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애인이었는데."
아, 전생에요. 박문대는 실실 웃으며 정신 나간 말을 하는 남자를 보았다. 오래 살다 보니 미친 건가. 가을이라고는 하지만 쪄 죽을 것 같은 검은색 천으로 꽁꽁 싸맨 옷을 입은 남자가 들고 있던 사진 모서리를 슬슬 쓸었다. 기억 못해요? 그의 상체가 점점 앞으로 기울었다. 박문대는 허리를 뒤로 빼며 생각했다. 차가운 손이 볼에 닿았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평범한 대학교 졸업반이던 내가 아이 셋 유부남이 된 건에 관하여.
W.파라오
날이 흐렸다. 박문대는 파도가 몰아치는 해변을 걸었다. 모래 사이사이에는 바위와 돌멩이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끼가 끼어 미끄러웠다. 움직일 때마다 거칠고 눅눅한 바닷바람이 몸을 휩쓸었다. 박문대는 해변과 바다의 경계를 따라서 바위절벽이 있는 곳으로 향해 갔다.
그곳에서 조금만 고개를 틀면, 작은 섬의 가장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자리한 어린이집이 있다. 아니, 있었다. 박문대는 너덜너덜한 고층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중세 시대에 지었을 법한 건물 양식은 세월이 지나도 위상을 빛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어린이집이라기 보단 고성 같았다. 독일군이 한밤중에 폭격을 퍼부었어. 원장과 아이들 모두 살아남지 못했지. 착한 아이들이었는데. 박문대는 식당 주인의 한탄 섞인 말을 떠올렸다. 그 말대로, 어린이집은 톡 치면 부서질 듯했다. 박문대는 안으로 들어가 재와 먼지로 덮인 회색빛 공간을 탐색했다. 깨진 접시와 부서진 찬장, 바닥에 나뒹구는 20세기 초반의 물건들. 어렴풋이 기억이 날 듯했다. 성인이 되어 초등학교 졸업앨범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이곳에 온 적이 없음에도 말이다.
박문대는 거의 부서진 계단을 올라가려다 발을 대는 순간 떨어지는 나뭇조각들에 발을 떼었다. 한숨이 나왔다. 내가 여기서 뭐 하고 있냐. 이건 다 얼토당토않은 전생체험 때문이었다.
같은 과 동기였던 이세진이 신나서 떠들기에 유튜브에 있는 전생체험 동영상을 한 번 켜 본게 다였다. 애초에 수면용으로 쓰려고 했던 거였는데, 진짜 될 줄은 몰랐지. 박문대는 반쯤 흐릿한 기억을 헤집었다. 다른 건 다 흐릿해도 이것만큼은 기억이 났다. 푸른 잔디가 가득하던 어린이집의 정원. 뛰어노는 아이들과 지켜보는 한 남자…'나'는 부엌에서 저녁을 만들고 있다. 작은 창을 통해 웃음소리가 나는 곳을 응시하자, 남자는 고개를 돌려 '나'를 응시한다. 그리고 입을 열어 말한다. 아쉽게도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남자는 가까이 다가온다. 이윽고 조금 열어둔 창문에 남자가 얼굴을 들이밀고, 그대로…꿈은 거기서 끝났다. 정신 차려 보니 졸고 있었다.
애초에 반쯤 잠들어 있었던 만큼 남자는 무의식의 표상이라고 하는 편이 옳겠지만, 박문대는 가장 유력한 가설을 폐기하고 이곳을 향했다. 기억은 흐릿했지만 느낌은 선명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폭격만 아니었어도 뭔가를 더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박문대는 벽 틈새를 뚫고 나온 식물이 말라죽은 것을 보며 생각했다. 더 볼 게 없었다. 차라리 100년 전에도 살아있었다는 여관 주인의 말을 듣는 것이 더 가치있었다. 박문대는 경첩이 나간 대문을 힘껏 열었다. 그때였다.
"건우 형?"
끼익. 나무판자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박문대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떤 놈이 이런 곳에 오는 거야? 폭격으로 폐허가 된 집에 오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이층으로 가는 계단 난간에 동그랗고 거먼 것 세 개가 있었다. 저게 뭐지? 어린이집은 참혹한 일이 있었던 만큼 괴담도 많았다. 박문대는 여관주인이 농담처럼 하던 말을 상기했다. 그곳에서 가끔 사람 사는 소리가 들린다더라.
박문대는 주먹을 꾹 쥐었다. 뭐든 간에 여기서 나가면 끝이다.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유튜브 어느 영상에서나 보이던 댓글이 머리를 스쳤다. 지평좌표계는 어떻게 고정하셨어요? X발 이게 다 이세진 때문이다. 괜히 왔다. 박문대는 유행에 편승했을 뿐인 과거의 이세진을 질타했다.탑탑거리는 작은 소리가 겹쳐서 들렸다. 지척으로 다가온 그것이 박문대의 허벅지를 잡았다.
"건우 형 맞아요?"
남자아이의 목소리였다. 박문대는 눈을 뜨고 붙들린 다리를 응시했다. 허리께에 겨우 올 법한 아이가 바지를 잡고 있었다. 뭐야. 그냥 어린애들이었군. 그들은 충분히 무해해 보였다. 보나마나 이 섬에서 살던 애들이 놀러 나온 거겠지. 사람 소리도 그것 때문이었나. 순식간에 마음의 평정이 찾아왔다.
