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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결혼식

그때, 그 애를 만난 것은 내 인생에서 가히 최고의 행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재현아, 오늘 전학생이 올 텐데 네가 좀 잘 챙겨 줄 수 있지?”
“……그럼요, 제가 안 챙기면 누가 챙길까요.”
어른이 하는 말이라 거절은 못하지만, 은근히 뼈가 들어있는 말에 선생님이 머쓱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이내 재현의 어깨를 툭툭 치고 복도를 빠르게 걸어갔다. 팔에 서류가 가득인 걸 보니 일이 있는 듯했다. 그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지만.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2주 후. 이 시기에 전학 오는 건 정말 불가피한 일이 있어야 했다. 3학년은 전학 금지라는 말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대학 입시가 코앞으로 다가오는데 학교를 옮겨 중요한 시기를 말아먹고 싶어하는 이는 없는 게 당연했다.
설마…… 강전은 아니겠지? 어디선가 스멀스멀 밀려오는 불안감에 재현의 눈이 절로 가늘어졌다. 최악을 생각해 버리니 그 뒤를 따라 온갖 안 좋은 생각이 떠내려 왔다. 생각의 범람에 잠긴 그를 꺼낸 건 한 학년 후배인 채율이었다.
“형, 여기서 뭐해요?”
“채율아.”
“최태준 또 사고 쳐서 교무실에서 혼나고 있대요.”
재현은 한숨을 쉬었다. 최태준이 혼나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그 애랑 같이 다니는 저희들을 선생님이 고깝게 볼 수 있다는 게 문제지. 몇 번 떨구려고 해봐도 득달같이 달라붙어 오니, 마음이 여린 후배들은 금방 다시 붙어 다니기 일쑤였다. 그때까지는 사고를 쳐도 교무실까지 불려가진 않았고 말이다. 그러나 2학년 들어와서는 사고를 더 많이 치고 다니기에 후배들도 이제는 슬슬 불편한 눈치지만, 본인은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붙어 있었다.
“곧 종 칠 테니까 일단 들어가 있어. 잠깐 담임한테 상담 좀 받고 들어 갈게.”
“아, 네!”
채율은 고개를 끄덕이고 2학년 교실로 쏙 들어갔다. 재현은 미간을 짚으며 교무실로 향했다. 아직 시험 기간은 아닌지라 교무실에는 출입 제한이 걸려 있지 않았다. 최태준은 이미 다 혼난 건지 바닥에 엎드려 뻗쳐를 하고 있었다. 재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그러나 최태준에게는 다 들리게) 그를 지나쳤다.
담임의 손님은 주로 그였는데, 오늘은 선객이 있었다. 3년 간 다니면서 한 번도 못 본 얼굴인 걸 보니 아마 오늘 온다던 전학생인 듯했다. 재현은 담임이 그를 잘 볼 수 있는 곳에 섰다. 그래야 전학생을 빨리 보내고 상담 좀 하다가 수업 들어 가지……. 상담이 필요해서 온 게 아니라 최태준이 뭐하나 보려고 온 것이었기 때문에 여기서 쓰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재현의 손해였다.
“어머, 공부 잘 했네? 전교 상위권이네?”
“학교를 많이 옮겨 다녀서, 열심히 했어요.”
“학교? 그러네……. 이번이 다섯 번째 전학이구나? 부모님이 자주 옮겨 다니시니?”
“네. 집안 사정 때문에 전학을 좀 많이 다녔어요.”
“그래, 모르는 건 재현이한테 물어봐. 재현이도 공부 잘해~. 공부 잘하는 애들끼리 붙어 다니면 좋지.”
“아, 하하, 네…….”
전학생의 목소리에서 ‘그렇군요 그렇지만 전 생각이 없어요……’가 고스란히 묻어 나왔다. 뒤에 당사자가 있다는 걸 모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대뜸 모르는 누구랑 친하게 지내라는 말을 들은 전학생의 심정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기에 그저 서 있기만 했다. 담임은 덕담을 몇 마디 건네고 전학생을 놔주었다.
그리고 그때가 되어서야 전학생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박문대.
‘이름도 특이하네.’
명찰을 힐끗 쳐다보면서 남긴 감상이었다. 그리고 재현은 박문대라는 전학생도 그렇게 생각했으리라고 확신 아닌 확신을 하고 있다. 그의 시선도 재현의 명찰과 얼굴을 번갈아 가면서 머물렀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시선이 머물렀던 것은 몇 초 되지 않겠지만, 그 짧은 사이에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판단을 마쳤다. 
아, 저 사람은 나랑 동류구나.

