쳤는데 어느 날은 세상이 온통 시끄러워 모를 수가 없는 소식 하나가 귀에 들렸다. VTIC의 메인보컬이라는 놈이 클럽에 갔다 사고를 쳤단다.

류건우는 사고를 친 당사자보다 청려의 얼굴을 먼저 떠올렸다. 2년 전 홀연히 연락처를 뜯어갔던 그 잘생긴 아이돌. 그러고보니 남의 번호를 가져가놓고 연락 한 번 없구나 싶었으나 제 쪽에서 뭔가를 할 방법도 생각도 없었기에 대충 신경을 끄려 했다.

 

그날 밤 허름한 빌라촌 사이를 유유히 걸어다니는 청려를 마주치기 전까지… 는 그랬다는 소리다.

 

멤버 전원이 한동안 연대 책임과 자숙의 의미로 조용히 있을 거 같더니 왜 여기에? 물론 류건우가 살던 그 동네가 워낙 외진 곳에 있어 인적도 드물고 조용하긴 했다. 뭐라 말을 붙이기도 전에 (사실 도망가려던 건 아니었고요? / …아니다.) 류건우를 발견한 신재현이 아는 체를 했다.

 

‘류건우 씨, 여기 있었네요. 이 동네는 건물 이름이 제대로 안 적혀 있어서 헷갈리던 참이었는데.’

‘…절 찾으러 온겁니까?’

‘네. 역시 류건우 씨 생각이 계속 나더라고요. 이제 연습생 안에서는 더 쓸 패가 없으니까, 한 번 쯤은 시도해봐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혹시 노래는 잘 하나요?’

 

끊임 없이 말을 쏟는데 알아들을 수 있는 게 한 마디도 없었다. 류건우는 우선 그를 제 집안으로 들였다. 청려는 내내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으나 눈은 까맣게 죽어 있어 꼭 터지기 직전의 시한폭탄 같았다. 하긴 정신 나간 놈 하나 때문에 열심히 쌓아온 커리어가 하루 아침에 무너지게 생겼으니 제정신인 게 이상한건가? 어쨌든 류건우는 눈이 휙 돌아간 청려를 진정시키려 했고,

 

“그대로 눈 맞아서 키스까지 하고 보냈다? 젊었네요.”

“야 넌 무슨 표현을 그렇게…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자세히 말 하면 오늘 안에 못 끝낸다.”

“음, 그래요. 그렇게 썸이 잘 발전되어서 연애도 하고 결혼도 했다는건가요.”

 

그렇다. 그 후 류건우와 청려는 소위 말하는 ‘썸 타는 관계’가 되었다.

정신을 다잡은 청려는 문제의 메인보컬을 손절 치고 아득바득 VTIC을 정상의 자리에 되돌려 놓았다. 류건우는 가끔 찾아오는 그와 밥을 먹거나 키우는 강아지를 돌봐주고 늘어놓는 말을 들어주기도 하며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갱신했다. 바쁘게 몰아치는 삶 속에 서로가 서로의 특별이 되는 건 자연스러운 순서였다. 청려는 류건우 앞에서만 신재현이었고 류건우는 곁에 있는 것 중 제일 예쁘고 귀한게 신재현이었다. 그러니 사랑했다. 생각보다 평범한 과정이었다.

 

신재현은 종종 의중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아이돌을 하고 싶었던 적은 없냐 물었다. 류건우는 처음엔 당연히 없다고 대답했는데 질문이 몇 번 반복되니 아리송해지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면 왜 하필 아이돌 데이터팔이였을까. 어쩌면 나도 모르는 새에 동경을 했을 수도 있지. 거기까지 사고가 닿으니 조금 슬퍼질 것 같아서… 어느날부터는 신재현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신재현도 더는 묻지 않았다.

둘은 서로의 특별이었으나 이따금 그런 식으로 거리를 자각하는 순간들이 생겼다. 류건우는 신재현과 자신 사이에 벌어진 틈을 마주칠 때마다 아득한 예감을 느꼈다. 자칫하면 발이 빠져 영영 절뚝거릴것 같은 예감. 이미 저 멀리에 있는 신재현을 두 다리로 쫓기에도 버거운데 다친 발을 안고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도저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어떻게든 틈을 메워줄 발판을 찾고 싶었다. 할 수 있는 건 공부뿐인지라 최선을 다해 매달렸다.

 

그리고 류건우는 그 해 공시 최종 면접에서 떨어졌다.

 

틈 사이로 다칠 바엔 여기서 그만두는 게 좋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어 신재현과의 연락을 끊었다. 오래 써온 전화번호를 갈아치우고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일방적인 관계의 종언 선언이었다.

 

2주쯤 지나서였을까. VTIC이 무사히 월드 투어를 끝냈다는 기사를 보고 있는데 누군가 그의 현관을 두드렸다. 똑똑.

 

‘건우 씨, 안에 있어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신재현은 그대로 한참 더 문을 두드리고 류건우의 이름을 부르다 돌아갔다. 점점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류건우는 당장 문을 열고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을 짓눌러야만 했다.

동시에 안도했다. 신재현이 도어락을 눌러보진 않아서. 원룸 비밀번호까지 바꾼 걸 알면 상처 받을테니까……. 우습네. 네가 신재현의 뭐라고. 고백은커녕 희미하게 쥐고 있던 자격까지 제 손으로 밟은 주제에 할 걱정이 아니었다.

 

그렇게 류건우와 신재현은 이름 없는 관계에 쉼표를 그렸다.

 

“…….”

“…그렇게 쳐다봐도 해줄 말이 없다. 그 땐 내가 좀… 힘들었어서. 도망치는거 말고는 아무것도 안 떠올랐어.”

“도망친 걸 뭐라고 하려는게 아니었는데요. 무서우면 그럴 수도 있지. 근데 그런 마음을 나한테는 한 번이라도 얘기해준 적 있었나요?”

 

류건우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저었다. 그 때의 그는 신재현의 입장 같은걸 헤아릴 여유가 없었다. 못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물었고 결국 혼자서 우울로 침몰했다. 어쩌면 그게 너를 더 외롭게 했을까. 답답해지는 기분에 더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바로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신재현은 턱을 괴었다. 이야기를 하는 내내 땅만 흘끔거리던 류건우는 이젠 고개를 들 생각이 없어보였다. 사람을 달래본 기억이 없는데 어쩌지. 짧게 고민한 그는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류건우의 손등 위로 제 손을 포갰다. 움츠러들려는 손가락을 달래듯 두드리니 긴장을 푼다.