대여섯 살쯤 될 법한 아이는 공포 영화의 소품으로 쓰일 법한 인형을 들고 박문대를 빤히 보았다. 그 뒤로 금발 머리 소년과 철제 신발을 신은 남자아이가 서로 속닥였다. 내가 건우 형 아니랬잖아. 건우 형은 더 잘생겼어. 키도 크고. 신오야. 너 건우 형이 어떻게 생겼는지 다 기억해? 사진도 없는데! 건우 형 맞아. 청려 형이 그랬잖아. 오늘 손님이 있으면 건우 형이라고 했어. 금발 머리 아이가 상대를 툭툭 건드렸다. 그들은 대화 내용이 다 들리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물론 박문대는 류건우가 아니었다. 날 누군가와 착각하는 것 같은데. 바지가 당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박문대는 고개를 숙였다.
검은 머리의 아이-허리춤을 잡은 아이였다. 다른 검은 머리 아이의 이름은 신오인 것으로 추측된다-는 박문대에게 인형을 내밀었다. 에나벨에서도 안 받아줄 것 같은 섬뜩함이 담긴 인형을 받아든 박문대는 다시 검은 머리 아이를 보았다. 이걸 왜 주는 거지. 아이는 묘하게 반짝거리는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박문대는 인형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등 부분에 아주 작은 태엽이 보였다. 박문대는 다리를 접어 쭈그려 앉으며 물었다.
"…태엽 감아 줄까?"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박문대는 태엽을 감았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한 번 감은 후 세 번 반대로. 인형은 금방 움직였다. 속닥이던 아이가 큰 소리로 말했다. 내가 건우 형 맞다고 했잖아! 그들은 서로 한 번 쳐다보더니 박문대를 향해 다가갔다. 어서 가요! 아이들은 양쪽 팔을 잡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박문대의 팔이 봉인되었다. 어린애들이라 거칠게 저항할 수도 없었다.
박문대는 그들에게 잡혀 동굴로 끌려갔다.
-
박문대는 앨리스의 기분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토끼굴에 빠졌을 때 이런 느낌이었을까. 무슨 동굴이 끝이 없어. 제 곁에는 시계를 든 토끼가 아닌 어린이 세 명이 있었다. 어두컴컴하고 비좁은 통로를 지나자 보인 것은 푸르고 화사한 색채의 자연이었다. 저 멀리 알록달록한 어린이집이 보였다. 바깥은 옅은 분홍색으로 칠해져 있었는데, 남색 지붕과 나름 잘 어울렸다. 이게 뭐야 X발. 박문대는 어안이 벙벙해 이끄는 대로 끌려갔다. 그 와중에도 머리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여기는 폭격을 맞기 전의 어린이집이었다. 꿈에서 봤었던.
박문대가 멈춘 곳은 정원의 커다란 나무 근처에 서 있던 한 남자의 앞이었다. 청려 형! 저희가 건우형 데려왔어요! 아이들이 재잘재잘 떠들었다. 청려. 특이한 이름이었다. 박문대는 한 손에 초시계를 쥐고 있는 그를 보았다. 청려는 소매 끝단까지 잠근 남색 옷을 입고 있었는데, 기장이 길어 마치 장례 직전의 신부 같았다. 반대로 피부색은 백지장처럼 하얬다. 그는 생명력 가득한 공간 속 하나의 이질적인 존재였다. 흑백 사진을 떼다 붙인 듯, 기묘했다. 립글로즈를 바른 듯한 입술 빼고. 박문대는 뇌세포가 외치는 깨달음을 들었다. 저 사람이 꿈에 나온 사람이다. 청려는 고압적으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루프 밖에 오래 있지 말라고 했을 텐데."
하지만 건우 형이 너무 늦게 온 걸요. 박문대는 강아지처럼 울망거리는 눈이 된 금발머리의 아이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 청려가 미소 지었다. 채율. 탓하는 건 아니니 가서 놀아도 돼. 그 말에 아이들은 금세 멀어졌다. 청려는 초시계를 멈추며 박문대에게 말했다.
"류건우."
"…전 류건우라는 사람이 아닙니다. 아까 전부터 그 이름으로 부르던데, 다른 사람과 착각하신 것 같은데요."
툭. 나무의 큰 가지 사이로 다람쥐가 떨어졌다. 청려의 손바닥 위에 안착한 그것은 빨빨거리며 돌아다녔다. 청려는 박문대의 말을 무시한 채로 말했다.
"잘 봐요."
순식간에 그가 사라졌다. 어느새 박문대의 눈앞에는 새 한 마리가 다람쥐를 입에 문 채로 날고 있었다. 송골매였다. 이건 또 무슨 일이지? 먹으려는 건가? 걱정이 무색하게 새는 위로 날아올랐다. 박문대는 그 움직임을 따라 고개를 돌리다, 햇빛에 눈을 찡그렸다. 새는 유려한 날개짓으로 다람쥐를 나무에 뚫린 구멍에 넣었다. 눈을 제대로 떴을 때는 청려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청려가 물었다.
"이래도 모르나?"
주어 생략 다 하고 물으면 내가 어떻게 알아.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박문대는 책잡힐 일 없게 대답했다.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방금 그건…"
"음…알았어요. 이리 와요."
박문대의 말을 끊은 청려가 초시계의 버튼을 누르더니 어린이집으로 들어갔다. 박문대는 그를 따라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이곳에서 나가는 방법도 몰랐다. 어린이집의 안은 1940년대의 인테리어를 그대로 따온 느낌이 들었다. 박문대를 청려를 따라 계단을 올랐다. 아까 보았던 부서지기 직전의 나무판자라고는 생각할 수조차 없이 깔끔했다. 두 걸음 앞에서 청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는 루프 안이에요."