 

 

 

 

 


새로 온 전학생, 박문대는 외모로 온지 하루 만에 인기를 끌었다. 학교 밑에 수맥이 흐르는 건지, 이미 잘생긴 학생들이 전체적으로 포진해 있었지만 그게 박문대의 외모를 저평가하진 않았다. 전학 온 첫 날에는 전학생이 잘생겼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튿날에는 여학생들이 그의 얼굴을 보려고 몰려왔다.
굳이 싸가지없게 굴어서 팬들을 떨어뜨릴 이유는 없었기에, 박문대는 먼저 말을 걸진 않아도 걸어오는 말에는 착실히 대답을 해줬다. 그 과정에서 질 나쁜 남학생들이 붙을 뻔했지만……, 어떻게 한 건지 곧 박문대의 머리카락만 봐도 치를 떨었다.
그리고 재현은…… 그저 가만히 있었다. 선생님이 전학생 적응 차원에서 짝꿍으로 붙여 주긴 했지만 그게 박문대가 직면하는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주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박문대도 그건 원하지 않을 것 같고. 놀리면 놀리는 대로 돌아오는 반응이 재미 있었지만, 그게 다였다.
“야, 빠구리 하러 갈래?”
……근데 언제 박문대와 친밀감을 이렇게 쌓았다는 거지?
“……?”
재현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유급을 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래서 같은 학년이어도 다들 그를 형이나 오빠라고 불렀다. ‘야’라는 호칭은 오랜만에 들어보는 종류였다. 그러나 그게 그가 의문을 표하는 이유는 아니었다.
“빠구리 하러 가자니까?”
그래, 저 ‘빠……’라는 단어. 육성으로 저 단어를 내뱉는 애는 정말 처음 봤다. 그것도 그렇고 도대체 뭘 보고 하자고 하는 거지? 우리가 이렇게 가까웠었나? 무엇보다 전학 온 지 일주일도 안 됐으면서? 재현의 머릿속이 어지럽게 뒤엉켰다. 박문대는 반응이 없는 신재현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재미없긴. 나 혼자 하러 간다, 그러면.”
“……! 잠깐, 같이 가요.”
뭐가 됐든 혼자 보내서 사고 치고 담임이 알게 되면 재현까지 혼난다. 적어도 집에는 곱게 돌려보내야 할 것이 아닌가……. 박문대는 신재현의 대답을 듣고 씩 웃었다. 그럴 줄 알았어, 하는 얼굴이었다. 기분이 순식간에 불쾌해졌다. 지금 누굴 본인 같은 저질로 아는 건지……. 그러나 선택권은 없었다.


“음, 이거 맛있다. 이 집 떡볶이 잘 하네.”
그리고 학교 담을 넘은 두 사람은 분식집에서 평화롭게 떡볶이나 먹고 있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사고 안 치니까 좋긴 한데…….
“그런가요.”
오해한 건가? 재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치만 그 단어는 오해라고 하기엔 너무 선명했는데……. 오해는 박문대의 핸드폰이 울리고 나서야 풀렸다.
“여보세요? 어, 엄마. 나 애들이랑 빠구리 하다가 집에 들어갈게. 응, 응. 알았어. 괜찮다니까?”
“…….”
미친 거 아닌가? 재현은 제 옆에 있는 머리통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이제 저 가족 전부 이상하게 느껴졌다. 어떻게 아들이……. 됐다, 더 얘기하기도 싫었다. 몇 분 더 엄마와 통화를 하다가 끊은 박문대는 자신을 미친 놈처럼 보는 재현과 눈이 마주쳤다.
“……뭔데?”
“됐어요.”
“진짜 뭐냐니까?”
“……그렇게 노는 게 뭐가 자랑이라고 부모님한테까지 말해요?”
“뭔 소리야?”
“됐다니까요.”
아니 말을 해줘야 고치든지 말든지 하지……. 궁시렁대는 걸 결국 무시하지 못한 재현은 얼굴을 찌푸리며 ‘빠……’라는 단어를 입에 담았다. 박문대는 그게 뭐 어때서, 라는 얼굴이었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게 빠구린데 왜 유난이냐?”
“……땡땡이요?”
“그래. 도대체 뭘 생각한 건지.”
“됐어요…….”
이상한 눈으로 재현을 쳐다보던 박문대는 떡볶이를 다 먹는 것에 열중했다. 옆에서 오해했다는 것을 깨달은 재현 혼자서 아무것도 못 먹고 넋이 나갔다. 땡땡이 짝꿍이 넋이 나가 있는 동안 야무지게 떡볶이를 다 먹은 박문대는 그런 재현을 주워 집에까지 곱게 데려다 놓았다. 멀쩡한 애 학교 째자고 꼬셔 놨으면 귀가 서비스 정도는 해줘야지, 뭐 그런 생각이었다.
“잘 가라.”
“……잘 가요. 데려다 준 거 고마워요.”
재현이 감사 인사를 하자 문대는 어깨를 으쓱이고 뒤로 돌아 휘적휘적 걸어갔다. 그리고 두 사람은 다음 날 학교에서 만나자마자 급속도로 친해진다.