신재현은 아직 제 이름 석 자가 낯설다. 류건우가 늘어놓는 과거도 남의 이야기를 듣는 마냥 멀다. 그럼에도 이 남자의 우울한 얼굴을 보고 싶진 않다. 그는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다정으로 속삭였다.

 

“그래도 결국 건우 씨랑 나는 평생을 약속한 사이가 됐잖아요.”

“.......”

“그런 시간을 겪었어도, 신재현은 류건우를 선택한거예요. 함께 하고 싶다고 생각한거죠. 삶에서 그런 사람을 만난다는 건 큰 행운에… 행복한 일이 아닌가요?”

 

잠자코 말을 듣던 류건우가 와락 신재현을 끌어안아왔다. 우는건가 싶었지만 그가 고개를 묻은 어깨는 축축하지 않다. 그저 뜨거운 숨이 몇 번 느껴졌을 뿐이다. 신재현은 어설프게 그의 등 언저리에 손을 얹었다. 그것에 안심이라도 했는지 고개를 더욱 깊게 묻은 류건우가 중얼거렸다.

 

“네가… 먼저 나를 찾아왔어. 다시는 그럴 일이 없을거라 생각했는데 현관문 앞에 네가 있었어. 전부 괜찮으니까 옆에 있고 싶다고, 그래달라고 말 했어.”

 

겨우 참고 있던 마음이 그렇게 터졌다고 류건우는 몇 번이고 고백했다.

이후로는 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결국 두 사람은 서로의 곁에 있겠노라 다짐하고 그에 충실한 나날을 보냈을 것이다. 한 번 무너진 자리가 더는 아프지 않도록 정성을 다해 메우며 틈을 줄여갔겠지. 그렇게 여기까지 왔다.

당신을 기억하지 못 하는 나라도 괜찮겠어? 그런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신재현은 눈을 감았다. 두근, 두근. 전해져 오는 심장 박동에 제 것을 천천히 맞춰보고 싶단 생각을 했다.


 

 

6.

터널에서 눈을 뜬 지 15일 째. 오늘은 어제보다 빗줄기가 가늘다. 조금 더 해가 뜨면 콩이를 데리고 산책할 수 있을거 같은데. 슬쩍 주방 안으로 들어선 신재현이 류건우의 등을 껴안았다. 스크램블 에그를 휘젓고 있던 류건우가 자연스레 그의 손에 깍지를 꼈다. 이런 스킨십이 자연스러워지는 데에 일주일이 채 걸리지 않았다. 류건우는 제 남편인 신재현에게 익숙했고 신재현은… 그냥 이게 편했다. 류건우와 손깍지를 끼는 것도 집안일을 나눠 하는 것도 콩이를 돌보는 것도 전부 자신의 일부였던 양 기껍기만 하다. 더는 자신이 그와 결혼했다는 걸 의심하지 않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기억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으나 이대로면 다 괜찮지 않을까. 기억에 없는 자신은 생각보다 낙천적인 사람이었을지 모른다.

 

“오늘 산책 나가는 거 어때요?”

“비가 덜 오는거 같으면. 콩이는 아직 자나?”

“아뇨, 거실 창문 앞에서 놀고 있어요. 그럼 오늘은 언덕 위까지 가보고 싶은데. 지난번에 가려다 말았잖아요.”

 

류건우는 그러자 대답하곤 가볍게 신재현의 이마 위로 입술을 눌렀다. 이제 식사를 해야하니 가서 앉아 있으라는 뜻이다. 보통 부부는 이런 것도 곧잘 알아듣나? 어디 물어볼 데가 없어 혼자만의 궁금증에서 끝난다.

 

두 사람의 신혼집은 작고 조용한 마을에 위치했다. 집과 집 사이가 멀고 사람이 많은 시내로 나가려면 차를 타야만 하는 시골 동네. 왜 이런 곳을 골랐냐 물으니 신재현의 전직이 아이돌이었고 요양에 도움이 되어서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집을 구할 때부터 득달 같이 달려드는 기자들과 스토커 등을 떼어놓느라 애를 먹었단다. 그래도 그 고생을 한 덕에 지금 콩이랑 마음 편히 산책도 나갈 수 있는거라며 류건우가 웃었다. 신재현은 괜히 검은 캡모자를 고쳐 썼다.

 

집에서 30분 정도 걸어나오면 작은 언덕 하나가 보인다. 경사가 제법 되는지라 빗물로 땅이 미끄러운 날엔 조심해야 한다. 아닌 척 신재현의 안전과 몸상태에 강박이 있는 류건우는 평소엔 올라가는걸 허락하지 않았으나 오늘은 비가 덜 오고 손을 꼭 잡고 가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쏜살 같이 뛰어가는 콩이의 뒤를 쫓아 오르니 넓은 풀밭과 한 가운데에 쭉 뻗어오른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왕! 콩이가 짧게 짖으며 나무의 뒤쪽으로 돌아 뛴다. 뭔가 있나 했더니 가지 끝에 매단 나무 그네다. 류건우는 콩이를 번쩍 들어 그네 위에 앉혔다. 콩이가 신이 나 꼬리를 흔들었다. 류건우가 앞뒤로 슬슬 그네를 밀어주고 콩이는 기우뚱기우뚱 균형을 잡는 게 익숙해보였다.

 

“우리 여기 자주 왔나봐요.”

“콩이 산책 하다보면 늘 여기나 반대쪽 터널로 향하는 길이어서. 애가 그네를 좋아한다.”

“그럼 난 늘 이렇게 둘을 구경하고요?”

 

밧줄을 밀던 손이 잠시 멈칫했다. 곧 아무렇지 않았던 양 다시 그네를 흔들었지만 신재현의 기민한 관찰을 속일 순 없었다. 신재현은 이따금 드러나는 류건우의 틈이 궁금했다. 잘 대답을 해주다가도 입을 다무는 순간과 묘하게 비껴나가는 시선은 왜 그런 것인지 묻고 싶었다. 한 번은 본격적으로 캐물어볼 생각에 말꼬리를 잡았는데 류건우가 꼭 땅에 생으로 묻힌 사람 같은 눈을 해서… 보류했다.

