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신재현, 그리고 너와 나의 바다
*이세진, 선아현이 박문대 친구들로 등장합니다.
*쓰다 보니 뭔가 많이 바뀌었지만 기본 틀은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입니다!
눈 떠보니 낯선 천장이라면 다른 세상인 게 국룰 아닌가? 나는 아니였다.
별다를 일 없이 흘러가는 내 인생에, 너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이 세계에 흐른 균열이다.
이 학교에는 도서관이 두 개였다. 쓰지도 않는 도서관을 두 개씩이나 둔다는 데에 박문대는 꼴값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곧잘 도서관을 찾았다. 본관 도서관은 난잡하다는 말이 어울렸다. 도서관답지 않게 왁자지껄했고, 아이들이 넘쳐났다. 크게 책에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고, 조용한 곳이 필요했기에 자연스레 발걸음은 별관 도서관으로 향했다. 별관은 불이 잘 들어오지 않았다. 불은 깜박였고, 먼지가 날렸다. 그래도 나름 창으로 들어오는 볕과, 오래된 책들의 냄새, 나무 책상 삐걱대는 소리가 나름 운치 있다고 박문대는 생각했다. 가끔 박문대는 그곳에 누워 잠들곤 했다. 먼지를 대충 털고 의자에 앉으면 오랜 시간 손님을 받지 못한 의자가 삐걱삐걱 모양을 잡았다. 괜스레 노곤해진 박문대는 가끔 그곳에서 잠을 청했다.
그리고, 점심시간을 딱 10분 남기고 눈을 뜬 박문대는, 책상 위 난생처음 보는 책을 마주했다.
“……?”
참고로 박문대는 이 도서관에서 책 한 권 꺼낸 적이 없었다. 잘 빠진 검은 가죽 표지에는 제목하나 없었다. 박문대는 괜스레 오싹함을 느끼며 책을 집었다.
『공병 문고』
가죽 표지의 내부, 흰 내지에 흘림체로 적혀 있었다. 이게 뭐냐. 박문대는 책장을 휙휙 넘기며 생각했다. 제목과 같은 글씨체가 빼곡히 들어앉아 있었다.
“일기?”
박문대가 글을 읽으려던 순간,
텁.
희고 기다란 손이 책을 덮었다. 고개를 들자 자신을 응시하는 남자가 있었다. 심해를 닮은, 짙고 푸른 눈이 자신을 빤히 보고 있었다. 어리벙벙하게 그를 보던 박문대는 황급히 책에서 손을 떼었다. 미안,
“네 거인지 몰랐어.”
“괜찮아요.”
그는 눈을 감으며 웃었다. 눈이 슬쩍 감겼다. 입꼬리가 호선을 그린다. 푸스스 가벼이 웃는 그에게서 왜인지 눈을 뗄 수 없었다. 가볍게 답한 그가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박문대는, 자신을 바라보는 상대를 똑같이 응시했다.
“이름이 뭐예요?”
“…박문대. 넌?”
“신재현.”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오묘했다. 박문대는, 언제고 남들의 속내를 잘 읽어내는 축에 속했다. 그들의 시선, 말투, 행동 하나하나 모두 간파할 여지를 주었고, 그는 필요하다면 언제건 그들을 이용해낼 수 있었다. 소위 박문대는 ‘정치질’을 잘했다. 그런데 지금 앞에 앉은, 자신을 재현이라 일축한 이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자신을 바라보는 저 오묘한 눈. 입은 웃고 있지만, 상대를 낱낱이 훑는 저 눈. 박문대는, 생전 처음으로 알 수 없는 상대에 대해 호기심이 생겼다.
“점심시간 끝나 가는데,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어, 가야지.”
“참고로 일 분 후에 종 쳐요.”
“이런 씨…. 너는 안 가냐.”
욕지거리를 뱉을 뻔한 문대의 면전에 재현이 책을 휘적댔다. 보다시피 뛰기는 힘든 몸이라. 어서 가요, 빨리. 박문대는 빠르게 뛰어 도서관을 나갔다. 아직 맞은편 의자에는 온기가 남아 있었다.
“…내일 여기서 또 봐요.”