 


야, 땡땡이 치러 가자.
이제는 최태준이 사고 쳤다는 소리만큼 익숙한 한 문장이 들렸다. 재현은 대답 대신 바깥을 바라봤다. 비가 내리는 중이었다. 담 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지만(두 사람 다 담 넘기 하나는 잘했다), 평소보다 손에 더러운 게 더 많이 달라붙는 게 싫었다. 하려면 할 수 있었지만. 손이야 닦으면 되는 거였다.
문대는 재현의 변명을 듣자 한심하다는 표정이나 지었다. 그럴 거 같아서 몸이 좋지 않다는 거짓말을 치려고 하던 재현은 한숨만 내쉬었다. 
“됐고, 가자. 손에 뭐 안 묻게 도와줄 테니까.”
어떻게 도와준다는 건지, 하는 물음은 문대가 담 위에 걸터앉고 손을 내밀었을 때 휘발되었다.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재현에게 손을 내민 그는 평소보다 들떠 보였다. 그리고 그게 묘하게……. 
“안 잡고 뭐하냐?”
“아.”
비가 오는 날을 좋아하는 건가, 싶었던 재현은 그 손을 잡고 담 위를 넘었다. 재현을 도와주고 본인도 담에서 내려오자 두 사람은 늘 하던 대로 분식집으로 향했다.
“비 오는 날 좋아해요?”
“비 오는 날?”
“네, 아까 좀 들떠 보이길래.”
“비 맞는 걸 좀 좋아해서……. 그게 다야.”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익숙하지 않은 건지, 머쓱함에 귀가 붉어진 문대를 보는 건 꽤나 재미 있었다. 방해하는 사람이 없다면 좋았으련만. 
“야 뛰어!”
안타깝게도 그 둘은 학주에게 걸리고 말았다. 문대가 먼저 떡볶이 컵을 내던지듯 가판대 위에 올려 놓고 뛰었다. 재현도 누가 뒤에 있는지 봤기 때문에 똑같이 컵을 버리고 같이 뛰었다. 학주가 거기 서라며 쫓아왔지만 운동 신경도 좋은 그 둘을 붙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꽤 성공적으로 학주를 따돌린 두 사람은 어느 작은 슈퍼 마켓에 들어가 아이스크림을 샀다. 뛰었으니 당을 충전해야 한다는 문대의 밀어붙임 덕이었다.
“맛있다, 이거.”
“이상한 걸 추천할 리가 없잖아요, 제가.”
“이상하게 신뢰가 안 가더라.”
진짜 너무해요. 그 말을 끝으로 둘은 웃으라 제대로 대화를 못했다. 뭐가 그리 웃겼는지, 눈가에 눈물까지 대롱대롱 맺혔다.
“너 어느 대학 갈 거야?”
“글쎄요, 성적 봐야죠.”
“얼씨구, 전학 왔을 때 담임이 너 전교 1등 놓친 적이 없다고 하던데.”
“하하, 앞으로는 모르는 일이죠. 다른 학교 전교 1등이 왔는데.”
“하긴, 사이 좋게 나란히 공동 전교 1등 할 수도 있는 거지. 안 그래?”
“말도 안 되는 소리네요.”
재현은 공동 전교 1등이라는 소리에 피식 웃었다. 던진 본인도 그저 농담이었던 건지 어깨만 으쓱였다. 한참을 그렇게 웃고 떠들고 있자,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주인 아주머니가 나왔다.
“니들 집에 안 가?”
“……지금 시간이 몇 시죠?”
“저녁…… 5시네. 가야겠다.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인 아주머니는 못마땅한 눈빛으로 둘을 훑어보더니, 혀를 쯧 차고 가버렸다. 남겨진 남고생들만 어리둥절해 했다. 
“우리 뭐 잘못한 거 있나?”
“글쎄요. 굳이 따지자면 몇 시간 동안 가게 앞에서 죽치고 앉아 있었는데 아이스크림 하나 빼고 아무것도 안 산 거?”
“잘못했네……. 다음 번에 올 땐 좀 많이 사가야겠다.”
규모가 작아서 사 갈 것도 없을 텐데……. 재현은 그런 생각을 했지만 주인 아주머니가 어디서 듣고 있을지 모르는 곳에서 입 밖으로 내뱉을 정도로 사회성이 없진 않았다. 문대는 어깨를 으쓱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저녁 먹으러 집 가야지.”
“그래요. 데려다 줄까요?”
“굳이?”
“굳이.”
잠시 고민하던 문대는 마음대로 하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나가는 차에서 음악 소리가 흘러나왔다. 정말로 지나가다가 들은 거라 문대는 무슨 노래인지도 몰랐는데 재현은 그걸 듣고 흥얼거리기까지 했다. 
“무슨 노래야, 그거?”
“브루노 마스의 Count on me요.”
“그거 좋아하나 보네.”
“딱히요.”
“얼씨구.”
“진짠데…….”
문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다가 가방을 황급히 뒤져서 무언가를 신재현에게 내밀었다.
“이거 까먹을 뻔했네, 받아.”
“MP3네요? 산 거예요?”
“산 거면 산 거지. 나 3학년 되면 쓰려고 2학년 때 사 놓은 건데, 막상 3학년 되니까 안 쓰게 되더라. 너 MP3 산다고 해서 주는 거야.”
“사양은 안 할게요, 고마워요.”
“그래, 잘 써라.”
재현이 선물을 좋아하는 티를 팍팍 내자 문대는 피식 웃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집 앞에 주차 되어 있는 차들을 보고 표정이 바뀌었다.
“아.”
“무슨 일이에요?”
“……아니야. 데려다 줘서 고마웠어. 너도 이제 들어가봐.”
“무슨 일이냐니까요.”
“아무 일도 아니야. 잘 가.”
앵무새처럼 했던 말을 반복하는 문대의 모습에 재현은 표정을 찌푸리며 말을 걸려고 했다. 그러나 그보다 문대가 뛰어서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게 훨씬 빨랐다. 그를 붙잡으려고 했던 손은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
재현은 왠지 모를 불안감을 한가득 안고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리고 다음 날 간 학교에는 박문대의 자리가 사라져 있었다. 선생님 말로는 문대가 다시 전학을 갔다고 했다. 재현은 학교를 마치자마자 핸드폰을 꺼내 부재중이나 음성 사서함 문자가 있는지 확인했다.
떨리는 손으로 확인해 본 음성 사서함에는 문대가 남긴 음성 메시지가 하나 있었다.
[미안, 설명도 못하고 떠나네. 인연이 되면 다시 보자. 친구 해줘서 고마워. 나 다시 만나고 싶으면 한국대로 와.]
그게 다였다. 메시지를 다 재생한 핸드폰이 꺼질 때까지 화면을 응시하던 재현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어차피 지금 그의 성적으로는 한국대를 장학금으로 갈 수도 있었다. 한국대 가는 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마 그래서 문대도 그런 말을 한 거겠지. 그러나 원래부터 목표하던 곳은 한국대가 아니었으나……. 이제부터는 한국대였다.