"루프요?"
"마지막 24시간을 보존할 수 있는 공간을 말하죠. 내가 새로 변했던 것처럼, 평범하지 않은 애들이 살 수 있도록 하는 곳이에요. 보통 나 같은 임브린-루프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을 보내서 아이들을 관리해요."
"24시간을 보존한다고요?"
"같은 하루를 매일 사는 거죠. 아까 다람쥐를 구했잖아요? 그러면서 영원히 살아요."
아이는 셋이에요. 가장 큰 애는 신오. 금발이 채율, 인형 들고 있던 유아는 주단. 익숙한 설명이었다. 웹소설에 흔한 설정이라서 그런가? 박문대는 전혀 놀라지 않는 자신에게 감탄했다. 어지간히 읽어댔군. 군대에 있을 시절 할 게 없었던 탓이었다.
같은 하루를 반복해서 사는 건 초능력 같은 걸 가지고 있기 때문이겠지. 평생 몸 숨기며 살아갈 바에야 시간 안에 갇혀 사는 게 더 편리한 방식이긴 했다.
청려는 옛날식 전화기-무려 받는 곳과 말하는 곳이 따로 있는-가 얹힌 서람의 가장 아래쪽 칸을 열었다.
"이곳에는 어떻게 왔어요?"
"그야 애들이 끌고…"
"그거 말고. 웨일스에요. 작은 섬이라 사는 사람이 거의 없죠. 관광지로도 쓸모가 없고."
하긴, 박문대가 웨일스에서 만난 외지인이라고는 새 연구자라면서 선글라스를 쓴 관광객 하나뿐이었다. 매가 자주 지나다닌다고 했었지.
청려는 갈색 봉투를 꺼내 입구를 막은 실을 풀어냈다. 봉투를 거꾸로 뒤집자 똑같이 생긴 반지 두 개와 사진 하나가 굴러 나왔다. 청려는 깔끔하게 생긴 회색 반지를 손가락에 끼우더니, 박문대에 사진을 내밀엇다. 사진은 탁상 액자에 넣을 만한 크기였다. 안에는 의자에 앉은 작은 아이 셋, 공중에 떠 있는 조끼 하나, 뒤에 서 있는 성인 남성 두 명이 있었는데, 흑백 사진 치고는 요즘 사진처럼 선명히 찍혀 있었다. 청려는 그 중 더 키가 큰 남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 남자 때문 아니에요? 본 적 있을 텐데."
사진 속에는 하얀색 셔츠를 입은 남자가 있었다. 박문대는 반사적으로 대학 선배 류청우를 떠올렸다. 그만큼 닮은 남자였다. 류청우가 운동을 그만두고 공부에 집중한다면 딱 저런 모습일 것 같았다.
"이 사람이 류건우라는 남자입니까?"
청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본 적 없습니다. 어디서도요."
"그럴 리가."
청려가 단정 지었다. 박문대는 주먹을 가볍게 꾹 쥐었다. 아까부터 아니라는데 왜 난리야. 사진을 테이블 위에 둔 청려가 갑자기 가까이 다가왔다. 공기가 훅 밀렸다. 박문대의 귀에서 낮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박문대는 침을 삼켰다. 귓바퀴에 입술이 닿았다. 그 뒤 청려가 말한 것은 상상도 못한 것이었다.
-
"절대 안 됩니다."
"아쉽네."
청려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박으려던 입술이 장애물로 인해 멈추었다. 주먹만 한 얼굴이 손에 쏙 들어왔다. 청려가 웅얼거렸다. 전 애인인데 진짜 안 돼요? 크게 뜬 눈이 깜박였다. 안 된다고…여기가 호텔도 아니고, 지금이 밤도 아니고, 심지어 밖에 애들도 있는데 뭘 해? 티벳여우마냥 눈을 뜬 박문대가 짜게 식은 눈빛을 보내던 참이었다. 말랑. 손바닥에 축축한 살덩이가 닿았다. 뭐야 X발. 이상한 감촉에 손을 털자 청려가 샐쭉하니 웃었다. 혀를 슬쩍 내미는 게 사람을 개빡치게 했다. 박문대가 아우성쳤다.
"아니, 누가 한 번 본 사람한테 자자고 합니까?"
"한 번 본 게 아닌데. 우리 사귀었었어요."
청려가 의문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박문대는 고혈압을 향해 가는 피의 혈류를 억눌렀다. 아니 어떤 미친놈이 전생 타령을…
"그러니까, 제가 전생에 류건우라는 사람이었고 청려 씨 애인이라는 소리잖아요."
"정답이에요."
축하해요. 청려가 영혼 없이 환호했다. 박문대는 사진 속 훤칠한 남자를 손가락으로 콕콕 찔렀다. 진짜 안 해요? 좋아했는데. 청려는 정말로 의아한 듯했다. 그러더니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반쯤 심신이 지친 박문대에게.
"그리고…"
"?"
"얼굴이 취향이면 초면이어도 잘 수 있는 거 아닌가? 나 별로에요?"
"…그 문제가 아니라," 박문대가 한숨을 쉬었다.