문대에게 해야 했던 말이었다. 실수했다, 이 말을 안 했다. 재현은 문대가 있던 자리를 응시하며 조용히 읊조렸다. …내가 말 안 해도 올 거라고 믿어요.
재현은, 문대가 사라진 자리를 한참 동안 보고 있었다. 한참이나.
신재현을 신경 쓸 겨를이 더는 없었다. 박문대는 잰걸음으로 걷다가 뛰기 시작했다. 곧 종이 칠 것이다. 아무래도 박문대는 평범한 고딩1일 뿐인지라, 수업을 거르고선 재현과 대면하고 있을 순 없었다. 박문대의 뇌리에는 겨속해서 재현이 아른거렸다. 반까지 뛰어가는 그 순간에도, 선생님이 무어라 말을 쏟아내는 동안에도. 하교를 할 때에도 재현을 생각했다. 아니다, 그건 생각했다기보단 떠올랐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괜시리 심통이 난 박문대는 마구 뛰기도 해 보았지만 어쨌든 재현을 그를 계속 따라왔으므로 별 의미는 없는 행동이다. 둥실둥실 재현이 눈 앞을 떠다닌다. 왜일까? 정말로, 왜일까. 박문대는 집에 가서도 재현을 떠올렸다. 책장에 꽂힌 검은 책들을 모두 책등이 안 보이도록 돌렸다. 머릿속에선 재현이 웃는 모습이 떠나질 않았다. 말 한마디, 책을 쓸어 내리던 손짓 하나 모두,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그저 내내, 박문대는 신재현을 생각했다.
***
다음 날도 여김없이 박문대는 도서관에 갔다. 한가운데 책상에 재현이 앉아 무언가 열심히 쓰고 있었다. 아마도 어제 본 그 책일 테지. 박문대는 문고리에 올린 손을 떼지도 못하고 멍하니 재현을 바라보았다. 새삼 박문대는 이곳이 생각보다 예쁜 곳이라고 생각했다.
“안 들어오게요?”
“들어, 들어가야지.”
재현이 책에서 눈도 떼지 않고는 물었다. 바보같이 말을 더듬은 박문대는 얼굴을 붉히며 문을 열었다. 재현은 한참 무언갈 쓰다 고개를 들었다. 문대씨는 할 거 없어요?
“음, 딱히…. 근데 왜 너는 나한테 존대 쓰냐.”
“음…. 그냥. 그냥…, 쓰고 싶으니까.”
신재현이 살포시 웃었지만, 박문대는 어쩐지 저 웃음이 슬퍼 보인다고 생각했다.
***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둘은 도서관에서 만났다. 점심시간에 이곳에 오는 것은 둘만의 암묵인 룰이 되었다. 그곳에서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계속 함께 있었다. 박문대는 가끔 신재현을 흘끗댔다. 재현도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가끔 눈이 마주치면 재현은 놀란 듯 눈을 홉떴다가 싱긋 웃어 보였다. 그러면 박문대는 얼굴이 벌개져서는 고개를 푹 숙였다. 미친놈, 저 미친놈. 왜 그렇게 웃어? 하고 박문대는 생각했다.
***
“문대문대, 자꾸 점심마다 어딜 그렇게 가?”
“으응…! 문대 요새 계속 점심 안 먹더라…!”
이세진과 선아현. 중학생 때 처음 만나 같이 고등학교에 올라온 놈들이다. 하드 하나씩 물고 땀을 바작바작 흘리는 꼴이 어디서 운동이나 격하게 하고 온 모양새다. 그러면서 둘이 꼭 붙어 있다.
“…너네 안 덥냐?”
특유의 티벳여우 표정을 지으며 문대가 물었다.
“쓰읍, 문대문대. 우리가 먼저 물었거든?”
이세진이 단호하게 한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뭐, 그냥 있는 거지 뭘 또 그렇게까지…”
“요새 수상해 아주? 점심시간마다 사라지질 않나, 좋다고 실실대고 다니질 않나. 생전 그런 적 없던 애가 그러니까 너무 수상해 정말?”