 

 

 

 


반 년 후, 재현은 한국대 본교 캠퍼스에 와 있었다. 놀라운 결과는 아니었으나 기쁘지 않은 결과도 아니었다. 이제 박문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기대를 배신하듯 문대를 실제로 만난 건 개강을 하고도 몇 달이 지난 후였다.
“박문대.”
“……어? 신재현.”
재현은 인문관 복도를 걸어가던 문대를 보자마자 달려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문대가 혼자 다니는 성격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을 지금만큼 해본 적이 없었다. 난데없이 어깨를 콱 잡힌 문대는 불쾌한 기분을 숨기지 않으며 뒤를 돌아봤으나, 상대가 재현이라는 걸 확인하자마자 반가운 얼굴을 했다.
“오랜만이다? 진짜로 왔네?”
“오라고 했잖아요?”
“진짜로 올 줄은 몰랐지, 몇 달도 안 만났잖아 우리.”
“미안하지만 전 도발을 받아들일 줄 아는 성격이라서요.”
문대는 변한 게 없다며 웃었다. 재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게 다였다. 오랜만에 만났을 때 무슨 말을 할지 생각 했었는데 막상 닥치니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의 핸드폰이 울렸다. 문대의 핸드폰이었다. 얼핏 본 저장명은 ‘애인’이었다.
……애인?
“여보세요? 어, 아니, 금방 갈게. 응. 알았어, 갖고 갈게. 더 필요한 건 없어?”
……애인?
“형, 그런 말 할 시간에 내 과제 좀 대신 해줄래? 응, 알았다니까. 끊어. 이따가 봐.”
……애인?
넋 놓고 있는 사이에 그의 전화가 끊겼다. 문대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서 곤란한 얼굴을 했다. 재현은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이 뭘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미안하다, 동거인이 있는데 몸이 아프대. 빨리 가봐야 할 거 같다. 나중에 만날래? 폰 주면 전화번호 찍어줄게.”
“아, 알았어요. 미안해하지 마요. 아픈 사람이 있으면 빨리 가봐야지.”
정신 차려 보니 핸드폰에 문대의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었다. 재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왜 문대의 애인 여부에 제가 신경을 쓰고 있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애인의 성별이 남자라는 건 더더욱 남이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치도록 신경 쓰였다.

 

 

 

 