그는 자신의 부자연스러움을 자각하고 있을까? 신재현은 언젠가 류건우가 자신과 그 사이에 있는 틈을 보며 침잠했을 시절을 상상해본다. 그야 완전히 같을 순 없겠지만 이렇게라도 이해할 수 있다면,

 

“콩아!”

 

퍽! 몸이 강하게 밀쳐지는 느낌과 함께 신재현의 세상이 순식간에 뒤집혔다. 시야가 거꾸러지고 빗방울이 무자비하게 그의 얼굴을 때렸다. 반사적으로 찌푸린 눈 사이로 까맣게 흐린 하늘이 보인다. 어깨와 목 사이에서 따끔한 통증이 올라왔다. 머리 한 구석에서 기시감이 피어오른 건 그쯤이었다.

 

어라.

이거 어디선가…….

 

“신재현!”

 

뭔가를 더 떠올리기도 전에 다시 한 번 시야가 뒤집혔다. 양 뺨을 감싸오는 손바닥에 그제야 류건우가 쓰러져 있는 자신을 일으켰다는 걸 깨달았다. 신재현에게 몸통 박치기를 한 콩이는 제 잘못을 아는지 근처에 앉아 낑낑대고 있었다. 류건우는 상체만 일으킨 신재현의 앞에 주저앉아 그의 몸을 이리저리 살폈다. 놀라다 못 해 절박하기까지 보이는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던 신재현이 차분하게 그의 양 팔을 짚었다.

 

“나 괜찮아요, 건우 씨. 풀밭이라 어디 세게 부딪히지도 않았는걸요.”

 

류건우의 표정이 왈칵 일그러졌다. 신재현의 뺨을 쥔 그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제발… 왜 그렇게, …손 계속 잡고 있으라 했잖아. 넌 진짜 내 말은 안 듣지…….”

 

균형을 잃고 쓰러진 건 자신인데 왜 그가 저 아래로 떨어졌을까. 간헐적으로 떨리는 어깨를 쓸어주다 너머의 콩이와 눈이 마주쳤다. 조금 멋쩍은 기분이 들어 미소만 지어보이니 콩이가 슬쩍 둘의 옆에 붙어 몸을 기대왔다. 비에 쫄딱 젖은 채로도 따뜻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욕실로 등을 떠밀렸다. 얼른 따뜻한 물로 샤워하지 않으면 제 손으로 씻겨줄 기세여서 (사실 신재현은 그것도 괜찮지 않나 생각했다. 부부끼리는 흔한 일 아닌가?) 저항은 안 했다. 한껏 온수를 끼얹고 욕실을 나서려는데 바깥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TV를 틀었나? 그렇다기엔 묘하게 소리가 가깝고 간간이 류건우의 목소리가 섞였다. 신재현은 샤워가운을 꽉 여민 뒤 바깥에 얼굴을 내밀었다.

 

“건우 씨? 누가 왔어요?”

 

허억. 누군가 크게 숨을 들이켰다. 현관문을 막듯이 서 있는 류건우의 너머로 남자 셋이 보였다. 신재현은 그 얼굴들을 알았다.

 

청려의 전 직장 동료, VTIC의 나머지 세 멤버였다.

 


 

7.

지옥 같은 침묵이 있다면 지금 이 상황을 말하는거겠지.

채율은 빠른 눈짓으로 제 옆에 앉은 신오에게 말을 걸었다.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좀 해봐!’ 신오가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저었다. 격렬한 거부 의사에 그 너머에 앉아 있는 주단에게 시선을 돌렸다. 평정심에 있어선 셋 중 탑을 달리는 막내는 무표정하게 답했다. ‘저희가 할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으악!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으로 머리를 감싸다 맞은 편에 앉은 류건우와 눈이 마주쳤다. 평소와 비슷하게 뚱한 표정이지만 눈빛만은 싸늘하다. 화가 단단히 난 게 분명했다. 억울했다. 자신은 분명 조만간 집에 들르겠다 연락을 했다. 다시 되짚어보면 류건우는 끝까지 괜찮다는 말만 했고 그게 아마 거절의 의미였던거 같은데 어쨌든. 맹세하건대 자신들은 순수한 호의로써 찾아왔을 뿐이다. 이맘 때가 그들의 옛 리더이자 류건우의 남편이기도 한 신재현의 기일이라 걱정이 됐단 말이다.

 

그래, 신재현의 기일. 바로 그 부분이 문제였다. 1년 전에 죽은 형이 이곳에 있다는 게 말이 되는가?

 

“다들 비를 맞고 오느라 그런가 안색이 안 좋네. 이거라도 마셔요.”

 

라고 말 하며 손수 오렌지주스를 한 컵씩 챙겨주는건? 그리고 류건우의 옆에 반듯하게 앉아 미소를 지어보이는건??

 

채율은 혼미한 정신을 애써 가다듬으며 오렌지주스를 원샷했다. 나탈X스 플X리다 오렌지 주스… 내가 이거 좋아했는데 형 기억해요? 하루에 300ml 짜리 한 컵 이상은 못 마시게 해서 더 좋아했어……. 난데 없이 울망한 표정을 짓는 채율에 신재현이 당황하고 신오와 주단이 식은땀을 흘렸다. 그 광경을 다 지켜보고 있던 류건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셋 다 따라 들어와라.”

 

동시에 기립한 세 사람은 류건우를 따라 우르르 손님방으로 들어갔다. 졸지에 혼자 거실에 덩그러니 남은 신재현은 제 다리에 고개를 부벼오는 콩이의 목덜미를 쓰다듬어주며 고개를 기울였다. 이건 역시 뭔가가 이상하지?

 

 

네 사람은 1시간이 다 되어서야 해산했다. 도대체 그 좁은 곳에서 남자 넷이 할 얘기가 뭐가 그렇게 많다고. 오늘은 늦었으니 저녁 먹고 잘 준비나 하라는 류건우의 뒤로 세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가장 먼저 시선이 닿은 신오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든다. 채율은 왜인지 눈가가 조금 부어 있었고 주단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얼굴이었는데 류건우가 틈을 주지 않았다.

다섯은 지옥의 침묵 속에서 식사를 마치고 그대로 안방과 손님방으로 나뉘어 들어갔다.

 

“내가 더 얘기를 해봐야 하는거 아닌가요.”