“맞아…! 요새 문대 뭔가 전이랑은 달라졌어…! 그, 그래도 웃고 다니는 거 보니까 좋다고 생각해…!”
이세진이 입술을 툭 내밀고는 그렇게 말하면 내가 이상해지지 않느냐 항의했다. 선아현이 좋다고 배시시 웃었다.
“그래서? 그래서 뭔데?”
말을 하다 말고 허를 찌른다, 이 자식들이…. 선아현도 이세진에게 동조했는지 얼굴을 디밀고 열심히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무것도 아니니까 신경 꺼라.”
“싱거워! 너무해!”
고개를 돌려버린 박문대 뒤에서 세진이 아현에게 의미심장한 얼굴을 지어 보였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를 일이다.
***
4교시를 마치는 종이 치고, 당연하다는 듯 박문대가 벌떡 일어났다. 따라서 세진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현이 자신을 불안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세진은 크게 웃으며 엄지를 들어 올렸다.
“아현아현~ 괜찮다니까! 가자!”
“응…!”
아현이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살금살금 문대를 따라가기 시작했다.그리 큰 학교도 아닌지라 어디를 가는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시간차를 두고 문대를 쫄래쫄래 따라간 결과, 존재만 알고 있던 도서관이 나왔다.
“밥도 거르고 맨날 여기 온건가?”
“쉬잇!”
저 앞에 멀뚱이 허공을 보고 서 있는 박문대가 보였다.
“문-”
“없다.”
문대를 부르려던 세진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입을 다물었다. 세진과 아현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왜… 없지.”
세진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쟤가 지금 무슨 얘길 하는 거야?
“아무도 없는 데에서 뭐 하는 거지?”
“그러게…. 어떡해? 불러 볼까…?”
둘은 난처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
없다. 신재현이 없다. 문을 열었고, 늘 있던 대로, 하던 대로 재현이 자신을 맞아 주어야 했다. 텅 빈 그곳에는 먼지만 하늘하늘 날리고 있었다. 그는 침음을 삼켰다. 없을 리가 없었다. 문고리에 걸쳐 있던 문대의 손이 툭 추락했다.
물론, 없을 수 있다. 괜찮다. 우리가 뭐 여기서 모이자고 약속한 것도 아니고, 그 애가 여기 올 만한 이유는 전혀 없다. 나 때문이라기엔 우리는 그 어떤 것도 나눈 것이 없었다. 아는 것이 없었다. 아는 거라곤 서로의 이름뿐이다. 그런데 뭘 아쉽다고 지금….
“…문대-!”
타닷 소리와 함께 순간 뒤통수에 힘이 실렸다. 세진이 문대를 뒤에서 와락 끌어안았다. 휘청대면서도 그의 시선은 앞을 향하고 있었다.
“…! 너…, 괜찮아?”
“뭐가? 아무렇지도 않아”
박문대가 몸을 돌렸다. 이곳에서 멀어지고 싶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하고 세진이 문대를 다시 돌려세웠다. 걱정스러운 눈 두 쌍이 보였다. 이것들, 따라온…
“너 지금 울고 있잖아!”
뭐?
박문대는 손을 올려 얼굴을 더듬었다. 볼이 축축했다. 세진이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아현이 후다닥 손수건을 꺼냈다. 이를 악문 박문대는 제 얼굴을 벅벅 쓸었다.
아…. X발. 괜찮은 게 아니었네….
***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박문대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고, 아무 데도 가지 않았다. 둘은 박문대의 성격을 알기에 대충 그러려니 받아들였다. 그리고 현실로 돌아왔다. 점심시간에 어디 가지 않고 같이 점심을 먹는, 공 들고 설치면 싫다고 빼면서도 끼워 놓으면 잘하기만 하는, 그런 그들이 알고 있는 평범한 박문대.
“흠. 역시 문대가 좀 이상해.”
“나,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아현이 빠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세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렇지!? 내가 잘못 본 거 아니지!?
“요새 말수도 더 적어지고.”
“멍때리는 것도 들었고…!”
“이상한 헛소리 하고!”
“전에는 갑자기 울었잖아…!”
“아무래도 문대가 미친 것 같지?”
“그러니까….”