"지금은 좀…"
애초에 이곳으로 온 건 눈앞에 있는 남자 때문이었다. 안 동할 리가. 박문대는 입술을 씹으며 대답했다. 왜 안 되지? 청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청려는 박문대의 말랑한 볼을 잡고 끌어당겼다. 몸에 힘을 빼고 있던 박문대는 속수무책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청려의 숨결이 느껴졌다. 주변 공기가 미묘하게 가라앉았다. 박문대가 청려의 어깨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때 아래층에서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왕!"
둘은 나쁜 짓을 하다 걸린 것처럼 떨어졌다. 탁탁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박문대는 서서히 다가오는 무언가를 알 수 있었다. 석궁이었다. 석궁? 요즘은 석궁이 개 소리도 내나? 살아있는 석궁이 있어도 놀라지 않을 것 같았다. 청려가 무언가를 잡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콩이 인사해."
아우우우. 개 울음소리가 들렸다. 석궁은 아직도 공중에 떠 있었다. 박문대가 물었다.
"그건…"
"석궁이 살아있는 게 아니라 투명 강아지에요. 아직 아기인데, 똑똑하죠?"
누가 봐도 한참 큰 개였지만, 박문대는 딴지 걸지 않았다. 다리를 휘감는 꼬리털이 느껴졌다. 청려는 석궁을 들고 초시계를 꺼냈다. 똑딱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박문대는 콩이의 배(라고 추정되는 곳)을 쓰다듬으며, 청려가 석궁을 쥐는 것을 지켜보았다. 북슬북슬했다. 리트리버인지, 아무튼 확실히 장모종인 개가 헥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크기가 상당했다. 청려가 콩이의 발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애들이랑 놀고 있을래요? 가야 할 곳이 있어서.
아니면 같이 가도 되고."
박문대는 날카로운 석궁의 끝부분을 보았다. 저걸로 뭘 하려고? 하여간 이 남자는 뭐든지 수상했다. 창밖으로 들려오는 아이들 웃음소리에 박문대는 반사적으로 바깥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해사하게 웃는 채율이 신오의 허리에 밧줄을 묶고 연을 날리듯 달리고 있었다. 주단은 인형 무더기 사이에 앉아 박문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몸통만 거미인 인형이 칼을 든 채로 따라 팔을 흐느적거렸다. 진짜 칼이었다. 칼날이 빛났다. 공중에서 밧줄 하나에 의지한 신오가 소리쳤다. 또 해줘!
"……."
박문대는 말없이 청려를 따라갔다.
-
청려가 간 곳은 어린이집 뒤에 있는 절벽이었다. 박문대가 콩이에게 핥음 당하는 동안, 담장에 팔을 걸치고 쏘는 자세를 취한 그가 고개를 눕혀 초점을 맞추었다. 따사로운 햇빛이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높은 코 너머로 긴 그림자가 졌다. 청려가 한쪽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절벽에서 하얀 팔다리가 기어 올라왔다. 오 미터는 가볍게 넘을 듯 한 그것은 낡고 찢어진 정장을 몸에 걸치고 있었는데, 눈 없는 볼드모트 머리에 분칠한 인간 몸통을 길게 늘여 이어 붙인 것처럼 생겼다. 들판에 그어진 현장 보조선 위로 그것이 발을 옮겼다.
"저게 뭡니까?"
"…'저거' 라고요?"
"네. 소설에 나오는 괴물 같네요."
"저게 보여요?"
눈이 있으면 보이겠지. 박문대가 생각했다. 청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큰 눈이 작은 얼굴에서 더욱 존재감을 키웠다. 박문대는 예의있게 대답했다.
"보통 보이지 않을까요."
"우리는 안 보여요. 문대 씨만 보이는 거지."
"그게 무슨 소립니까?"
"문대 씨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거죠. 별종 말이에요."
별종? 청려는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청려가 초점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오디오의 배경음악처럼 흘러나왔다. 전 별종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지만, 다들 그렇게 불러요. 저것들은 할로우라는 생물이에요. 아이들의 눈알을 빼먹고 임브린을 납치해 영생을 얻으려 하는 자들이죠.
"처음부터 여기 있었습니까? 저 괴물이요."
"할로우에요. 원래는 없었어요. 어린이집에 비한이라는 애가 있었는데, 잡혀가기 전까진 아무도 이곳에 온 줄 몰랐죠. 볼 수가 없어서."
"그럼 비한은,"
"묘지에 있어요. 웨일스 섬 공동묘지."
"…"
"원래 건우 씨가 저런 애들을 보는 능력이 있었는데, 이곳을 떠나버려서…방비를 못 했죠."
박문대는 입을 다물었다. 콩이가 발밑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할로우가 입을 벌렸다. 그가 어린이집을 향해 돌진하는 순간, 청려가 석궁을 쏘았다.
화살은 머리 정중앙에 박혔다. 현장 보조선에 완벽히 들어맞는 자세로 쓰러진 그것이 괴상한 소리를 내며 입을 벌렸다. 입에서 문어발 같은 촉수가 튀어나왔다. 박문대는 초시계를 다시 돌리는 청려에게 말했다.
"그럼 매일 저걸 잡아야 하는 겁니까?"
청려가 중얼거렸다. 시간만 맞추면 아무 문제없어요.
그렇게 말한 청려는 휙 돌아서서 어린이집을 향해 가버렸다.
-
정원은 아름답게 빛났다. 다람쥐를 잡았던 고목나무가 나뭇잎을 흔들었다. 청려는 초시계를 꺼내들었다. 시침이 정각에 다다르자, 저 멀리서 신오를 업은 채율이 달려왔다. 청려가 시간을 보더니 말했다.