그리고 평탄하게 몇 달이 흘렀다. 그 과정에서 재현은 친구들도 사귀고, 문대의 애인도 문대의 친한 형으로 소개받고(그 둘은 아직도 재현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둘이 어떻게 친해졌는지도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애인 관계로 발전했는지도 어렴풋하게) 알게 되었다.
……그리고 문대와 그의 애인이 살고 있다는 하숙집에 새로운 하숙생으로 들어가게 됐다. 
“이야, 얼굴 훤칠하니 잘생겼네~.”
“한국대생이라고요? 여기 다 한국대 다니는데 친해지면 되겠다!”
“여친이 없다고요? 진짜요? 말도 안 돼!”
“야야, 오늘 처음 본 사람한테 뭔 질문을 하고 있는 거냐?”
“아 왜, 궁금해서 그렇지.”
“그래, 그만 좀 해라.”
“내가 뭐 못할 말 했나…….”
더불어 신고식도 치르는 중이다.
일이 왜 이렇게 돌아가게 되었냐면, 그의 감정 자각이 시발점이라는 것부터 짚고 넘어가야 한다.
문대와 재회한 재현은 도대체 왜 그가 문대가 애인이 있다는 것과 그 애인이 형이라는 것을 그냥 넘어가질 못하는지 심각한 고찰을 했다. 사실 고찰이라고 하기에도 뭐했다. 내신 빡세기로 유명한 학교에서 삼 년 내내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은 머리는 똑똑해도 너무 똑똑했다. 그는 적어도 친구 사이에서는 그 두 가지를 신경 쓰지 않고, 그러고 싶지도 않아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명석한 두뇌가 가리키는 것은 그가 문대를 좋아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면 이제 언제부터 좋아했는지를 생각해야 했다. 재현은 곰곰히 생각해봤다. 처음 봤을 땐……. 그냥 아무 생각 없었고. 처음으로 땡땡이 칠 때? 음, 그때는 싫어하는 게 맞았고. 문대와는 학교에서 수업을 들었을 때보다 땡땡이 쳤을 때 추억이 더 많았다. 어쩔 수 없었다. 학교 급식이 너무 맛이 없었거든……. 어차피 두 명 다 상위권이라 수업 좀 안 나간다고 알고 있던 게 모르는 게 되는 것도 아니었다.
좋아하는 시기를 고찰하려고 한 시도는 금세 추억 여행이 되어 버렸지만 쓸모는 있었다. 갑자기 불현듯 떠올라 버렸기 때문이었다. 문대가 빛나 보였던 때가. 비가 오던 날이었다. 그리고 떠나버린 날이었다. 운 지지리도 없지. 하필이면 감정을 느꼈을 때가 그때라니. 이러니 지금까지 자각을 못한 거였다. 뭘 시작해보기도 전에 그 사람이 떠났는데 어떡해. 자각도 계기가 있어야 하는 거였다. 계기도 없는데 뭘 자각하는가.
회상을 마친 재현은 일단 기다리기로 했다. 대학교 졸업할 때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애인이랑 헤어진 지 며칠 된 사람 꼬시면 정상참작의 여지는 있지만 애인 있는 사람 꼬시면 가중처벌이다. (욕 먹어서) 팔자에도 없는 장수 하느니 정해진 수명 내에서 알콩달콩 사는 게 훨씬 나았다.
여기까지가 재현의 감정 자각.
다음은 재현의 눈물 겨운 세입자 되기 첫걸음마다.
아무리 대학생이고 성인이라고 해도, 정식으로 만 19세가 된 건 몇 달이 채 지나지 않았다. 부모님 그늘에서 벗어난 지 몇 달 되지도 않았다. 거기다가 그때까지 공부만 했다. 가스비? 수도세? 전기세? 존재는 알아요. 근데 그걸 이제부터 제가 내야 한다고요? 이러면서 어리버리하게 지내다가 부모님한테 손 벌리는 게 일반적인 대학생이다. 재현은 그나마 알바로 돈 벌어서 냈다. 부동산은 말할 것도 없다. 알 거 다 아는 어른들도 사기를 당하고 부당계약을 하는데 사회 초년생이 뭘 알 리가 없었다. 법학도도 아니기에 더 그랬다. 그렇기 때문에 재현은 쫓겨났다. 어디서? 자취방에서. 왜? 집주인이 자기 아들 세 놓는다고 나가라고 해서. 보증금을 뺏기진 않았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해서 어리버리하게 당할 성격은 아니었으나, 주변에 아는 법학생도 없고 법 사전은 읽지도 못하고 변호사 선임할 돈은 더더욱 없으니 그저 당할 수밖에. 문명의 이기가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안타깝게도 그걸 사용할 돈마저 없었다. 그렇게 해서 쫓겨났다. 법 모르는 사회 초년생은 서러운 일이 많다. 주변에 도와줄 사람이 없다면 더더욱.
그리고 두번째 걸음마.
재현의 그런 사정을 알게 된 문대는 분노했다. 당연했다. 그도 똑같이 당했던 전적이 있다. 심지어 집주인도 똑같았다. 수법도 똑같았다. 그는 법학도가 아니었으나, 그의 친구 중 한 명은 법학도다. 한 명은 경찰대 편입생이고. 그리고 다른 한 명은 그저 법에 관심이 많은, 그러나 부동산 법 쪽으로 웬만한 전문가보다 더 전문가다(나중에 듣기론 많이 데여 봤다고 했다). 문대는 친구들에게 부탁해 신재현 좀 도와달라고 했다. 다들 흔쾌히 승낙하고 집주인을 같이 조져주는 중이다.
집주인은 빠른 시일 내 벌을 받을 거 같고, 그럼 남은 건 재현의 거처 문제다. 한 번 등쳐 먹은 사람 다시 못 등친다는 법칙은 없기에 같은 집 들어가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럼 다른 집을 구해야 하는데……. 문제는 학기가 시작한지 몇 달은 됐다는 것이다. 남아 있는 집이 있을 리가 없었다. 설령 있어도, 지금까지 안 나가고 있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굳이 그걸 체험하거나 눈으로 직접 볼 필요는 없었다.
고민하고 있던 찰나에…….
문대가 지내고 있던 하숙집에 자리가 났다 했다. 하숙집에서 살고 있던 4학년 중 한 명이 방을 뺀다고 했다. 사유는 여친과 동거하기로 해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부럽다, 였다. 그 다음에 살았다, 였고. 부럽다는 생각이 먼저 든 시점에서 글렀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재현은 아직 거기까지 자각하진 않았으니 넘어가도록 하자. 아무튼 간에 재현은 무사히 하숙집에 들어가게 됐다. 다행인 점은 연애 금지라 공공연하게 연애질은 안 한다는 점이랄까. 음, 애초에 남남 연애구나?
아무튼 그렇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신고식이라고 해봤자 올드비들의 뉴비를 향한 궁금증 해결이다. 그러니 적당히 대답해주고 짐 풀어야 한다면서 슬쩍 빠지면 아쉬워하면서도 보내준다. 어차피 날은 많으니까. 그러니까 빨리 빠져야 하는데…….
문대가 웃는 걸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어졌다. 이래서 짝사랑이 안 된다는 거다……. 손해 보는 걸 알면서도 그 손해를 기꺼이 감수하고 싶어지니까. 물론 지금은 엄청난 손해를 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런 말을 좀 해줘야 짝사랑이다.
“아, 신재현. 동아리 아직 가입 안 했으면 가입할래? 유레카라고, 사진 동아리인데 아는 사람이 부장이야.”
정정한다. 그렇게까지 손해는 아닌 거 같다.
“아, 그럴까요? 근데 저 사진 찍을 줄 모르는데.”
“괜찮아, 거기 실력 괜찮은 사람들 많아. 가르치기도 잘 가르치고.”
인내하는 자에게는 선물이 온다.