“무슨 얘기? 지금 네 상황은 내가 다 말 했으니까 괜찮다.”

“좀 주눅 들어 있던데, 혹시 혼냈어요?”

“...그런 거 아냐. 다음부터는 미리 연락 하고 오라고 몇 마디만 했지. 얼른 눈 감고 자라. 아까 넘어진 데는 안 아파?”

 

머리를 살살 쓸어주며 속삭이니 더 물을 수가 없다. 별 수 없이 신재현이 눈을 감고 류건우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든 세 녀석을 진정 시키고 당분간은 신재현이 죽은 사람이라는 티를 내지 말아달라 신신당부를 했다. 신재현과의 대화는 우선 녀석들도 자신도 머릿속이 진정된 후에 해도 늦지 않다. 한숨 자고 나면 태도도 한결 자연스러워지겠지. 혼자만의 결론을 낸 류건우는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바뀔 쯤 신재현이 다시 눈을 떴다.

 

 

똑똑. 문을 두드리자 안쪽에서 작게 소란이 인다. 쿵 소리도 들리는게 누가 침대에서 떨어진 것 같은데. 인내를 갖고 기다리니 손바닥 정도로 열린 문 틈으로 당황한 신오의 얼굴이 보였다.

 

“형…?”

“잠깐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 안으로 들어가도 될까?”

“어어 물론이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침투한 신재현은 느리게 방을 훑었다. 자기가 문을 열어줬으면서 동공을 떨고 있는 게 신오. 베개를 껴안고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있는 게 채율. 그 아래 어정쩡하게 엎어져 있는 게 주단. 침대에서 떨어진 게 쟤구나. 무대 영상에서 봤던 모습들과는 사뭇 다르다.

신재현은 근처에 있던 의자에 앉아 제 턱을 두드렸다. 톡톡톡톡. 그게 생각할 거리가 있을 때 나오는 버릇이란 걸 아는 세 동생은 긴장한 얼굴로 형의 말을 기다렸다.

 

“돌려 묻는 것보단 이게 낫겠네. 내가 죽은 지 얼마나 됐지?”

 

허어어억. 다리에 힘이 풀린 신오가 주단 옆에 주저앉았다. 채율은 안색이 새파래진 채 베개를 쥐어뜯었다. 주단은 깍지를 낀 손으로 제 입을 가리며 차분하게 대꾸했다.

 

“알고 계셨군요, 형.”

“건우 씨가 투명한 사람이라… 그럴지도 모르겠다 생각했을 뿐이야. 방금 너희 덕에 확신 했고. 그래서 대답은?”

 

잠깐 망했다 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갔으나 주단은 평상심을 유지했다. 기억이 전혀 없다더니 사람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실제로 의자에 앉아 내려다보고 있긴 했다) 태도는 자신들이 알던 그대로다. 그렇다면 이쪽 또한 예전 모습 그대로 예우하는 게 도리 아니겠는가. 주단은 두 형들에게 눈짓을 하곤 1열로 침대에 올라 앉았다. 어서 이야기를 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이는 그에게 세 사람은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전설의 아이돌 청려는 2년 전 은퇴를 선언했다. 대외적인 사유는 건강 문제로 전부터 슬슬 복선을 깔아둔 게 있어 큰 논란은 없이 명예로운 은퇴 무대를 했다고 한다. VTIC은 해체하지 않았다. 청려는 더는 무대에 오르지 않았지만 간간이 채율의 SNS에 함께 찍은 셀카가 업로드되거나 솔로 활동을 하는 주단에게 곡을 선물하거나 연기를 시작한 신오에게 선물을 보내는 등의 일로 근황을 알렸다.

은퇴 직후 류건우와 결혼을 한 사실은 당연히 비밀에 부쳤다. 식은 직계 가족들과 VTIC을 비롯한 소수의 지인들만을 초대하여 해외에서 올렸다. 두 사람은 류건우의 직장과도 가까운 시골 마을로 신혼집을 마련하여 아름다운 자연의 기운을 벗삼아 사고의 후유증을…

 

“잠깐. 사고?”

“응. 4년 전이었나… 형이 교통사고를 당했거든요. 그거 때문에 일주일 정도 의식이 없었어요.”

“맞아, 그래서 걱정 엄청 했었지. 사실 외상은 크지 않았는데 깨어난 뒤에 간간이 두통이 있다고 하거나 체력이 점점 줄어들어서… 다들 사고 후유증이구나 했어요.”

“아마 뇌 쪽 문제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만, 검사를 해도 나오는 게 없어 자연 회복을 기대했던거죠.”

 

그러나 그게 잘 되지 않아 결국 1년 후의 여름에 세상을 떠났다.

 

류건우에게선 들은 적 없는 이야기다. 아팠다는 게 거짓말은 아니었군. 하지만 지난 2주 간 몸에 이상이 있다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죽었다 살아나니 회복된건가? 아니. 애초에 지금의 자신은 이곳에 어떻게, 무엇을 위해 돌아왔는지 알 수가 없다. 뭐 하나 명확하지 못 한 상황에 희미한 짜증이 솟았지만 티를 내진 않았다. 이 아이들을 추궁해봤자 달라지는게 없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신재현은 침묵했고 세 사람은 저들끼리 눈짓으로 무언가를 주고받았다. 이내 슬그머니 일어선 채율이 신재현의 양손을 꼭 잡으며 말을 꺼냈다.

 

“형, 너무 혼란스러웠죠? 미안해요. 근데 형이라면 숨기는 거 없이 전부 털어놓는 걸 바랐을거 같아서… 건우 형은 기다려달라 했어도요.”

“왜 사과를 하는지 모르겠는데. 먼저 듣고 싶다고 한 건 나잖아.”

“으응. 그럼 사과는 안 할게! 그리고 우리가 형한테 줘야 하는 것도 있어요.”

 

줘야하는 것? 의아한 눈빛으로 보니 어느새 제 가방을 뒤적거리던 주단이 조심스레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안에는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작은 열쇠가 들어 있다. 잠시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은 주단은 곧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설명했다.

 

“1년 전 형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저희에게 맡겨두신 물건입니다. 언젠가 나에게 돌려주러 와, 라고 하셨죠.”

“돌려주러 와달라고?”