"4초 늦었다."
"죄송해요. 오늘은 얼마나 필요해요?"
"당근 하나만."
채율이 당근으로 손을 뻗었다. 채율이 손댄 부분이 서서히 커졌다. 식물 성장 비디오 빨리 감기를 한 것 같았다.사람만해진 당근은 옮기기로 힘들어 보였다. 그러나 신오가 철로 만든 신발을 벗고 당근의 줄기를 잡자, 당근은 손쉽게 위로 떠올랐다. 정확히는 신오의 가벼움을 당근이 버티지 못한 거였다. 무거워요! 허리를 줄로 묶은 신오가 소리쳤다. 박문대는 당근의 끝부분을 잡고 들어올렸다. 그보다 다섯 명이서 먹는데 왜 이런 크기의 당근이 필요한 거냐?
저녁 메뉴는 당근 수프였다. 박문대는 수프 사이에 떠 있는 뭉근한 당근 조각들을 숟가락으로 떴다. 이거 그냥 당근에 우유 넣고 끓인 것 같은데. 한입 먹으니 역시나 생당근 맛이 났다. 갑작스런 자연의 맛이 박문대의 입안에서 요동쳤다.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당근 수프가 이런 맛은 아닐 거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었다. 이건 모든 종류의 조미료가 거세된 맛이었다.
숟가락으로 주황색 수프를 젓던 채율이 박문대에게 말했다. 의자에 붙은 벨트를 차고 있던 신오와 소곤거리던 그였다. 오늘은 건우 형이 하는 저녁 먹으면 안 돼요?
"문대 씨는 류건우가 아니야."
"그런 둘이 다른 사람이에요?"
청려가 고개를 끄덕였다. 실망한 아이들이 입을 삐죽거렸다. 청려는 바로 옆에 앉은 주단의 의자에 방석을 깔았다. 주단이 뒤늦게 숟가락을 들었다.
"비슷한 사람이지.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거든."
청려가 추가로 가져온 당근을 썰며 말했다. 신오가 채율의 손을 잡고 문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아직 청소년이 되지 못한 손이 번쩍 들렸다. 채율이 말했다.
"그럼 문대 형도 우리랑 같이 살아요!"
"나는 루프 안에서 사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답답할 것 같은데. 그리고 할로우에게 들키지만 않으면 되니까."
청려가 웃었다.
"글쎄? 루프 안에서 사는 건 꽤 좋은 선택이죠. 우리 같은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면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모르진 않을 텐데."
"그게 왜 나쁘다고 생각하는지 예상하지 못하는 건 아니에요. 나 또한 생각했었던 문제니까. 하지만 틀렸어요. 여기 있을 땐 루프를 들키지 않는 이상 공격을 예측할 수 있지. 밖으로 나가면? 늙어 죽는 문제를 해결한다 쳐도, 우린 문대씨처럼 보이지 않아요. 그런 의미에서 내 능력은 축복이죠. 안전하게 있을 수 있으니까."
개소리하네. 청려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듯 했다. 박문대는 물을 들이켰다. 진한 당근의 맛이 순식간에 쓸려 내려갔다. 초면인 사람에게 같이 살자고 하는 게 정상인가. 박문대가 보기엔 청려는 전생의 연인이라던 류건우와 박문대를 동일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당치도 않았다. 박문대는 류건우가 아니었다. 전생에 류건우였든 아니든 지금은 박문대인데, 전생의 연인? 청려는 류건우의 대용품으로 박문대를 곁에 두길 원하는 거였다. 청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문대 씨를 지켜 줄 수 있어요."
"루프가 안전하다는 생각은 안 드는데요. 그리고 전 나가서 살 겁니다."
비한의 경우를 생각해 봐라. 그리고 내가 미쳤다고 루프 안에서 살겠냐. 박문대는 들었던 물 컵을 내려놓았다. 식탁에 유리가 닿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어느새 식당은 조용했다. 아이들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먹다 말았는지 당근을 베어 문 채였다. 청려가 차분히 말했다.
"알았어요."
청려가 포크를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단. 다 먹고 루프까지 배웅해 줘."
청려가 접시를 들고 싱크대 쪽으로 다가갔다. 그의 표정은 뒤를 돌아서서 보이지 않았다.
-
노을이 들어오는 어린이집의 정원은 빌어먹게 아름다웠다. 주단이 박문대의 옆에서 걷고 있었다. 보폭이 작았지만, 박문대가 걸음을 늦추었다. 박문대가 조용한 주단을 향해 물었다.
"나가서 살 마음은 없어?"
"청려 형이 말했습니다. 루프가 싫다고 나가면 큰일이 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사는 건 그렇게 나쁘지 않습니다. 채율 형이 매일 당근도 자라게 하고요, 신오 형이 비행기도 태워줍니다. 그리고 어린이집에서만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마을까지는 나가 놀아도 됩니다. 문대 형도 마음에 들 텐데요."
주단이 음, 하고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그리고 여기선 문대 형이 막내니까 제가 잘 챙겨줄 수 있습니다."
"네가 뭘 챙긴다고 그러냐."
박문대가 주단의 코를 약하게 튕겼다. 인상을 찌푸린 주단이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저는 284살입니다. 결코 어린 나이는 아니에요."