 

 

 

 


동아리는 생각보다 재미없었다. 문대와는 과도 다르다 보니까 동아리에서만 자주 봤는데, 그마저도 친하다는 명목 하에 애인하고만 붙어 있으니 재미가 더더욱 없었다.
아니, 이건 그냥 열 받는 건가. 뭐가 됐든 재미가 없었다.
“자기야, 걔랑은 언제 헤어질 거야?”
“……타이밍 좀 보고. 그래도 요즘엔 거의 같이 안 다니잖아. 동아리는 어쩔 수 없고.”
“빨리 좀 해. 결단력이 이렇게 없어서 어떡할래?”
“네가 내 결단력 해주면 되지.”
첫 문장을 제외한다면 지극히 평범한 연인 간의 대화. 누가 들었으면 염병천병 커플이라고 하면서 지나갔을 법한 대화다. 재현도 그럴 예정이었고. 그러나 대화의 내용이 일차적으로 그의 시선을 끌었고, 이차적으로 남자의 목소리가 너무 익숙했다. 설마, 하며 고개를 돌려 확인해 보니 문대의 애인이었다. 앞에 있는 여자의 이름은 모른다. 같은 동아리였던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어쨌든 중요하지 않아서 넘겨 버렸는데 이게 이렇게 될 줄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이름이라도 외워 놓는 거였는데.
잠시 넋을 빼놓던 재현은 금세 정신을 차리고 몸을 숨겼다. 어차피 자신이 서 있던 각도는 저쪽에서 안 보이는 각도였지만, 만약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그리고 연락처에서 문대의 번호를 찾고 통화 버튼을 누르려던 순간…….
“행복해 보이네, 형?”
“……무, 문대야?”
당사자가 나타났다. 이 경우에는 피해자인가? 재현이 몸을 숨기고 있는 방향에서 나타난 문대는 분노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재현은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핸드폰을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간도 커, 바람이라니. 그것도 내가 볼 수 있는 캠퍼스 건물에서. 여자 쪽도 딱히 모르고 있었던 거 같지도 않고. 그치?”
상대가 변명할 틈도 주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낸 그는 윙스팬 180cm의 자세로 남자의 머리통을 내려쳤다. 그리고 다시 내려쳤다. 그리고 다시 랩을 시작했다.
“내가 존나 만만했나봐? 사귄 지 몇 개월이나 됐다고 바람을 펴? 어쩐지 정신이 딴 데 팔려 있다 싶었어. 무슨 일인지 알고 속은 내가 병신이지.”
자학은 좋지 않았다. 근데 문대가 욕을 잘하는 건 반전 매력이었다. 그래, 사람도 반전 매력 하나 가지고 살아야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싸움이 끝나가는 게 보였다. 언제까지 숨어 있어야 하나, 싶었는데 잘 됐다. 싸움 끝나면 한 10분 있다가 나가야지……. 
그렇게 더 죽치고 있다 보니 문대 혼자 남게 되었다.
“하…….”
재현은 문대를 힐끔 봤다가 놀라 뛰쳐나갔다. 물론 모르는 척하는 건 잊지 않았다.
“무슨 일이에요? 누가 울렸어요?”
“아니, 아니……. 그냥. 애인이 바람 펴서.”
“아…….”
솔직히 여기선 누가 와도 올바른 리액션을 해주진 못한다. 애초에 정답이 없기도 했고. 그래서 재현이 택한 방법은 그저 옆에 있어주기였다. 의외로 사람들이 이걸로 위로를 많이 받는다. 그리고 재현은 문대도 이걸로 위로를 받을 거라고 확신 아닌 확신을 하고 있었다.
문대는 재현이 그저 옆에서 들어 주기만 하자 이내 전남친 욕을 줄줄 쏟아냈다. 처음엔 그래도 애인이라고 하더니 나중 가서는 남친이라고 했다. 재현은 싸움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문대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입을 닫았다.
“다 했어요?”
“……응. 고마워, 들어줘서.”
“아니에요.”
그리고 정적.
재현은 이 정적을 깨고 싶었다.
“나랑 사귀어 보는 건 어때요?”
“……뭐?”
그렇다고 이렇게 깨고 싶다는 건 아니었는데……. 재현은 느껴지는 아찔함에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하던 말은 계속 해야 했다.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다잖아요. 거기다가 나 정도면 꽤 생긴 편인데. 어때요?”
문대는 헛웃음을 흘렸다.
“꽤가 아니라 좀 많이…….”
아 태클 걸 부분이 그쪽인가요. 재현은 순간 어이없음을 느꼈다. 본인도 만만치 않지만 상대방도 만만치 않았다. 그게 마음에 들었던 거지만. 문대가 마음에 든 건 재현뿐만은 아니었던 건지 곧 문대의 입에서 승낙의 말이 나왔다.
“그래, 한 번 사귀어 보지 뭐.”
“그래요.”
둘 중 그 누구도, 이렇게 이어진 인연이 거진 10년을 갈 지 몰랐다. 그리고 연애를 지지고 볶고 할 줄은 더더욱.