잠시 정적이 찾아왔다. 세진은 세진대로, 아현은 아현대로 고민을 시작했다. 그 정적을 깬 것은 아현이었다.
“그 도서관…, 거기에 뭐가 있는 거 아니야…?”
“오?”
반짝.
세진의 눈에 이채가 띤다.
“우리…, 가볼까!?”
둘의 눈이 마주쳤다.
“아마 우리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고?”
“…고.”
***
점심 종이 치고, 둘은 같이 밥 먹자고 온 박문대에게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슬그머니 물러섰다.
“튀엇…!”
우다다다.
고등학생이면서 180이 넘는 거대한 이들이 마구 복도를 달려나가니 무슨 모세의 기적처럼 아이들이 쫘악 갈라졌다.
“…뭐야?”
박문대는 쫓아갈 생각도 없었다. 또 지들끼리 뭘 꾸몄겠지, 싶었다. 밥 먹기는 글렀구만. 박문대는 터덜터덜 자리로 돌아갔다. 턱을 괴고는 창 밖을 응시했다. 별 생각 없이 하는 습관이다. 그리고는,
쿵!
앞줄에서 하하호호 즐겁던 애들이 놀라 뒤를 쳐다보았다. 까만 머리통 하나가 책상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미친건가 생각하고 있는데 다시 까만 머리통이 펄떡 일어났다. 놀란 아이 하나가 움찔 뒤로 물러났다.
“박, 박문대?”
“저기… 괜찮아?”
“…김 나는데?”
“…”
“…저기?”
“어…괜찮으니까너희할거해…”
순식간에 말을 쏟아낸 박문대가 다시 스르륵 머리를 숙였다.
‘뭐야….’
자기네들끼리 시선을 주고받은 아이들이 다시금 본인들의 일에 열중할 때,
‘개쪽팔린다….’
박문대는 책상에 머리를 박고 화끈하게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고 있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습관적으로 창밖을 보았고 하늘에 신재현이 오퍼시티 50%로 보였을 뿐이다. 해에도! 구름에도! 그냥 파란 하늘에도! 문대씨~하고 웃는 신재현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심지어는 저기 운동장에서 공 차는 신재현들이! 산책하는 신재현들이! 자신을 향해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눈을 감으면 재현이 빙글빙글 돌아다녔다. 안녕, 하고 웃는 모습이 빙글빙글빙글…. 눈을 뜨면 여기저기에….
‘박문대 니가 정말 미쳤구나….’
쿵. 문대의 머리가 다시 책상에 박혔다.
***
그렇게 박문대가 미쳐가는 사이.
“이쪽이지?”
“으응, 맞아.”
끼익.
오래된 문이 비명을 지른다. 문에 있는 유리로 안쪽을 훑어본 아현이 문을 열어제끼려는 세진을 만류했다.
“안에 누가 있어…!”
둘은 잠시 불안한 시선을 주고받다가, 문을 열었다. 덜컥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끼이익 돌아갔다.
***
“문대!”
“왜?”
“아니, 거기 가봤는데,”
세진이 부루퉁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어디?”
“거기, 맨날 문대가 가던 도서관…!”
“와, 박문대 갑자기 관심 주는 거 봐, 섭섭하다?”
“그래서 거기가 왜?”
“거기 있는 사람이 너 찾더라.”
…어라. 문대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뜨였다. 진짜?
“어, 진짜… 야! 어디가! 야! 박문대!”
순식간에 박문대가 그들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둘은 의문스러운 눈길을 주고받을 뿐이었다.
***
“허어, 허억….”
그가 뛰어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그 도서관이었다. 박눈대는 눈앞의 나무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신…재현….”
있다. 신재현이 있다. 몇 번이고 생각했던 신재현이 눈앞에… 있다. 이건 꿈이 아니다. 현실이고, 신재현이 내 눈앞에….
“…왜 그날은 안 왔어? 그리고… 그 뒤로도 계속….”
“아팠거든요, 그날.”