그럼 284년 동안 여기서 살았다는 건가? 박문대는 허리에 간신히 미치는 키를 가진 주단이 제대로 나이를 먹었다면 어떤 모습일지 상상했다. 걷지도 못할 정도로 늙었겠지. 그 전에 죽어서 뼛가루도 안 남았겠지만. 주단의 인형이 박문대의 바지를 죽죽 잡아당겼다. 아기 인형이 마치 어린아이 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 주단의 인형이니 주단의 짓일 터다. 이거 나이만 많지 생각은 다섯 살 아닌가. 하루를 284년 반복한 것을 나이로 쳐도 되는지는 차치하고…애를 이렇게 키워도 되나. 할로우가 있다지만, 그들이 생겨난 것은 100년 전이다. 그럼 그 전에는 좀 정상적으로 키워도 되는 거 아닌가. 박문대는 주단의 머리를 꾹 눌렀다. 주단은 자신이 이곳에 남기를 바랐지만(그리고 아마 어린이집에 사는 사람 모두의 공통된 의견이겠지만), 박문대는 이곳에서 살 마음이 전혀 없었다. 차라리 할로우를 전부 제거하고 말지. 박문대는 머뭇거리다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네 형은 여기서 살고 싶대?"
주단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대답했다.
"형은 우리 중에 제일 연장자이십니다. 어릴 때 루프에서 살았댔어요. 성인이 되는 날 루프를 나와 일부러 나이를 빠르게 먹었다고 했습니다. 루프를 나가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루프에서 산 시간만큼 나이를 먹으니까요. 저는 굳이 나가서 고생하는 것보다 온실 속 화초로 자라는 편이 편하기에 나가고 싶진 않지만, 청려 형은 나가서 홀로 루프를 만드는 것이 임브린이 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혼자는 아니었잖아."
"맞습니다. 건우 형과 여러 루프를 거쳐서 웨일스 섬에 자리를 잡으셨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건우 형은 여기서 산 게 아니라 잠깐 들어오는 분이셔서…볼 때마다 모습이 바뀌어 있던 것밖엔 기억이 안 납니다. 바깥 간식들을 사가지고 오셨었지요."
이윽고 그들은 동굴 앞에 다다랐다. 짧은 거리였다. 주단은 박문대가 동굴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바로 돌아갔다.
루프 밖으로 나갔을 때, 첫 번째로 본 것은 새 연구원이었다. 그는 늘 있던 바위해변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연구원이 박문대가 걸어 나오는 것을 보고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걸었다.
"거기는 막힌 곳 아니던가요?"
"…그렇죠."
"왜 그런 곳에 가세요. 볼 것도 없는데 . "
연구원이 박문대를 향해 다가왔다. 쌍안경을 목에 건 채였다. 그럼 니는 왜 밖에 나와 있냐. 박문대는 뒤로 물러셨다. 연구원은 특이하게도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는데,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던 그였지만 청려의 말이 기억에 맴돌았다.
인간이 된 할로우들은 눈동자로 밖에 구분할 수 없다고 했었다. 회색빛 구름이 가득한 날씨는 도저히 선글라스를 허용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박문대는 조금씩 다가오는 연구원을 피해 달릴 수 있는 경로를 생각했다. 바위를 타고 넓은 길이 보였다. 마침내 발을 뗀 순간,
박문대는 자신의 뒤통수가 찌그러지는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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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건우는 석궁을 들었다. 총을 쏘는 것이 할로우 잡기에는 더 좋았겠으나 수중에 없었다. 2차대전이 일어나는 시대건만 총 하나 구하기 힘들었다. 차선책은 어릴 때부터 쓰던 석궁이었다. 류건우는 저 멀리 다가오는 할로우 떼를 겨냥했다. 분명 수가 적다고 했는데 저기 보이는 것은 빽빽했다. 눈이 없어서 다행이지 없었으면 진작에 죽었다. 류건우가 방아쇠를 당기며 생각했다.
류건우가 이런 짓을 하게 된 것은 지금 죽이고 있는 망할 할로우 때문이었다. 이딴 게 존재하니 루프 밖에서 살 수가 없는 것이다. 유아기를 제외하면 평생을 루프 안에서 산 신재현은 모르겠지만, 15살 때 잡혀오다시피 루프에 갇히게 된 류건우는 받아드릴 수가 없었다. 그냥 할로우를 다 잡아 족치고 현실에서 사는 게 마음 편했다. 이제 청려가 된 신재현이 그냥 루프 안에서 살자고 설득해도 고집을 꺾지 않았었는데.
활은 물의 저항을 이기지 못하고 꺾였다. 당연했다. 물 속에서 활을 쏴봤자 멀리 안 나갔다. 류건우는 호수 안에 몸을 숨겼다 물속에 있던 할로우 무리에게 쫒기고 있었다. 할로우들의 우두머리 격인 바론이 수를 쓴 게 분명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호수에 있지도 않았을 테니까. 참지 못하고 숨을 들이키자, 오염된 물이 폐 안 으로 쏟아졌다. 입안에 가득한 녹조가 미끌거렸다. 안경이 벗겨져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좀 움직였다고, 물길은 그새 안경을 데려가 버렸다.