 

 

 

 


“나 해외 연수 가.”
폭탄이 갑작스레 던져졌다. 오후 9시. 공무원은 진즉에 퇴근했고, 회사원인 재현은 집에서 일처리를 하고 있는 시간. 재현은 열심히 엑셀 단축키를 두드리던 손을 멈추고 문대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가 아는 한 박문대는 공무원이었다.
“……공무원이 해외 연수도 가나요?”
“아니, 사진으로.”
“……언제부터요?”
“다음 달 초.”
2주도 안 남은 시기였다. 재현은 아예 노트북을 닫고 몸을 문대 쪽으로 돌렸다. 
“……언제 알았는데요.”
“저번 주.”
재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번 주면 한창 회사 프로젝트로 예민해져 있을 때였다. 지금에서야 얘기를 꺼낼 만했다.
“어떻게 할 거예요?”
“……뭘.”
“롱디할 거예요?”
“롱디해야지.”
“어디 가는데요.”
사실상 이 대화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이었다. 시차가 안 맞으면 잘 사귀던 커플도 깨질 위험이 있었다. 하물며 위태로운 이 커플은 어떨까.
“……유럽.”
“헤어져요.”
“야, 신재현.”
“알잖아요,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거.”
“…….”
“헤어져요. 거기서 아무도 안 만나고, 돌아왔을 때 나에 대한 마음도 여전하면 그때 다시 사귀면 돼요.”
해외에서 사는 게 얼마나 힘든데요. 적어도 신경 쓸 거 하나는 두고 가야죠. 이런 말을 했다간 문대와 또 싸울 게 뻔했기에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다. 그러나 이미 골이 나 버린 문대는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아예 헤어지자는 게 아니잖아요.”
“……쉬운 결정이 아니라는 거 알고 있어.”
“알아주니 고맙네요.”
“……네 말대로 하기 싫어.”
“내 제안이 제일 합리적이라는 거 알고 있잖아요.”
“……알아.”
“다행이네요.”
문대는 마른 세수를 하며 한숨을 쉬었다. 재현은 웃었다. 그리고 노트북을 다시 켜 엑셀을 작업하기 시작했다. 지금 다시 제 애인을 보면 가지 말라고 붙잡을 거 같았다. 그래서 문대가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도 몰랐다.
출국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공항은 번잡했다. 항상. 가끔 가다 생각해보면 이 많은 사람들이 다 어딜 가는 걸까, 싶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애인이 섞여 있었다. 차이점을 꼽자면 재현은 문대의 목적지를 알고 있다는 걸까. 배웅은 아까 전에 했지만, 아직 미련이 남아 있었다. 그는 앞에 놓인 커피를 들이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출국일이 주말이라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았다.

 