“네. 우린 처음엔 형 납골함 옆에 둬야 했나 고민했는데, 돌려달라고 정확하게 말을 했으니까. 지금까지 우단이가 보관하고 있었어요. 오늘 형을 만나지 않았으면 건우 형에게 넘길 생각이었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형께선 일이 이렇게 될 걸 이미 알고 계셨을지도 모르겠군요. 어떤 매커니즘이 작용했는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만, 모종의 예지 현상을 겪으셨다거나…”

 

신재현은 열쇠를 손에 쥐어 보았다. 손바닥에 꽉 차는 금속은 금세 체온을 받아 따끈해진다. 신재현은 이 작은 열쇠가 모든 의문 해결이 시작점이 될 것이란 강한 예감을 느꼈다. 두근, 두근.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제 맥박이 선명하다. 이미 죽었다는 이의 것치곤 너무나 생생했다.

 

“돌려줘서 고마워.”

 

그제야 부드럽게 풀어진 목소리에 세 동생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신오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어디에 쓰는건지 알겠어요?”

“응. 마침 어제 발견한 게 있거든. 그리고 너희한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뭐든 들어줄게요!”

“형 부탁이라면 당연히 그래야죠.”

“최선을 다해 수행해보겠습니다. 기억은 없으시겠지만 저희가 형을 실망시킨 적은 별로 없으니까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치고 들어온다. 잠시 눈이 동그래진 그들의 형은 낮게 웃으며 세 사람을 모았다. 제 말 한 마디라도 놓칠세라 집중하는 모습들을 보며 신재현은 이들과 함께 한 아이돌 생활 또한 상당히 괜찮았을거란 생각을 해버리고 만다.


 

 

8.

다음날. 퉁퉁 부은 얼굴로 기상한 삼인방은 류건우에게 브런치를 얻어 먹고 1시간이 넘도록 콩이를 귀여워하다 바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신재현과 이야기 안 하고? 당황한 류건우가 물으니 씩 웃어보인 채율이 씩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새삼스럽게 회포를 풀 사이가 아니니까요!”

 

하긴. 신재현은 이제 계속 여기 있을테니 나중에라도 이야기 할 시간은 많을것이다. 나머지 둘 또한 채율의 말이 맞다는 듯 끄덕이고 있어 더 권할 게 없었다. 그대로 배웅을 하려는데 우물쭈물 눈치를 보던 신오가 말 했다.

 

“형, 혹시 저희랑 드라이브 안 하실래요?”

“…? 갑자기 무슨 드라이브.”

“그, 어제 나눈 이야기에 대해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궁금한 것도 있고…”

 

그러면서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나 있는 신재현을 흘끔거린다. 잘 알겠다. 그 앞에선 대놓고 꺼낼 수가 없는 화제니 따라와달라는건가. 그러나 신재현을 혼자 집에 두고 가는 것이 영 마음에 걸린 류건우는 선뜻 그러겠다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 고민을 읽은 신재현이 여상한 투로 말 했다.

 

“비도 많이 안 오는데 다녀오는건요? 콩이 바람 쐬면 좋아하겠네. 데려가요, 건우 씨.”

 

결국 류건우는 반은 VTIC 멤버들의 의지 반은 신재현의 권유 아래 짧은 드라이브를 하러 나섰다. 집 밖으로는 절대 나가지 말라는 신신당부를 5번째 들으며 신재현이 웃었다. 류건우의 뒤로 손을 이리저리 흔들거나 고갤 숙여보이는 세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잘 가. 작은 입모양을 알아들었는지 지난 밤에 그랬듯 울컥한 표정을 짓는다. 모른 척 배웅했다. 애써 벌어준 기회를 날려버려선 안 되기 때문이다.

 

비로소 혼자가 된 집. 신재현은 안방으로 들어가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서랍을 열었다. 작은 자물쇠가 걸린 상자가 있다. 열쇠를 꽂고 돌리니 부드러운 마찰음과 함께 열렸다. 반듯하게 접힌 편지 봉투가 들어 있었다.

신재현은 침대에 걸터 앉아 천천히 그것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9.

무언가 이상하다.

바쁜 신재현의 뒷모습을 보며 류건우가 생각했다. VTIC 삼인방이 돌아간 뒤부터 신재현은 집안 정리를 하나씩 해치우기 시작했다. 안방에 있는 제 옷들을 전부 꺼내 하루 종일 각을 맞춰 다시 개거나 콩이의 하우스와 장난감들을 탈탈 털어 털 정리를 하는 식이었다. 어제는 마당에 나가 화단을 손보려 하려는 걸 겨우 말렸다. 류건우가 대신 연장을 들고 신재현은 지켜보는걸로 극적인 합의를 봐 다행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정말 무언가 이상하다. 난데 없이 웬 대청소란 말인가. 류건우는 이제 막 거실 벽에 붙은 사진을 전부 떼어낸 신재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와르륵 테이블 위로 사진을 쏟자 새로운 놀이 시간으로 착각한 콩이가 신나게 뛰어왔다. 신재현이 콩이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산뜻한 목소리로 말 했다.

 

“5개만 골라봐요.”

“야, 너 왜 갑자기 청소를…”

“건우 씨랑 나, 콩이 독사진 하나씩에 다같이 찍은 걸로 두 장이면 되겠네요. 사진 찍는 기술 좀 잘 익혀둘걸 그랬어요. 건우 씨 사진은 다 초점 엇나가 있는 거 아나요?”

 

막무가내로 손에 사진을 쥐여주며 골라보라니 어쩔 수가 없다. 한숨을 삼키고 사진들을 천천히 넘겨보았다. 우산을 쓴 신재현, 콩이를 안고 벚꽃 구경을 하는 신재현, 그네를 타고 있는 콩이… 본인 사진은 툭툭 던져두는 것과 달리 성실한 태도였다.

신재현은 웃음을 참으며 그가 던져둔 사진들을 다시 주워 살폈다. 책을 손에 쥔 채 졸고 있는 류건우의 독사진이다. 구도는 애매하지만 그의 뒤로 난 창문 틈으로 햇살이 반짝거리는 것에서 셔터를 누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콩이가 왕! 작게 짖으며 신재현의 손에 들린 사진 끝을 물었다.

 

“콩이가 이게 마음에 든대요. 건우 씨 사진은 이걸로 해요.”

“오냐. 콩이 사진은 이게 좋을 거 같은데.”