듣고 보니 재현이 좀 초췌해진 것도 같다. 아, 하고 박문대는 침음을 삼켰다. 재현이 활짝 웃었다. 그날 둘은 번호를 교환했다. 재현이 연락하자고 말했고, 박문대가 알겠다고 답했다. 재현이 종이를 찢어 번호를 써 건넸다. 작은 그 종이를 꼬깃꼬깃하게 쥐고, 박문대는 왜일지 모를 두근거림을 느꼈다.
***
“…음?”
재현은 일기를 쓰고 있었다. 다시 박문대를 본 것을 세세하게 적어 놓고 있었다. 잊을 수도 없었으며, 잊어도 안 되니. 그리고 그때 타이밍 좋게 폰이 울렸다.
-나
-박문대다
-이 번호로 저장 좀
재현이 웃었다. 제 시선에 걸리는 까만 머리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웃으며 재현은 박문대를 생각하다가, 폰을 들었다.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저장했어요.
답이 없었다. 재현은 참을성 있게 문대를 기다렸다. 무슨 말을 할까? 만면에 웃음을 띠고서 재현은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문대의 답을 기다렸다.
-그래
재현이 웃었다.
***
그날 밤, 재현은 문대에게 연락하기 위해 다시 폰을 들었다. 이제 학교가 아니라 밖에서도 만나자고 하려고.
-자요?
순식간에 1이 사라졌다. 재현의 얼굴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되게 빨리 읽네요
-기다렸어요? 내가 연락하기를?
-아니?
기다렸네.
재현이 기분 좋은 얼굴로 웃었다. 보내자마자 사라진 1도, 그래서 무슨 일이냐 묻는 저 고민한 흔적이 보이는 연락이. 재현은, 문대씨가 나를 정말 좋아하네, 하고 생각했다. 문대씨는 어떤 표정일까? 재현은, 문대의 표정을 상상해보며, 이 밤이 조금 더 늦게 지나기를 빌었다.
***
“…흐, 흐흐.”
박문대가 지친 몸을 털퍽 침대에 뉘었다.
“미치겠네, 진짜….”
그는 방금까지, 재현과 있었다. 만남은 속전속결로 이루어졌고, 누굴 만나고 몸 부대끼며 노는 것을 싫어하던 자신이었건만, 재현은 왜인지 자꾸만 보고 싶었고, 계속 같이 있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문득,
-…다음에 또 볼래?
-…좋아요.
헤어지기 전 대화가 떠올랐다. 박문대는 이 약속도 확정시킬 심산으로 재현에게 연락했다. 근데 진짜, 뭐라 보내야….
-집에 잘 갔냐?
-그, 다른 게 아니고
-아까 얘기한 건 언제 만날 건데?
-음
-금요일 저녁에 볼래요?
-저녁에 기차 타고 가서 2박 2일 어때요?
박문대는 좋아, 하는 문자를 보내려다, 다시 지웠다.
-그냥 토요일에 보자.
-그래요
문대는 아까 전의 재현을 떠올렸다. 큰 전광판에 넋이 팔린 그 모습을. 그리고,
‘왜?’
‘…아니, 그냥. 금발도 잘 어울리겠다 해서.’
‘설마 나?’
‘네, 문대씨.’
‘…나도 고등학생인데 염색은 좀 그렇지 않냐…? 탈색까지…. 수능 끝나면 한번 해볼 수도 있겠네.’
‘음, 그렇구나. …수능 끝나고면… 그럼 나는 못 보겠네.’
작게 중얼거리던 그 말을.
“아이씨….”
박문대가 거칠게 머리를 털었다.
***
그리고, 토요일 아침.
“왜, 안 오지?”
재현이 몇 번이고 본 시계를 다시 확인했다. 좀 늦네.
“신재현!”
“아, 문…, 어?”
그리고 재현은 보았다.
노랗고… 동그랗고… 휘날리는….
“어!?”
***
덜컹.
“흡,”
“…”
덜컹덜컹.
“흐,흡”
“…”
덜컹덜컹덜컹.
“…그만 좀 웃지?”
“하하! 미안해요, 바로 이렇게 머리를 바꿔 버릴지는 몰랐는데.”
재현은 신이 난 듯 웃었다. 박문대는 붉어진 얼굴을 심통 난 듯 구겼지만, 어쨌든 저렇게 웃으니 뭐가 됐든 좋다고 생각했다.