숨이 막혔다. 솔직히 죽는 건 각오한 거니까 받아들일 자신이 있었는데, 할로우 피하다 물속에서 죽는 건 상상해보지 않았다. 점점 더 가까워지는 검은색 덩어리-할로우 무리였다-가 촉수를 뿜어냈다. 그것은 아주 느릿하게 다가왔다. 류건우는 화살이 다 떨어진 석궁을 내려놓았다. 석궁은 가벼워서 호수 위로 둥둥 올라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웨일스 섬이나 한 번 더 갈걸 그랬다. 시간을 넘어야 하다 보니 만나는 시간이 적었는데 남아 있어라 할 때 말 좀 들었어야 했다. 졸렸다. 류건우는 할로우들의 촉수가 몸에 감기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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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보인 것은 어린이집 안이었다. X발 뭐야. 파노라마처럼 떠오른 기억은 현실처럼 생생했다. 서랍을 정리하는 것처럼 기억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박문대는 눈을 깜박였다. 자신은 옷깃이 잡힌 채로 반쯤 고꾸라져 있었다. 목에 칼날이 닿는 느낌이 들었다. 눈을 굴려 위를 쳐다보자, 계단 바로 앞에 아이들을 가리고 서 있는 청려를 볼 수 있었다. 청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론. 그 사람은 민간인이에요."
연구원이 뭐라 씨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연구원이 바론이었던 건가. 머리가 웅웅거려 잘 들리지 않았지만 뭔가 심각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우선 자신의 목을 잡고 있는 놈을 떼놔야 했다. 박문대는 청려를 보았다. 청려가 박문대를 보고 있었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박문대는 눈짓으로 생각을 전달했다. 알아들을 거라 믿는다. 청려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의 팔은 이미 깃털이 돋아 있었다.
박문대는 허리를 뒤로 젖혔다. 쾅 소리가 나며 뒤통수가 얼얼해졌다. 성공이다. 박문대는 고래를 숙인 채 코를 문지르는 바론의 품에서 냅다 도망쳤다. 청려는 이미 아이들을 계단 위로 올려 보내고 있었다. 낡은 옷을 입은 할로우들이 촉수를 내뿜었다. 박문대는 계단참에 달려 있던 셔터를 내렸다.
약한 유리창이 산발적으로 부서졌다. 박문대는 한 번에 두 계단씩 올랐다. 다행히 할로우들은 눈이 없어 그들을 보지 못했다. 바론이 1층에서 할로우들에게 명령하는 것이 들렸다.
박문대는 청려를 위로 떠밀며 계단 위를 달렸다. 이제 3층을 넘어가고 있었다. 박문대는 다시 셔터를 내렸다. 뒤에서 할로우들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막 4층으로 향하는 계단참에 한 발을 딛었을 때였다.
벽에 난 창문 사이로 할로우의 머리가 보였다. 순식간에 쇄도하는 날카로운 촉수가 박문대를 향했다. 청려가 박문대를 향해 몸을 날렸다. 촉수는 박문대가 발을 딛고 있던 바닥을 부쉈고, 둘은 계단 아래로 추락했다.
-
박문대는 아수라장 사이에서 청려의 머리를 감쌌다. 계단에서 떨어진 둘은 깨진 나무판자 틈으로 추락했다. 거센 소음이 머리를 울렸다. 위층에서 주단이 이끄는 스켈레톤 인형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박문대는 순식간에 몸을 뒤집었다. 콰득, 등이 아작 나는 신호가 들렸다. 돌겠네. 병원비부터 생각나는 건 여기가 한국이 아니라서 그럴까. 등 전에 입안이 아파 죽을 것 같았다. 떨어지며 박은 잇몸에서 피가 났다. 신재현에게 박은 것이었다. 박문대는 철분의 맛을 느꼈다. 입술을 뗀 신재현이 입을 열었다.
"기억났어요?"
"어. 완벽하게."
좀 늦었네요. 그렇게 해도 안 되더니. 재현이 중얼거렸다. 설마 냅다 자자고 한 게 전생 때문이었냐. 차라리 말을 하지, 그때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 신재현은 모를 것이다. 항상 혼자 생각하다 결론만 쏙 말해버리는 놈이니까. 박문대가 코에서 흐르는 피를 훔쳤다. 두개골끼리 아주 제대로 부딪힌 것 같았다. 코가 얼얼했다.
어느새 일어난 재현이 박문대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박문대는 위층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엷은 목소리를 들었다. 남은 할로우는 넷. 상대하기는 힘들었다. 어린이집엔 무기도 잘 없고, 저쪽은 촉수와 이빨로 중무장을 했다. 박문대는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대로 내뱉었다. 이번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신재현."
"네?"
"루프 닫아."
박문대의 머릿속엔 독일군이 떨어뜨린 폭탄이 재생되고 있었다. 어린이집이 잿가루가 될 정도의 위력. 석궁만 잘 맞추면 죽는 놈들이니 한 방에 처리하는 데 무리는 없을 것이다. 박문대는 여전히 잡고 있는 신재현의 손을 세게 쥐었다. 신재현이 박문대를 바라보았다.
"2023년으로 가자."
"그럼 우리 다 죽어요. 시간을 한 번에 맞아서."
"다른 루프 찾아서 들어가면 되지. 비행기 타면 금방이야."
너 미래 기술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지? 옛날 사람이라. 놀리는 투에 신재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신분이 없는데 비행기를 어떻게 타지? 나도 그 정돈 알아요. 박문대가 웃었다. 숨이 헐떡거렸다. 둘은 이제 아래로 내려온 할로우를 피해 달리고 있었다. 웃음이 벅찬 호흡에 걸려 간헐적으로 나왔다. 여기 영국이다. 본토에 하나 없겠냐? 그리고 이제 루프 좀 놔. 같은 하루만 반복하는 건 지루하잖아.