 

한참 머리를 맞대고 이 사진 저 사진을 고르다보니 시간이 금세 가버렸다. 오늘의 저녁 메뉴는 뭘로 할까 고민을 하던 류건우는 제 어깨에 기댄 신재현을 내려다보았다. 사진 두 장을 양손에 쥔 채 번갈아보다 결국 마음에 드는 게 없었는지 고개를 젓는다. 이제 셋이서 찍은 사진 한 장만 고르면 되는데 마지막이라 그런가 까다롭다.

음. 작게 침음성을 낸 신재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안방으로 향했다. 뭘 하려나 싶어 따라가니 잡동사니를 넣어둔 상자를 뒤적거리고 있다.

 

“뭐 찾는데.”

“건우 씨 사진기. 마음에 드는 사진이 없으니까 지금 찍는건 어때요?”

“지금…?”

 

류건우는 현재의 제 착장을 점검했다. 깨끗한 여름 셔츠에 회색 면바지다. 샤워는 아침에 했으니 아직 멀쩡한 몰골이겠지. 신재현은 산뜻하지 않은 날이 손에 꼽을 정도니 상관 없다. 아이돌 폼은 은퇴 후에도 안 죽더라. 그에 질 수 없다는 듯 뽀송뽀송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는 콩이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신재현이 구석에 박혀 있던 카메라를 찾았다. 먼지가 얇게 쌓여 있는 것이 오랫동안 꺼내지 않은 티가 났다. 이젠 그 이유를 아는 신재현은 그러나 모른 척 하며 마른 걸레로 꼼꼼하게 카메라를 닦았다. 다행히 전원은 잘 들어온다. 류건우가 구석에서 삼각대를 꺼내왔다.

바깥은 비가 오고 있으니 이 안에서 제일 넓은 거실에 모였다. 콩이를 가운데에 둔 채 신재현과 류건우가 소파에 앉았다. 이것저것 시도를 해봤는데 역시 정석이 제일 좋다는 결론이었다. 신재현이 한 팔로 콩이의 목을 끌어안고 류건우는 신재현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하나 둘 셋, 찰칵. 경쾌한 셔터 소리가 지나가면 기다렸다는 듯 입을 맞춘다. 두 가족이 꼭 붙어 있는게 마냥 좋은지 콩이의 꼬리가 분주하게 흔들렸다. 가벼운 키스를 끝낸 뒤 신재현이 속삭였다.

 

“사진 잘 나왔을거예요. 가운데에 걸어둬요. 언제든지 볼 수 있게 휴대폰에도 옮겨두고.”

 

평소라면 오냐 하고 웃으며 대꾸할 말이었으나 류건우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며칠 전부터 느낀 위화감이 강하게 수면 위로 튀어나왔다. 깊게 생각하면 불안할 거 같아 외면했는데 그는 태생이 똑똑하고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류건우는 이제 깨달아버린다.

 

신재현이 떠날 준비를 한다.

 

그 문장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발밑이 무너지는 감각에 휩싸였다. 거친 숨을 뱉으며 류건우가 상체를 무너트리고 신재현이 그를 받쳐 안았다. 품에 꽉 차는 온기를 절박하게 붙든 채 고개를 저었다. 안 돼.

 

“가지마.”

“건우 씨.”

“제발 부탁이야. 내가 더 잘 해볼테니까… 재현아, 계속 옆에 있어주면…”

“건우 씨. 나 봐요.”

 

신재현에게 양뺨이 잡혀 볼품 없이 고개를 들었다.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표정을 하고서도 울지 않는다. 강한 게 아니다. 신재현은 두 사람의 웨딩 앨범에 류건우의 친인척은 아무도 없던 것을 기억한다.

 

그러니까… 류건우는 늘 장마 속에 살았던거다. 그는 오랫동안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에 몸을 내맡겨왔다. 이미 온 몸이 젖었는데 눈물을 흘린들 티가 날 리 없다. 그저 쏟아지는 비 사이로 걷는 삶. 신재현은 그런 삶에 먼저 다가와준 우산이었으나 손에 쥐기가 무섭게 떠나버렸다. 똑같은 슬픔의 반복에 류건우는 진저리를 치는 대신 수긍했다. 어차피 변하지 않을 인생이구나.

그럼에도 여전히 숨은 쉬어졌기에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었다. 사실 언젠가 콩이가 떠난 뒤엔 곧장 따라갈 생각까지 했었다. 적어도 그 때까진 아무렇지 않은 척 덮어둘 수 있었을텐데 왜 네가 다시 찾아와서……. 

 

가엾고 사랑스러운 사람. 

그러므로 신재현은,

 

“가야만 해요.”

“…….”

“알고 있죠? 내일이면 장마가 끝나니까.”

 

류건우는 입을 다물었다. 이젠 아무 표정도 짓지 않는 그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손님방으로 들어갔다.

 

탁.

 

신재현은 그 뒤로도 한참을 거실에 머물렀다. 점점 잦아드는 빗소리를 듣고 콩이의 털을 쓸어주기도 하며 자신에게 남은 시간을 세었다.

 


 

10.

마지막의 아침.

신재현은 눈을 뜨자마자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가 이곳으로 왔을 때 입고 있던 새하얀 셔츠와 하늘색의 여름 가디건이다. 손이 닿기 어려울만큼 옷장 깊은 곳에 놓여 있는게 꼭 나무꾼이 감춘 날개옷 같다. 그 선녀도 돌아가는 마음 참 편치 않았겠구나. 실없는 생각을 하며 벗어둔 옷을 곱게 개 두었다.

 

“콩아, 이제 갈까?”

 

왕! 벌써부터 현관문 앞에 앉아 꼬리를 흔들고 있는 콩이를 몇 번 쓰다듬어주곤 하네스 줄과 우산을 챙겨 바깥으로 나섰다. 빗줄기는 이제 희미할 정도로 가늘다. 잠시 우산을 쓰지 말까 고민했으나 맨몸으로 비를 맞고 다니면 안 된다는 당부가 생각나 우산을 펼쳤다. 주변 풍경이 훤히 보이는 투명 우산이었다. 몇 발자국 앞선 콩이가 말 하지 않아도 목적지를 안다는 듯 의젓하게 안내역을 자처했다. 그 뒤를 느릿느릿 따라나서면 첫날 이후론 들어선 적이 없는 숲길이 나왔다.