“근데 왜 갑자기 금발을 했어요?”
“너 때문은 아니야.”
“그런 말 안 했는데”
“컥”
“나 때문이구나”
“아니라니까”
“내가 신경 쓰였어요?”
“아니”
“신경 썼구나.”
“…”
“…좋다.”
멈칫. 박문대는 머리를 피하려다 말았다. 신재현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그래.하고, 박문대는 그냥 머리를 내어 주기로 했다.
***
“여행은 오랜만이라, 뭘 해야 할지 모르겠네.”
재현이 중얼거렸다. 그래서 우리 어디 가는데? 문대가 물었다.
“바다”
“바다?”
“응, 바다”
딱히 어디에 가고 싶던 것은 아닌지라, 문대는 그냥 고개나 끄덕였다. 쟤가 알아서 하겠지, 뭐.
“…그건 그렇고, 그만 좀 쓰다듬지? 내가 개도 아니고…”
“그렇다고 치기엔 너무 편하게 머릴 내주고 있는데”
“…”
“하하!”
미치겠네…, 진짜.
벌게진 얼굴의 박문대는 슬쩍 몸을 돌리는 것으로 작은 복수를 했다. (바보)
***
“…예쁘다.”
“…그러게.”
밤바다가 달빛을 받아 빛났다. 발에 까끌까끌한 모래가 닿았고, 선선한 바닷바람이 불었다. 슬쩍 본 재현의 얼굴은 낮의 열기 때문인지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그래, 진짜 이쁘긴 하네. 박문대가 홀로 중얼거렸다. 뭐라고요? 재현이 고개를 돌렸다.
“…아니, 아무것도.”
“싱겁긴.”
둘은 한참을 먼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박문대는, 어쩌면 이 순간이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좀 앉을까.”
“그래요”
밤바다는 생각보다 차가웠다. 차가운 바람, 차가운 모래. 그리고, 우리 둘.
밤바람이 우릴 몇 번이고 간질였다. 신재현은 멍하게 바다를 보고 있었다. 별이 총총히 뜬 그 광경은 마치 그림 같았다.
“…근데, 왜 바다에 온 거냐. 다른 곳도 많을 텐데.”
“음, 그냥. 약간의 로망이랄까요…. 다른 곳은 다 가봤거든.”
“…”
“…그리고 마지막에는 여행으로 끝내는 게 좋아서.”
신재현이 중얼거렸다. …얜 가끔 내가 없다는 듯이 굴더라….
“…마지막이라니?”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 마지막이라는 건 아마도, 췌장암을 말하는 거겠지. 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나도 멍하니 앞을 보는 것을 택했다.
“내가 낫길 바라요?”
“…당연할걸, 무슨….”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어?”
“옛날 어느 부족에서는 아픈 부분을 동물의 그 부분을 먹으면 낫는대고 생각했대요. …그래서, 그냥.”
“…”
“하하! 그렇게 놀랄 필요 없어요. 진짜 내가 가져갈 것도 아니고.”
“…니가 안 죽을 수 있다면 가져가도 좋다고 생각해”
“…뭐라고요?”
모래사장을 손으로 짚었다.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빠져나가고, 나는 그대로 몸을 틀어 신재현과 가까워졌다.
“그렇게 해서 니가 안 죽을 수 있다면-”
내 의도를 눈치채었는지, 신재현의 눈이 감겼다.
-네가 내 췌장 가져가도, 괜찮을 것 같아.
입술이 닿았다.
서늘한 바람이 우리를 감싸고, 흐드러진 별빛이 우리를 비춘다. 눈을 감은 신재현의 속눈썹이, 아래로 바짝 내려앉아, 파르르 떨렸다. 모래를 짚지 않은 손으로, 재현의 얼굴을 감쌌다. 공기도, 바람도, 모두 차가웠지만, 왜인지, 너와 닿은 이곳만, 유난히 뜨거웠다.
천천히 떼어지던 입술이 다시 닿는다.
…죽지 마. 죽지 마, 재현아. 내가 췌장 얼마든 떼다 줄 테니까, 그러니까, 네가 안 죽었으면 좋겠어.