"다들 이렇게 사는데? 우리 같은 사람들은 원래 그래요."
"넌 그렇게 살면 안 돼."
볼 때마다 초시계에 얼굴을 박고 다니는 놈이었다. 박문대는 그런 신재현에게 21세기의 문명을 맛보여줄 생각이었다. 여기서는 그런 거 안 들고 다녀도 시간을 알 수 있다고. 시간 좀 재고 다니지 말라는 뜻이었다. 늙어죽지 않을 방법이야 있겠지. 루프 만드는 능력도 있는데 그것 하나 없을 리가 없었다. 없으면 만들면 되고. 신재현이 인상을 찡그렸다. 고운 미간에 주름이 졌다.
"그건 무슨 소리지?"
"방법은 나중에 찾자. 우선 여기서 나가고."
그들은 창문에 다다랐다. 신재현이 새로 변해 박문대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그들의 위층을 향해 날아갔다. 다락방 창문에 발 하나를 걸친 채 나뭇가지를 자라게 하던 채율이 청려 형, 하며 불렀다. 왕! 울음소리도 그들을 향해 나타났다.
아이들은 다락방 안에 있었다. 신오와 주단의 얼굴이 보였다. 다락방 문에서 연신 부딪히는 소리가 났지만 아직 뚫리지 않았다. 문을 가구로 막아 둔 모양이었다. 박문대를 난간에 던진 청려가 주단을 물고 바다를 향했다. 박문대는 천천히 다가오는 커다란 나뭇가지를 보았다. 해가 져서 시야가 탁했다. 두께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박문대는 어느새 다리에 꼬리를 감싼 콩이를 들쳐 안았다.
신오와 채율이 나무를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뭇가지 위에서,박문대는 외쳤다. 루프로 가! 밖으로 나가! 조금 있으면 독일군이 올 것이다. 뒤에서는 할로우가 촉수를 넘실대고 있었다. 박문대는 상공을 찢는 괴기음을 들었다. 늦었나? 재빠른 아이들은 해변 안쪽 동굴로 달렸다. 다시 하늘을 본 박문대는 눈을 크게 떴다.
새로 변한 신재현이 날아오고 있었다.
"뭐 하러 다시 온 거야?!"
박문대가 소음 속에서 외쳤다. 신재현은 콩이를 나무에 내렸다. 콩이는 알아서 잘 달려 나갔다. 신재현이 박문대의 앞에 섰다.
"타요."
"무게를 견딜 수는 있고?"
"못 할 것 같나?"
고개를 갸웃거린 신재현이 그대로 박문대를 잡고 날았다. 박문대의 등을 할로우가 건드린 순간이었다. 아이들은 해변가에 모여 있었다. 그들은 아이들을 몰고 동굴로 들어갔다. 굉음이 울린 순간, 그들은 긴 통로의 끝으로 다이빙했다. 모든 것이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끝났나? 신재현이 루프가 있던 곳을 건드렸다. 그저 허공을 휘젓는 것처럼 보였다. 몇 번 손을 앞뒤로 왔다 갔다 한 신재현이 확언했다.
"닫혔어요. 여기가 2023년인지는 확신을 못 하겠지만."
박문대는 자리에서 일어나 동굴의 입구를 향했다. 뒤에서 콩이가 쫄래쫄래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텁텁텁텁. 검은색 젤리가 거친 돌바닥에 부딪혔다. 박문대가 동굴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을 때 보인 것은 회색 하늘이었다. 흐릿하고 먹구름이 낀 우울한 하늘. 가끔 지나가는 새들만이 유일한 생명체였다. 박문대는 축축하고 이끼 낀 바위틈에 발을 올려놓고서야 실감할 수 있었다. 이곳은 2023년의 영국이었다.
"여기는 좀 다르네요. 100년 전에는 화창했는데."
어느새 다가온 신재현이 고개를 내밀며 중얼거렸다. 주단의 손을 잡은 채였다. 박문대는 뒤를 돌았다. 눈이 마주쳤다. 신재현이 왼손을 들었다. 검지에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두 개였다. 박문대는 눈을 크게 떴다.
"너…!"
"새일 때 발에 걸어 놨지. 잃어버리면 안 되잖아요?"
"…줘 봐."
박문대가 신재현의 손에서 반지를 빼앗았다. 하나는 신재현 손가락에 끼우고 하나는 자신에 손에 넣었다. 이거 프러포즈에요? 신재현이 물었다. 그렇게 되나? 생각 없이 한 건데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박문대는 부정하지 않았다. 어쨌든 같이 살아야 하는 건 맞았으니까. 신분도 없는 놈인데 혼자 둘 수는 없었다. 무슨 짓을 할지 모르기도 했고.
갑작스레 배우자가 생기긴 했지만 아무래도 좋을 일이었다. 뒤를 따라오던 채율이 물었다. 우리 이제 어디 가요? 아니, 아이 셋에 강아지 하나도 추가로. 급격하게 많아진 가족 수에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하루아침에 유부남 대학생이 되다니…그것도 대가족이다. 이런 게 팔자라는 건가. 그것을 빤히 쳐다보던 청려가 물었다. 왜 그래요? 아무것도 아니다. 밥이나 먹자.
그들은 박문대가 머물던 여관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우선 휴식을 취해야 했다. 해변에 여섯 개의 발자국이 남았다. 하나는 강아지 발자국이었다. 동쪽에 뜨는 해가 그들을 비추었다. 햇빛이 반짝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