입구에 들어서기 전 콩이가 걸음을 멈춘다. 신재현의 얼굴과 등 너머를 번갈아보는게 정말 기다리지 않겠냐는 뜻일테다. 신재현은 영리한 제 아이의 등을 두드려주며 웃었다.

 

“괜찮아. 금방 쫓아올거야.”

 

그 말을 착실하게 믿은 콩이는 다시 앞서 걷기 시작했다. 신재현도 따라 걸었다.

 

물에 젖은 풀과 흙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이제 막 해가 들려 하는 하늘로 고개를 드니 조금 눈이 시렸다. 비가 전부 그친 뒤엔 햇빛이 사정 없이 쏟아지겠지. 이번 장마는 유독 길었다 했으니 쌓아둔 걸 다 풀어내는 것도 한참일거다. 콩이, 당분간은 산책 살살 해야겠는데? 중얼거리니 제 이름을 불러줬다는 것 하나에 꼬리를 마구 흔든다.

사실 걱정되는 건 콩이가 아니라 따라나설 사람 쪽이긴 하다. 아닌 척 은근히 체력이 없어서. 복직 하기 전에 운동 좀 열심히 해야할텐데. 그래도 당분간은 제 동생들이 번갈아가며 달달 볶을테니 어떻게든 나아질 것이다. 물론 1등 공신은 산책과 놀이를 사랑하는 콩이일거라는 것에 의심이 없다.

 

처음 이곳을 걸었을 땐 낯설어서 그랬는지 할 말이 많아 그랬는지 짧은 길인 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 그렇지도 않다. 한참을 더 걸어서야 길의 끝이 보였다. 신재현이 처음 눈을 떴던 터널의 입구 앞에서 끊겨 있었다. 이제 저곳을 지나면…….

 

“신재현!”

 

다급한 목소리가 들린 건 그 때였다. 신재현은 놀란 기색 하나 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맨발에 슬리퍼, 우산도 쓰지 않은 류건우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우산의 중요성을 신신당부 하면서 정작 본인은 늘 저런 식이다. 어쩔 수 없는 사람이란 생각에 미소를 짓곤 이제 코앞까지 다가온 류건우 쪽으로 우산을 기울였다. 집에서부터 이곳까지 곧장 뛰어왔는지 그의 숨이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신재현은 차분하게 그의 어깨와 등 언저리를 두드려주며 기다렸다.

 

“일어나자마자 바로 나왔나봐요.”

“너… 깨울 생각도, 안 하고… 내가 조금 더, 늦었으면 어쩌려고…”

“그럼 콩이한테 인사 전해달라고 했겠지. 안방 침대 위에 올려둔 편지 있는데 봤어요?”

 

류건우는 고개를 젓고 상체를 바로 세웠다. 아직 붉게 달아온 얼굴을 하고서도 신재현을 바라보는 눈빛엔 흔들림이 없다. 그래. 이 또한 당신이다. 속절 없이 흔들리면서도 결국 일어서는 사람. 자신을 두고 떠나는 이를 원망하기보단 배웅하기 위해 먼 길을 뛰어오는 사람. 문득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오르는 애정에 신재현은 눈을 감고 그의 어깨에 이마를 댔다. 이슬비에 젖은 옷은 축축했으나 맞닿은 자리가 금세 따뜻해져 괜찮았다. 신재현의 등을 끌어안은 류건우가 한숨처럼 입을 열었다.

 

“가야만 하는거지.”

“…네.”

“그럼 보내줄게. 난 원래 네 고집은 못 이겼다. 그리고… 사실 알고 있었어. 영원히 덮어둔 채로 살 수 없다는거.”

 

신재현은 1년 전에 죽었다. 누구보다 아팠던 류건우이기에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래도 붙잡고 싶었을 뿐이다. 눈을 가리는 일이라도 좋으니 조금 더 곁에 있고 싶어서. 장마에 푹 잠겨 죽어도 좋으니 끌어안고 싶어서. 전하고 싶고 듣고 싶은 말이 있어서.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이 우리의 마지막이라면.

너에게 말해야만 한다.

 

“고맙다, 나한테 와줘서. 네 덕분에 정말 많이 행복했어.”

“앞으로 또 그만큼 행복해질거라는 약속은 못 하겠지만… 노력해볼게. 콩이 끝까지 잘 돌볼거다. 네 동생들하고도 계속 연락할거고. 그러다보면 조금씩 괜찮아질 수 있겠지…….”

“…재현아.”

“나도 너의 행복이었어?”

 

신재현은 환하게 웃었다.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사람의 얼굴에 류건우도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물안개 너머의 환상은 그렇게 끝이 났다.

 


 

11.

안녕, 건우 씨.

청려가 아닌 신재현으로서 편지를 쓰는 건 참 오랜만이네요. 혹시나 빠뜨리는 말이 있으면 안 될테니 천천히 적어내려가보겠습니다.

 

오늘은 20XX년의 여름입니다. 나는 일주일 전 교통사고를 당해 오늘 눈을 떴어요. 외상은 심하지 않았지만 잠들어 있던 시간이 길어 방금 막 검사를 하고 오는 길입니다. 이 편지를 쓴 뒤엔 외출을 할거예요. 걱정하는 사람들에겐 미안하지만 허락은 받지 않으려고요.

 

뜬금 없지만 먼저 알아두지 않으면 앞으로의 이야기가 이해 되지 않을테니 말할게요.

나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이에요.

정확히 말 하면 그럴 수 있었던 사람, 이겠죠. 몇 년 전부턴 불가능하게 되었거든요. 건우 씨는 종종 내 속을 헤아릴 수가 없다거나 뭐든 다 아는 것처럼 구는게 신기하다는 말을 했는데 아마 그런 경험 때문이 아닐까요? 어쨌든 내 과거사는 크게 중요한 게 아니겠죠. 중요한 건 내가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겁니다.

 

나 미래의 건우 씨와 콩이를 만나고 왔어요.

지금처럼 무더운 여름에 비가 한참 쏟아지는 장마였어요. 우리는 결혼을 해서 한적한 시골에 살았고 콩이는 여전히 귀엽더라고요.

우리 사이가 정말 좋은 부부였어요. 집 마당도 예쁘고, 거실 벽에는 건우 씨랑 내가 찍은 사진을 한가득 붙여놨는데… 사진은 영 재능이 없는게 맞나봐요. 그 때까지 실력이 늘지를 않았어요.