입술을 뗀 재현이 머리를 콩 찧었다.
“날 그렇게 걱정하다니 좀 놀라운데,”
“놀리지 마라”
“하하! 문대씨 얼굴 빨개졌어요.”
“추워서 그렇다, 추워서!”
“흐음, 믿어줄게요.”
“고마우니까 나 죽으면 내 췌장 먹게 해 줄게요. 누가 먹으면, 영혼이 계속 그 사람 안에서 살 수 있대요.”
“그거 참 고맙네.”
“음, 나 기억하기 싫어요?”
“아니, 왜 또 그렇게…,”
나는 무어라 말하려다, 그냥 입을 다물었다. 나를 바라보는 신재현이, 너무 찬란하게 웃고 있어서. 그래, 그래서.
나는 네 췌장 안 먹어도, 계속 네 생각이 날 것 같았다.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숙소나 들어가자.”
“문대씨.”
쪽.
“-!?!!??!”
“가요”
“야, 너…,”
재현이 뛰기 시작했다. 상황 파악이 되기도 전에, 간단히 내 뺨에 입을 맞춘 신재현이, 저 멀리 달아났다.
“야! 거기서! 신재현!”
“아하하!”
숙소에 들어가면 반드시 복수하겠다는 생각을 하며 박문대는, 붉게 물든 얼굴을, 자세히 말하자면, 재현의 입술이 닿은 그곳을 문지르며, 재현을 따라 달렸다.
저 멀리 바다 위로 유성이 긴 꼬리를 흘리며 떨어졌다.
***
“음”
반복되는 삶은 어떠한가.
내가 아는 사람이 나를 알지 못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재현은 살포시 검은 책 한 권을 책상 위에 올렸다. 그 앞에는 볼이 눌린 채 세상모르고 자는 사람이 있었다. 재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처음 그와 만난 것은 순전히 우연이였다고 할 수 있겠으나, 그 이후에도 그와 내가 만난 것은 우연이라 할 수 있는가?
처음은 어떻게 시작했더라.
문대야, 를 부르다가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박문대는, 내가 없는 또 다른 세상에서, 나이를 먹고 늙어가며 다시 살아가겠지.
“문, 문대…, 문대…씨.”
입은 쉽게 떼어지지 않았다. 나는 박문대를 어찌 불러야 하는가?
사락.
재현이 문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끝에서 흘러내렸다.
“문대씨.”
시간은 많다, 그리고 나는 당신을 어떻게든 부를 수 있겠지.
“근데 왜 너는 나한테 존대 쓰냐.”
“음…. 그냥. 그냥…, 쓰고 싶으니까.”
내가 아는 당신은 나보다 더 컸을 테니까. 내가 아는 당신은….
아팠다. 물론 췌장암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음에도, 가끔 그 고통에 온몸이 잠식당할 때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나는…
“보고 싶다.”
연락처를 적은 종이를 계속 만지작거렸다. 며칠 만에 학교인가.
…그리고, 그건 둘째 쳐도….
‘문대씨가 올까.’
“…신재현!”
사실은,
“…왜 그날은 안 왔어? 그리고… 그 뒤로도 계속….”
“아팠거든요, 그날.”
그때 때마침 와줘서 기뻤어요.
그리고 그 후,
“염색? 염색은 딱히 안 내키는데”
“…그, 너 때문에 염색한 건 아니야.”
문대의 머리 색이 노란색이 된 날, 재현은 확신했다. 그리고 그다음, 바다에서 있었던 일까지도 말이다.
언제고 당신은 나를 사랑하는구나.
“…음.”
괜한 걱정을 했다는 생각을 했다. 이 순간의 당신의 세상은 언제이건 나로 가득 찰 테니까. 잊히지 않는 흔적을 남기고, 당신은 다음 생에서도 나를 사랑할 거라서.
‘물론 나도, 마찬가지고….’
“모든 생에서 나에게 와요, 문대씨.”
박문대는 곤히 자고 있었다. 선선한 아침 바람이 창을 넘어 들어왔고, 창밖으로 빛나는 바다가 그들을 맞아 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