“나 결혼해.”
“그거 말해주려고 온 거예요?”
“……응.”
문대는 착잡하지만 어딘가 행복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재현은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해외연수 중에 온 너랑 다시 사귀지는 못할 거 같다는 문자를 보며 미련은 다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나 곧 결혼할 사람 앞에서 이런 감정을 꺼내 보이는 것도 못할 짓이었다.
그러니까 축하해줘야 했다. 멀쩡한 얼굴로, 멀쩡한 말로.
“축하해요, 언제 하는데요?”
“겨울에. 누나가 겨울의 신부 해보고 싶었다고 해서.”
“낭만 있긴 하죠. 근데 춥지 않으려나.”
“걱정해주는 거야?”
“아뇨, 걱정하는 거죠. 실내면 몰라 야외면 엄청 추울 텐데.”
심드렁하니 대답하자 ‘얘가 웬일이지’하던 얼굴이 ‘그럼 그렇지’로 바뀌었다. 안타깝지만 재현에게는 전남친의 신부를 걱정해줄 정도로 밸이 좋진 않았다. 문대가 그걸 모른다는 점에서는 다행이었지만. 그의 안에서는 항상 인격자로 남고 싶었다. 구질구질한 마음은 몰라줬으면 했다.
“아, 너?”
“당연한 거 아닌가요. 신부는 문대 씨가 잘 챙겨줄 텐데.”
“그건 맞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문대는 어딘가 짜증났다. 예랑에게 가질 만한 감정은 아니라, 그리고 눈빛에서 다 드러날까봐 그를 보지 않고 있었는데, 새하얀 편지지가 눈 앞에 불쑥 들어왔다.
“청첩장?”
“응, 고심해서 골랐어. 예뻐?”
“예쁘죠.”
문대 씨가 골랐는데 안 예쁠까. 옛날부터 그의 심미안은 가히 최고 수준이었다. 그러니 공무원하다가 사진으로 빵 떴지. 사진에 대한 열정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안정적인 수입인 공무원을 포기하고 사진 쪽으로 튼 건 의외였다. 결정은 심사숙고해서 내리는 편이니 알아서 잘 했겠지만, 궁금한 건 궁금한 거다.
“물어볼 게 있는데요.”
“뭔데?”
“공무원 왜 그만 두고 해외 연수 갔어요?”
“……번아웃 와서.”
“번아웃?”
“그래, 내가 좀 열심히 살았냐. 그래서 슬슬 지쳐가고 있었는데 누가 취미를 가져보라고 해서. 마침 사진기가 옆에 있길래 좀 찍어서 올렸는데 그게 관심을 받고 그랬네.”
재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 전환으로 했다가 그게 관심을 받았구나. 마침 일에도 질렸었고. 이것저것 돈 굴릴 줄도 아니 씨드 머니로 생활비 벌 자신은 있었겠고. 그리고 하다 보니까 그게 더 적성에 맞았겠지. 아니었으면 사진작가가 되지도 않았을 테니 말이다.
“왜?”
“아뇨, 그냥……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던 거 같아서요.”
“그랬나.”
“네.”
침묵.
예전과는 다르게 어색했다. 새삼 실감 났다. 우리가 이제 이정도로 가깝지 못하는 사이라는 게. 우리가 더 이상 연인 관계가 아니라는 게. 재현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의 먹지 않은 케이크와 커피는 문대 쪽으로 밀어 놨다.
“곧 점심 시간 끝나가요. 더 할 말 있어요?”
“아니, 없어.”
“그럼 이만 가볼게요. 결혼 다시 한번 축하하고요. 식에 있을지 없을지는 그때 가 봐야 알 거 같아요. 요즘 일정이 워낙 변동이 많아서. 그래도 웬만하면 갈게요.”
“그래, 알겠다.”
“조심히 들어가요.”
문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가 복잡해 보였지만 재현의 알 바는 아니었다. 더 이상.

 

 

 

 


“재현이 형, 진짜 가게?”
“가야지, 가겠다고 했는데.”
“하아……. 전남친 결혼식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러 가는 사람은 형밖에 없을 거야.”
“왜 없겠어, 세상 사람들이 다 전애인이랑 안 좋게 헤어지는 것도 아닌데.”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식 시작은 11시야. 아직 시간 있으니까 여유 되면 와.”
채율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재현은 마지막으로 옷차림을 점검하고 집을 나섰다. 9시 30분. 현재 시각. 도착 시각은 10시 10분. 애매한 거리였다. 차가 막히면 1시간에서 1시간 10분까지 걸리는 거리. 이것도 마찬가지로 애매했다. 한숨을 쉰 재현은 차에 시동을 걸었다.
청첩장을 받고 미련을 털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은 아닌가 보다. 예신이 보면 기분 나빠할 테니 앞에서는 티를 내지 말아야 했다. 적어도 사람 간의 기본 예의는 지켜야 하지 않은가.
식장에 도착하자 이미 문대가 앞에서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게 참 보기 좋으면서도…….
“왔어?”
“오라고 했잖아요?”
“그건 맞지. 우리 뷔페 맛있는 데 불렀어. 시간 되면 먹고 가.”
“알겠어요. 어차피 아침도 안 먹었는데.”
“……그래, 많이 먹긴 하겠네. 들어가.”
재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데나 골라잡고 앉아 시간을 죽이고 있자, 결혼식이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채율이 옆에 앉았다.
“안 오는 줄 알았는데.”
“그러려고 했는데, 한 명 정돈 같이 있어줘야 할 거 같아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신부와 신랑이 동시 입장했다. 두 사람 다 행복해 보였다. 재현은 그 둘을 바라보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박수를 쳤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고마워.”

 

 

 

 


언젠가 문대에게 그런 걸 물어본 적이 있었다. 대학생 때 그 사람 왜 사귀었냐고. 그러자 그런 말을 했다.
‘우리 엄마가 아빠를 만났을 때 얘기해준 적이 있었거든. 그때 엄마가 아빠를 보고 내가 이 사람이랑 결혼하겠구나, 를 느꼈던 게 딱 보고 3초래. 나한테 그 형이 그랬어. 결혼까지는 아니어도, 오래 사귀겠구나. 내 인연이겠구나. 뭐 그랬지. 적어도 10년은 갈 줄 알았는데 그거의 반의 반의 반도 안 갔네. 엄마가 너무 맹신하지 말라고 했을 때 들었어야 했는데.’
그걸 들었을 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그런 걸 믿는 성격도 아니고. 그리고 이미 눈 앞에 있는 사람이 실패한 전적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헤어질 때는 물어보고 싶었다. 날 봤을 때 그런 기분을 느꼈는지. 내가 네 3초였는지. 답변을 들은 제 행동이 뭘지 상상이 가질 않아 끝내 물어보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네게 묻는다. 그 사람이, 네 3초인지. 
만일 맞다면, 영원 같은 3초를 누려야지.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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