그리고 VTIC 말이죠. 평생 남을 전설이 되었던데요. 채율, 신오, 주단은 정말 잘 하는 아이들이에요. 내가 직접 키운 덕도 있겠지만 사람의 바뀌지 않는 천성이라는 게 있잖아요. 그 아이들은 참 착하고 성실해서 기억이 없는 나에게도 언제까지든 편을 들어주겠다 약속 해줬어요. 전에 건우 씨가 말한 대로 앞으로는 좀 더 상냥하게 대해도 괜찮을 거 같아요.

건우 씨는 다정한 남편이었습니다. 집안일을 도맡고, 본인보다 내 걱정을 더 많이 하고, 콩이에게도 늘 자상했어요. 내가 기억만 온전했더라면 어리광도 부려봤을텐데요. 건우 씨는 연하의 애교엔 참 약한 사람이잖아요. 그래도 자주 안아줘서 외로울 틈이 없었어요. 건우 씨 포옹 할 때 꼭 내 어깨에 고개를 묻던데 알고 있었나요?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생각했죠?

네. 사실 지금 이 편지를 적고 있는 나도 어느 한 구석에선 그렇게 생각하는 중이에요. 건우 씨랑 나는 연락이 끊긴 지 1년이 다 되어가는 사이니까요.

깨어난 직후엔 혹시 내가 건우 씨가 너무 보고 싶은 나머지 꿈이라도 꿨나 한참 되짚었어요. 하지만 건우 씨와 콩이의 얼굴이 너무 생생하고 심장이 자꾸 저릿거려서 도저히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난 분명 우리의 미래를 보고 온거였어요.

 

 

1년 전 건우 씨에게서 연락이 끊겼을 때는, 솔직히 화가 났어요.

비록 우리 사이에 고백이 오간 적은 없었지만 건우 씨도 나도 서로를 자신의 특별이라 여기고 있었잖아요. 건우 씨가 무언가를 자꾸 불안해하는 건 알았지만 그렇게 하루 아침에 끝낼 수 있는 이유가 될 수도, 그럴만한 관계라고도 생각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너무 화가 나고 내 쪽에서도 전부 잘라내고 싶었는데… 거기까지 생각이 닿으니 깨달았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등지고 온 많은 것들의 심정이 이랬겠지.’

 

과거로 돌아갈 수 있었던 시절이 있다 했죠. 나는 완벽한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처음엔 내 의지가 아니었던 반복이 점점 기회로 받아들여졌고 조금이라도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끊어내거나 뜯어고치는 게 당연해졌어요.

그 날도 그랬죠. 내가 건우 씨 집에 처음 찾아갔던 날, 기억해요? 사실 스카웃하려고 간거였어요. 혹시나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있게 되면 건우 씨를 써보려고.

근데 그런 사정도 모르면서 건우 씨가 날 진정시키겠다고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나요.

 

‘네가 무슨 말을 하는건지는 잘 모르겠는데, 들어라.’

‘과거를 돌이킬 수는 없어. 그게 삶이라는거야. 너는 미래를 살아가야 하잖아. 거기에 매몰되어선 안 돼.’

 

지금에서야 생각합니다. 그 때 그건 당사자의 입장에서 우러나온 말이었구나. 건우 씨도 과거에 얽매여 있었으면서 나한테 그런 말을 한거였어요.

어쨌든, 당시의 난 위로를 받았거든요. 그대로 건우 씨에게 반해버릴 정도로요.

당신에게도 똑같은 말을 들려줘야 했는데 이미 나에게서 등을 돌린 후였어요.

 

깨닫고 나니 슬펐습니다. 어쩌면 벌을 받는걸지도 모르죠. 그동안 수 많은 것들을 등지고 살아왔으니 그 반대의 입장이 되어보라는 벌이요.

내가 밟아온 길엔 후회가 없지만 건우 씨의 옆에 함께 할 수 없다는 게 슬펐어요. 불안한 게 있다면 혼자 끌어안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었어요. 건우 씨가 내 말은 뭐든 들어줬 듯이 나도 그러고 싶었어요.

 

그래서 기다렸습니다.

건우 씨를 기다렸어요.

마음이 정리되면 다시 날 보러와주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버텼는데 다음의 여름이 돌아올 때까지도 당신이 오지 않아서… 내가 찾아가봐야겠다는 충동을 떨칠 수가 없었어요.

마침 그 날의 촬영 장소는 건우 씨가 사는 곳의 바로 옆 동네였고, 나는 무작정 당신이 있을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네. 이번에 당한 교통 사고는 그 때문이었어요. 한참 장마에 비가 많이 오는 날이었잖아요.

의식을 잃기 직전까지 당신의 생각을 했어요. 우리가 이대로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머지 않은 미래에 함께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바랐어요.

 

이제는 미래를 보고 왔다는 내 말을 믿을 수 있나요?

 

 

다시 돌아온 나는 결정을 해야해요.

사람의 삶은 수많은 인과관계로 얽혀 있어서 아주 작은 요소로도 큰 변화를 일으키곤 합니다. 이대로 건우 씨와 함께하는 걸 포기한다면 나는 더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을지도 모르죠. 조금 더 VTIC의 청려로서 무대에 서고 먼 훗날 콩이의 마지막을 지켜봐주고.

하지만 어느 쪽이든 최고로 행복하진 않을거예요. 신재현의 마지막 한 조각은 류건우가 꽉 쥐고 있으니까요. 당신이 없다면 난 평생 빈 자리를 그리워하면서 살 수 밖에 없겠죠.

 

그러니 달려갈게요.

이쪽이 당신과 함께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면 망설일 이유가 없어요.

똑바로 달려가 당신에게 말 할거예요.

지금은 너무나 불안해보이는 우리도 행복을 그릴 수 있다고. 전부 괜찮아질테니 함께 있고 싶다고.

 

건우 씨, 콩아. 기다려줘.

지금, 만나러 갑니다.

 

 

 

0.

펜을 내려두고 마주한 하늘은 눈이 부시다. 장마의 끝이 왔으니 더는 우산이 필요하지 않다.

가벼운 몸으로 달려간다. 저 멀리 그리운 뒷모습이 보인다.

다시는 엇갈리지 않도록 크게 이름을 부른다.

 

그리고 마침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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